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Jinkyu Kwon)

1922년04월07일 함경남도 함흥 출생 - 1973년05월04일

서울에서 활동

학력

1953년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 전공 학사

경력

1943년 3월 춘천 공립중학교 졸업
1947년 속리산 법주사 대불 제작에 참가 및 성북동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움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감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서 1953년 3월까지 시미즈 다카시(清水多嘉示)에게 사사함
1951년 석조를 시작함.
1956년 부르델 전시(도쿄 브리지스톤 미술관)를 계기로 더욱더 부르델에게 심취
1958년 일양회 제 4회전람회에서 일양상을 수상하여 회우(會友)로 추천됨.
1959년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하여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지음
1960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조각을 가르침
1961년 숭례문 중수작업에 1963년까지 제도사로 참여
1962년 <성웅 이순신> 영화촬영세트 제작에 참여 및 이후 지속적으로 영화, 연극 무대 제작에 참여
1963년 덕성여자대학 의상학과와 생활미술과에서 강의함
1964년 건축, 고미술을 모티프로 한 테라코타, 부조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함
1965년 9월 신문회관(서울)에서 권진규 조각전을 개최(수화랑 주최)
1968년 7월 니혼바시화랑(도쿄)에서 권진규 조각전을 개최 및 <애자>와 <춘엽니>를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 기증함
1970년 건칠작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작
1971년 12월 명동화랑(서울)에서 개관1주년기념 초대전으로 권진규조각작품전을 개최 1972년 3월3일『 조선일보』의 시리즈 기사「예술적 산보」 화가의 수상⑧에「노실(爐室) 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을 발표
1973년 5월 4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전에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을 본 후 자결함.

수상경력

1958 제4회 일양회 미술전람회 일양상 수상, 일본
1955년 제 40회 이과전에 <마두A>, <마두 B>를 출품하여 입선
1954년 제 39회 이과전에 <마두>, <말>을 출품하여 입선
1953년 제 38회 이과전에 <기사>, <마두A>, <마두 B>를 출품하여 특대를 수상함.
1952년 제 37회 이과전에 <백주몽>을 출품하여 입선

개인전

2023 권진규의 영원한 집,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한국
2022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영원을 빚은 권진규’,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한국
2022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7 권진규의 에센스, PKM 갤러리, 서울, 한국
2017 권진규 소명을 얻은 자, 권진규미술관, 춘천, 한국
2016 권진규, 침잠의 시간, 권진규미술관, 춘천, 한국
2016 또 다른 권진규, 권진규미술관, 춘천, 한국
2015 개관기념전 권진규과 여인, 권진규미술관, 춘천, 한국
2015 권진규 아카이브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디지털정보실, 서울, 한국
2010 권진규: 탈주, 하이트문화재단, 서울, 한국
2009 무사시노미술대학 개교 80주년 기념 권진규 전, 무사시노미술대학, 도쿄, 일본
2009 권진규 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 일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한국
2003 권진규 30주기전, 인사아트센터, 서울, 한국
1998 권진규 25주기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
1997 권진규 특별전, 부산공간화랑, 부산, 한국
1988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회고전, 호암갤러리, 서울, 한국
1974 권진규 1주기 추모전, 명동화랑, 서울, 한국
1971 권진규 조각작품전, 명동화랑, 서울, 한국
1968 권진규 조각전, 니혼바시화랑, 도쿄, 일본
1965 권진규 조각전, 신문회관, 수화랑 주최, 서울, 한국

단체전

2023 사계,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2023 지천명知天命에 화답畵答하다–시간을 담은 공간, 예술을 담은 시간, 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 한국
2023 보통 사람들의 찬란한 역사, 경남도립미술관, 경남 창원
2023 웰컴 홈: 개화 開花, 대구미술관, 대구, 한국
2023 이건희컬렉션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 경기도미술관, 안산
2023 다시 보다 : 한국근현대미술전, 소마미술관, 서울
2022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로스엔젤레스, 미국
2022 김복진과 한국의 근현대 조각가들, 청주시립미술관, 청주, 한국
2022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한국
2022 가면무도회 Masquerade,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2 온 페이퍼 on paper, PKM 갤러리, 서울
2022 가나문화재단 신소장품전 2020-2021, 인사아트센터, 서울
202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전 – 한국근현대미술 명작, 여수엑스포아트갤러리, 여수
2021 불멸의 초상 권진규×목정욱, PKM 갤러리, 서울
2021 DNA :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Dynamic & Alive Korean Art),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2021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1 한국근현대미술전: 봄이 와 있었다, 포항시립미술관, 포항
2020 Time in Space: The Life Style, PKM 갤러리, 서울, 한국
2020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2019 근대의 꿈: 꽃나무는 심어 놓고, 북서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9 한국 근현대조각 100주년: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 한국
2019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한국
2018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2018 소장품전: 근대를 수놓은 그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2016 한국근대미술 11인선 유작전, 권진규미술관, 춘천, 한국
2013, 화가의 여인, 나부裸婦 : 한국근현대누드걸작展 1930~2000, 롯데갤러리 본점, 서울
2013 面面 시대의 얼굴, 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3 한국미술의 거장: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한국
2013 진실의 순간 1-현대 조각의 단면, 청조갤러리, 뮤지엄 산, 원주, 한국
2013 권진규, 김정숙 기증 작품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2010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전, 63스카이아트 미술관, 서울, 한국
2001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16인전, 그로리치화랑, 서울, 한국
1999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호암미술관, 서울, 한국
1999 한국조각 50년: 1950-1999, 갤러리현대, 서울, 한국
1999 신소장품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1999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한국
1998 개관기념전 거장의 향기-권진규 장욱진 박생광, 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
1998 드로잉을 통한 근현대미술의 발자취, 그로리치화랑, 서울, 한국
1998 매스터피스, 쥴리아나갤러리, 서울, 한국
1998 한국인의 얼굴: 1,500년의 역사-전통에서 현대까지,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1996 한국 수채화 드로잉 판화 대표작가전, 서초갤러리, 서울, 한국
1995 개관 20년 기념전, 공간화랑, 부산, 한국
1995 작고 현존작가 30인의 드로잉전, 그로리치화랑, 서울, 한국
1993 작고작가 작품전, 가나화랑, 서울, 한국
1992 개관 10돌 기념전, 호암갤러리, 서울, 한국
1991 한국현대미술 1세대전, 갤러리 룩스, 서울, 한국
1991 5000년 한국인의 얼굴 – 인물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한국
1991 자취를 남긴 작가들, 샘터화랑, 서울, 한국
1990 개관전 예술혼을 사르다간 사람들, 갤러리아미술관, 서울, 한국
1991 한국미술위상전 1부, 그로리치화랑, 서울, 한국
1991 개관기념전 1부 작고작가전, 가나화랑, 서울 한국
1989 한국조각미술대전, 한국무역센터 중앙광장, 선화랑, 서울, 한국
1984 개관기념전, 두손갤러리, 서울, 한국
1984 한국인체조각-옛날과 오늘, 호암미술관, 용인, 한국
1983 근대미술의 대가 5인전, 가람화랑, 서울, 한국
1982 개관전, 호암미술관, 용인, 한국
1980 수집작품특별전시, 고려대학교 박물관, 서울, 한국
1975 현대한국작가 누드전, 아름화랑 서울, 한국
1974 한국현대조각대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
1974 애장가들의 희귀작품전, 아름화랑, 서울, 한국
1973 현대미술실 개설기념전, 고려대학교 박물관, 서울, 한국

추가정보

吳光洙(미술평론가)

彫刻家 權鎭奎氏가 自殺하였다. 그것뿐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또어떠한 형태의 죽음이든 딴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한다는 것은이미 奢侈스러운 일이다. 그의 自殺을 園繞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미화 된다해도 그의 죽음이란 리어리티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엄청난象外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自殺이란 方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역시 그것은 그만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죽음을 통해 하나의 事件으로서보다는 行爲의 연장을 연상하계 되는 것은 그의 죽음이 行爲의 意濫로서 이미지 되기 때문이다.
思考가 끝나는 지점에서 行爲가 시작되지만 行爲는 行爲에 의해서끝난다는 이 모순을 그의 죽음은 示唆한다. 그의 죽음은 작품이 갖는끝없는 行爲의 지속을 자동차사고란 行爲로서 끝내었던 플록의 죽음과 이러한 경우 그와 너무나 유사하다. 그는 行爲란 의미를 가장 짙게 체득한 彫刻家였다.

權鎭奎氏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1964넌 경인가 新聞會館畵廊에서의 個人展때였다. 그러니까 일본서 돌아와서 몇 년후가 되는 해였다.國內에선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이 未知의 彫刻家는 이미 日本式裁野美術學敎에서 修學하고 二料會멤버로 있던, 그곳에선 상당한 지반을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國內展에서의 반향은 괘 냉담하였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없지 알았다. 무엇보다도 個人展이 열리는 54년경 전후라면 한국 현대조각이 가장 왕성한 실험기에 접어들던 무렵이다. 抽象彫刻의 등장과 새로운 材料회 실험이 가장 활발히展開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의 고답적인. 아나크로니즘이 좋은 반응을 가져올 리 만무한 일이다. 이 점은 다를 각도에서 본다면 近代彫刻의 傅統이 뿌리를 갖고 있지 못한 한국미술의 편견이라고도 말 할 수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個入展을 계기로 그을 國內 美衡界에 할려졌고, 또 그 이후 몇텃 건랑최에. 作品율 내 보이는 밀이 있었다. 그간 日本에서의 個入展을 갖는 외에는 별 활동히 없다가 71년 겨울 明東畵廊에서 두번째國內展이자 마지막 展示가 된 個入展이 열리면서 그에 대한 印象은 비교적 새롭게 미술계에 부각되었다.

이때 낸 作品은 테라·콧타(Terra Cotta)와 乾漆이란 독보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 질흙을 빚어 가마 속에서 구워내는 陶器의 제작과정과 같은 테라·콧타와 질흙 위에 漆液반죽해서 발라 올린 乾漆이란 方法은 우선 그 제작과정이 독특한 것이지만, 이를 시도하는 彫刻家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그의 作業의 일관성에 대한 많은 이해자를 만들어준 기회가 되었다.
테라·콧타에 의한 格調높은 肖像彫刻의 일련의 作品을 보여준 것 도 이때였으며 그것이 그의 作家的이미지를 뚜렷하게 이끌어준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이 個人展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뚜렷하게 부각시킨 셈이다. 또한 이때 韓國的리어리즘을 추구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많은 示唆를 주기도 했다. 이 점은 그의 作品을 지배하였든 巨匠들의 影響이란 무거운 그림자를 그 자신이 의식한 새로운 도약으로서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韓國的 리어리즘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못한 채였다. 轉國的 리어리즘의 形成이란 그에게는 너무나 벅찬 테제였던 것이 아닌가. 결국 그러한 스스로 짊어진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강박관념이 그의 죽음의 한 요인이 된 것은 아닌가. 그는 역시 體質的으로 藝術史는 소수의 天才에 의해 지배된다는 H·리드의 말처럼 〈天才形의 作家〉의 유형에 속하는 조각가다. 이러한점에서 본다면 그가 로댕, 부르델에 연결되는 傳援形의 작가란 점도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같다. 로댕이나 그를 이은 마이욜 , 부루델도 偉大한 彫刻家였다. 權鎭奎氏의 作家的 存在도 이 偉大한 彫刻家像에서떠 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新藝術의 創造者는 될 수 없었다. H·리드가 지적한대로 이미 近代彫刻의 展開는 오히려 로댕이나 부르델 쪽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세잔느란 畵家쪽이란 점은 이 경우 많은 示唆를 던져준다. 로댕은 大藝術家이긴 했으나 세잔느와 같은 意味에서의 創始者는 아니었다. 즉 로댕이나 그를 계승한 마이욜이나 부루델은 그 자신들은偉大한 彫刻家며 銳敏한 藝術家였으나 彫刻의 未來의 發展에는 아무런 貢獻도 남기지 못했다는 리드의 말은 우리들의 權鎭奎氏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는 로댕이나 부루델같이 偉大한 彫刻家는 될 수있을지언정(실제 그는 淸水多嘉示에서 부루델, 로댕으로 이어지는 계 보의 작가이다) 새로운 彫刻의 비전을 제시하는 藝術家는 될 수 없었다. 세잔느 뒤에는 피카소, 곤자레스, 부랑쿠시, 아르키펭코, ?츠, 로란스 같은 새로운 彫刻의 方法을 연 創始者들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에 비하여 그의 뒤에는 결코 이러한 創始的비전은 기대할 수 없었 다.

그의 作業過程이나 行爲가 陶工의 그것과 가장 닮아있다는 것도 이 러한 創始的 유형에서 벗어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그는 陶工 와 같은 制作의 無償性을 누구보다도 짙게 의식한 작가였던 것 같다.本質的으로 彫刻이 視覺보다도 觸覺에 의한 藝術이란 것을 가장 민감 하게 체득하고 있었든 그에게 실험성으로 연결되는 한국적 리어리즘 의 形成이란 테제는 이미 그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그가 죽기전 한 때 佛像에 깊이 傾倒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혹시 이 佛像을 통해 그의 彫刻的 歸依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역시 實驗性을 동반하는 한국적 리어리즘의 形成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그에게 있어 實驗이란 造形의 文法상의 그것이 아니라 해프틱(內部觸覺的) 한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경우도 짙게 느낄수 있다.

고독이란 말처럼 진부해져버린 말도 없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 바로 彫刻家 權鎭奎氏를 두고 말이다.그의 마지막 行爲도 이 바깥과의 斷絶을 고수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한 사람의 偉大한 藝術家는 될수 있을지언정 創始者는 될 수 없었다. 한국 현대조각에 어떤 비젼도 줄 수 없다는데 이 아나크로니스트의 悲劇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