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CRE8TIVE REPORT -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전

2018.01.11 ▶ 2018.03.03

OCI 미술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OCI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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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ㅣ 2018년 01월 11일 목요일 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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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푸르나

    복제된 신체-움 Womb 실리콘 캐스팅, 경질우레탄_가변설치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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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광호

    Cape Coat 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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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미

    라이거와 타이곤의 초상 순지에 분채, 금박_180×36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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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진

    8cm의 녹조-강물은 다시 흘러야합니다 326장의 녹조 드로잉, 8cm의 아크릴 상자_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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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윤택

    날아가는 공과 떨어지는 나뭇잎이 만날 확률 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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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호

    창고공장 현수막에 채색_90×194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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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영

    Forest12 캔버스에 유채_181.8×291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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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준 周代焌

    1025-在空間中的三條線2 Three lines in the spac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60cm_2017

  • Press Release

    진실을 줍는 원시인들

    작가는 진실을 찾아 말랑말랑하게 소화하는 사람이다. 진실은 누군가 주우면, 그 순간 사실로 변한다. 사실이란 ‘탐구된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은 날것이고 야생이며 사실은 수렵, 채집한 진실이다. 수렵과 채집에 그치지 않고 진실을 경작하고 목축하기 시작한다. 잉여 진실이 쌓이고 팔려 나간다. 성에 안 차는지 때론 굽고 튀기며 갖은 조리를 일삼고 유전자 변형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도통 날것의 형체가 남아날 리 없다. 사실은 이제 ‘유사 진실’이다. 그래서 버전도 참 다양하다.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사실 말고 진실을. 그들은 양식업보다, 최대한 날 것의 수렵과 채집을 시도한다. 댓글을 달고 소문을 내기보다 그 현장을 몸소 찾아 나선다. 그들은 원시인이길 원한다. 신석기 유적지 《2018 Cre8tive Report》에서, 원시인들이 캐 낸 나름의 진실을 조개껍질 엮듯 경건히 엮어 내어 본다.

    김푸르나의 작업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 〈경계 없는 신체(The Borderless Body〉란 주어진 것의 경계 허물기와 한계 극복 시도를 암시한다. 생리적 한계일 수도, 시간적 선후 체계일 수도, 물리적인 경계일 수도, 인과적 관계일 수도, 또 사회적 위계일 수도 있다. 남녀(男女), 생사(生死), 내외(內外), 과보(果報), 정부(正副) 등의 형태로 누구나 경험하기 마련이다.

    신체는 ‘경계 없음’을 향한 고찰과 표현 수단이고, 형식이고 또 재료며 동시에 극복 대상이다. 크게 세 가지 조형 방식이 개입하는데 먼저 단순화, 극대화가 두드러진다. 시야에 가득 찰 만큼 커다란 염색체, 근육, 신경, 혈액 성분은 도무지 내 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신체는 체험의 최전방에 근무하는 더듬이와 같은데, 더듬이로 더듬이를 더듬는 경험이 평범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기묘(奇妙), 기이하고 묘할 것이다. 그의 2015년도 개인전이 《기묘한 전시》였다.

    이질적 조합으로 낯섦을 넘어 불편을 유도하기도 한다. 생식기의 각 부위를 재조합해 새로운 조형을 제안한다. 반복과 병치로 패턴을 형성하고, 특정성을 사멸시키고 도식화한다. 역설적이게도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을 평균화하고 대량화할수록 오히려 대상과 멀어진다. ‘서먹한 내 몸’과 같은 영육(靈肉)의 격조(隔阻)를 일으킨다. 첫 극복의 생경한 후유증이다. 비로소 객관화, 대상화의 시점을 맛본 셈이다. 신체가 ‘채집’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러하다.

    자라는 건 초심을 잃고, 대신 두려움을 채우는 과정이다. 두려움을 굳히면 ‘틀’이 된다. 나광호는 아이들의 치기와 패기, 용기를 빌려 틀을 극복한다.
    ‘명화’는 미술가에게 원본, 규율, 모범, 기준, 위대함, 절대성의 표상이다. 작가는 명화를 흉내 낸 아이들 그림 속 왜곡된 형태와 괴상한 표현 속에서, 그 위엄을 무시하거나 초월하는 어떤 비범함을 발견한다. “따라하지 마!”하며 다투는 모습을 아이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듯, 원본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모방은 때로 ‘맞먹기’로 다가오며 위기감을 준다. 그 위력을 자신의 캔버스에 자신의 손으로 옮겨 담음으로 장난은 다시 예술이 된다. 〈Old Man in Sorrow〉의 노인은 체구가 좀 작아지긴 했으나 고흐와는 또 다른, 그 체구에 나름 어울리는 새삼스런 슬픔의 색상으로 옷이 물결친다. 여러 손을 두루 거치며 어색함과 능숙함을 겸비한 그림들이 작품성, 그것을 보는 눈, 가치의 대소에 혼란을 끼얹는다. 예술과 장난,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인정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위계를 거역하고 거만을 희롱하며 고정관념을 전복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반전한다. 거기서 쾌와 재미를 찾는 자신을 스스로 반골이라 칭한다. 반골의 봉기에는 기백과 전략이 필요하다. 틀에 갇히지도, 틀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아이들의 눈을 빌리는 것이야말로 유효한 무장이며 세대를 아우르는 합종연횡인 셈이다.

    “예쁘다. 눈에 띈다. 오묘하다. 독특하다. 휘황찬란하다.” 라오미의 작업을 접한 일반인들의 감상이자 더없이 정확한 감상이다. 무언가 좋은 것, 좋은 곳이다. 이른바 ‘별천지(別天地)’다. 지금 아등바등 구르는 내 현실(天地)과는 또 다른 특별(別)한 곳이다.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여기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바’, 곧 욕망, 꿈, 이상향, 희망, 소망, 환상, 이상, 목표, 포부, 야심이 곳곳에 둔갑한 세상이다. 생각 그대로 다른 이들에 공짜 전이될 수 없는 노릇이니 신화, 설화 등 전달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고, 지역색에 제법 적합하게 변조를 거쳐 공유해 왔다. 욕망과 좋은 것, 그리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최소 유의어, 사실상 동의어인데, 老와 生을 대립어로 보면 “나쁜 건 됐고, 좋은 것만 곁에 둔다.”, “늙는 건 싫고, 계속 살며 좋은 건 다 누리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기왕 찍는 사진은 조금이라도 멋지게 좋게 잘 나와야 마땅할 것이다. 근대 사진 속에 보이는 별천지 병풍과 잘 누빈 가죽과 만개한 꽃송이, 다소곳한 융단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극장 걸개그림은 영화관을 기웃대는 소학교 학생에게도, 장밋빛 데이트를 꿈꾸는 신여성에게도 아른대는 낭만의 깃발이다. 이북색이 물씬 풍기는 선전물과 해괴하게 변질된 북한 설화는 그들의 별천지를 향한 나름의 굳건한 이정표일 터이다. 이렇게 통시적(예나 지금이나), 공시적(어디에서나) 보편의 주제를 시기와 지역 특정적인 소재를 영입해 형체를 뽑아내는 것이 라오미의 주요한 작업 메커니즘이다.

    책상에 금을 긋고 짝꿍과 티격태격하던 그때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짙고 깊은 금으로 이미 가득 찬 세상을. 금은 내 것, 네 것의 경계이다. 그러고 보면 사유재 개념의 출현은 곧 금긋기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 박형진은 금으로 발 디딜 틈도 여의찮은 산하를 마주한다. 금은 산허리를 싹둑 가르는 도로로, 강줄기를 끊는 둑으로, 보행로와 등을 맞댄 높다란 공사 펜스로 매무새를 바꿔 가며 강산을 난도질한다. 복덕방마다 내걸린, 쪼개고 또 쪼개어 소보로빵 등짝 같은 지적도는 물리적인 금이 전부가 아님을 증언한다. 작업에 즐겨 등장하는 모눈은, 자연을 측정과 분할의 대상처럼 훑는 차가운 눈을 일인칭 시점으로 체험케 한다. 주식 한 주, 지분 한 점 쌓듯 빽빽이 들어찬 수직 수평의 망은, 자본의 금, 이해의 금이 얼마나 더 촘촘하고 치열하게 교차할는지 으름장을 놓는다. 문득, 해묵은 으름장 하나가 떠오른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혹은 편지)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中

    시애틀 추장은 이해관계와 아귀다툼으로 얼룩질 박형진의 풍경을, 씨실 날실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물 노릇을 하려 드는 인간들을, 이역만리에서 이미 150년 전에 예견한 듯하다.

    2차원 평면에 4차원을 담을 수 있을까? 사윤택의 캔버스는 표기 치수보다 훨씬 광활하다. 정육면체를 떠올려 보자. x, y축으로 뻗은 정사각형을 새로운 축(z축) 방향으로 쌓은 형태이다. 차원을 하나 높여, 우리가 사는 3차원의 x, y, z축으로 뻗은 입체를, 새로운 축(w축) 방향으로 쌓으면 4차원의 형태일 것이다. ‘정황(情況)’의 생김새가 있다면 3차원 순간을 일정량 쌓아 올린 4차원의 도형일 것이다. 공이 두 개, 사람이 세 명, 팔이 네 개처럼 보인다면 여전히 3차원 좌표에 서서 감상하는 탓이다. 그 미묘한 순간의 축으로, 그 정황의 방향으로 쌓아 올린 소나무들이 꿈틀대며 한 하늘에서 뒤얽히는 (듯 보이는)건 우연이 아니다.

    “회화의 ‘표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작가로서의 근본적 물음에 자답하기 위해, 질료, 형상 등 회화의 일반적 특성보다, 회화만의 서술구조와 화법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장치를 고민한다. ‘문득 묘해지는 순간’, 그것의 전개도를 그리는 기호와 장치…. 그의 대상과 수단은 모두 애매(曖昧)하다. 확신 없고 불분명한, 안개 낀 상황에야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숱한 ‘보통 애매’와 달리 그의 그것은 아주 선명하다. 애매할거면 제대로 애매하게. 그래서 작업은 ‘회화성 자체’를 추구하는 작업 중 가장 내러티브하고, 메시지를 남기려는 작업 가운데 가장 덜 내러티브하다. 전달하려 들진 않지만, 최소한의 공유가 있어야 순간의 올록볼록한 촉감을 함께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란 대세에 흔들리지 않는 주관으로 자신만만하고 굳건한 사람인가? 혹은 작은 변화에도 더없이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인가? 주변과 작용을 주고받고, 그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중요하다. 그때 거기에 함께한 것들이. 因緣, 엮여야 뭘 하지.

    이현호와 처음 연을 맺은 건 익히 알려진 대로 ‘숲’이다. 암순응(暗順應)을 거치자 등잔 밑이 문득 띄기 시작한다. 숲을 침범하던 것들, 숲을 담기 위해 배제되어 온 것들, 주어진 또 다른 조건, 숲의 여백으로 시선을 옮긴다. 말끔하게 차린 화면은 구겨지고 접히고 때 타고 빛바랜 낡은 현수막으로, 편평한 마감은 때론 입체 작업으로 평행 이동한다.

    맞은 편 아파트에 빼곡한 네모 창틀의 행렬을 세다 보면 문득 현기증에 그만 숫자를 놓치곤 한다. 그 행렬 일부를 발췌한 작업은 이전의 숲과는 다른 새로운 ‘패턴’으로 느껴질 만큼 평면적이다. 그런데, 현수막의 형체는 워낙 뚜렷하고 존재감이 현격해 레디메이드로서의 요소를 부정할 길이 없다. 이 점은 페인팅만 보았을 때 ‘재현’에서 좀 더 멀찍이 물러나던 작업에 더없이 강력한 현장 재현 효과를 부여한다. ‘메시지를 게시하고 전달하는 수단’이란 메타포, 메시지의 내용, 우후죽순 내걸려 소리 없는 목청의 각축장과 다름없을 신축 분양 단지의 큰 사거리, 그 모든 것이 화이트큐브로 이주하기 전의 현지 정황을 머릿속에서 재생하게 도우는, 혹은 강제하는 강력한 단서이자 외압이다.

    계모가 콩쥐에게 나무 호미와 밑 빠진 독에 이어 이번엔 가마솥의 부피를 구해오랬다. ‘수박 스무들이’라 답하니 오차가 크다며 야단을 맞았다. ‘사과 오백들이’라 하니 밥은 안 굶겼고, 절치부심 끝에 ‘콩 서 말 닷 되 한 홉들이’라 하자 팥쥐 너도 좀 본받으라며 극찬했다 한다.

    ‘적분(積分, integration)’의 개념을 설명할 때 단골 등장하는 구분구적법을 인문학적으로 묘사하면 ‘한없이 가깝게 다가감으로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차원을 뛰어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해당 차원에 무던히 충실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래서 허수영은 대상의 갖은 모습을 수집하고 구석구석 집요하게 적치함으로 대상의 차원에서 벗어난다. 붓질의 조합은 그 흔적들과 다른 무언가를, 풀과 꽃과 비와 나무를 나타낸다. 지시나 표현을 묵묵히 반복, 중첩할수록 오히려 개별적인 특성은 흐려져 간다. 마침내 특정한 형체에서 유리되어, 자연 풍경이라기 보단 실험실의 전자현미경 속이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우주 어느 성단을 펼쳐 놓은 듯한 새로운 이미지에 당도한다. 지시나 표현 각각이 그들을 이루는 붓질 하나하나의 역할을 맡은 격이다. 무언가에서 시작했으면서도, ‘이것은 무엇’이라 말하기 애매한 상태, 언어의 간극을 비집어 드는 것이야말로 그림이 지닌 예리한 첨단, 날렵한 몸매의 장점이고 의미이다.

    그에게 ‘다 그린’은 곧 ‘더 그릴 수 없는’의 의미이다. 모든 형태, 즉 노동의 결과는 노동 중이란 사실로 수렴한다. 그림에 극한값을 취해 다가가는 그림의 본색은 노동 자체, 물리성과 육체성이다. 그림 속에 충실할수록 그림 밖이 두드러진다. 그는 페인터이지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과정을 굳이 앞세우려하지 않는다. 장황한 설명은 이미 충분하고, 그저 이미지를 만끽하면 그만이다.

    인식이 존재하고 인식 주체가 여럿인 이상, 최소한 주체의 수만큼 입출력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독자적인 입출력 프로토콜 세트를 ‘주체’라 부르고, 이들의 작용 혹은 작동을 ‘인식’이라 봐도 무방하다. 어쩌면 본 전시는 그 몇 개의 프로토콜을 소개하는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다른 모든 주체들의 입장에선 ‘소문을 생산하는 일’이나 다름없겠다. 그 소문을 듣고 또 다른 소문을 생산할는지, 듣는 걸로 마무리할는지는 나머지 주체들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 김영기 (큐레이터)

    전시제목2018 CRE8TIVE REPORT -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전

    전시기간2018.01.11(목) - 2018.03.03(토)

    참여작가 김푸르나, 라오미, 박형진, 이현호, 주대준 周代焌, 나광호, 사윤택, 허수영

    초대일시2018년 01월 11일 목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6:00pm / 수요일_10:00am - 09:00pm
    아티스트 토크
    2018_0131 수요일 07:00pm
    2018_0210 토요일 03:00pm

    휴관일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OCI미술관) )

    연락처02-73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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