최덕휴(Choi DokHu)

1922년07월04일 충남 홍성 출생 - 1998년02월21일

서울에서 활동

작가 프로필 이미지

소개말

나의 고향은 충남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 일명 “여술마을”로 홍성보통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는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때 은사이신 장발 선생님의 영향과 형님의 후원으로 일찍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그후 일본 동경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일본동광회전과 창원회전을 통해 작품활동을 했다.

나의 일생에 있어 광복군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다.
태평양전쟁말기, 패망직전의 일본은 1943년 한인대학생까지 전쟁터로 끌어내어 값없는 죽음을 강요하였다. 대학의 졸업도 6개월 단축하여 9월로 했고, 10월에는 학생 동원령을 선포, 11월에는 강제로 군에 지원시켰으며, 다음해 1월 20일에는 군복을 입혀 최전선으로 끌어갔다. 나는 중지파견군 64사단에 배속되어 양자강변의 양주근처 단양에서 초년병 교육을 받아다. 그리고 북지 신향에서 하남작전으로 남하하던중 장사남쪽, 형산현 북미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을 향했다. 이는 한가닥 일엽편주를 타고 망망대해에 도전하는 필사의 모험이기도 했다. 중경에 한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은 탈출 1개월전 장사남쪽 남악산의 농가에 들렀을 때 우연히 벽에 도배된 헌신문 ‘상담민보’에서 한국 임시정부의 내력과 광복군의 활동상 등의 기사를 천재일우로 보게된 까닭이었다.

그곳에서 만여리의 먼 곳 중경까지 찾아간다는 것은 대나무장대로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신념으로 나는 도전했다. 탈출 이틀 후 저녁 잠자리를 구걸했던 동네에서 유교수를 만났는데, 그 벽촌에서 일본말을 아는 사람을 만나 의사를 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친절하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유교수는 일본경도제대를 졸업하고 사천대학, 귀주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귀성하여 요양중에 있었을 때였는데 당시 나에게는 커다란 구세주였다. 현장 장원씨에게도 좋게 추전해 주어 그 덕택으로 환영잔치까지 성대하게 받은 나는 제9전구 장관 사령부까지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여성현에 무사히 당도했다. 이곳 9전구 소령과의 상봉은 나에게 두고두고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다. 제9전구의 간훈단에 입교하여 단기 군사교육을 수료하였으며 중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2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명으로 제9전구 내에 중국군사위원회 지원으로 제1지대 제3구대가 창설되었고, 구대장으로는 이병곤 동지가 취임했다. 고문으로는 중국군 현역장성인 유광위소장 외 중령3명, 소령2명이 배속되어 왔다. 나는 편제상으로는 제3구대 제1지역책으로 전방에서의 대일작전이 화급했던 관계로 중국부대에 겸무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정확한 뉴스도 9월에 가서야 알게되었고, 대일전은 끝났으나 공산군과의 산발적인 전투는 지속되고 있었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도 국민정부가 남경으로 환도함에 따라 남경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던 광복군 동지들은 ’46년 4월에야 남경으로 합류하고 상해로 나와 귀국길 수송선에 승선하였다. 선실에서 많은 동지들은 비록 민간인 신분으로 환국하는 길이었지만 그간의 고난을 참고 이긴 보람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당당한 자부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장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나는 학생시절 꿈이었던 미술에 전념하는 일과 후진양성을 위해 교직을 택하겠다고 말했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결심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1950년 6. 25사변이 일어났을 때 나는 북괴의 만행에 분노하여 그림에 대한 욕망을 잠시 누르고 군에 다시 입대했다. 육군본부, 국방부 등에서 ’56년 5월 30일까지 복무했다. 그후 다시 교직에 복직한 후 오늘날까지 그림에 대한 애착과 열성으로 끊임없이 정진하여 왔으며 보다 훌륭한 창작활동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