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호 초대전 - 펜으로 그린 세월

2018.07.03 ▶ 2018.07.15

금보성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평창36길 20 (평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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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ess Release

    문자도(文字図) 항아리에 담긴 비밀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우리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색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허정호도 필시 그 예술가 중의 한사람일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여느 그림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작가가 건네는 돋보기로 이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통을 넘어선 독자성이 감흥을 새롭게 한다. 정보시대에 우리가 접하는 모니터나 인쇄물의 이미지가 무수한 망점으로 짜여져 있듯이 허정호의 그림들은 문자를 픽셀로 삼아 다양한 일루전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자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쁜 경험은 정보시대의 이미지와 견줄 색다른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시각체험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가 그림에 묻어둔 비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허정호의 문자도는 한글이나 영문자로 구성된 단어나 문장이 선과 면의 요소를 대체하여 그려낸 그림이다. 그는 벌써 14여년전 부터 문자도에 빠져 살고 있는데, 초창기의 작업은 캔버스 바탕에 신문기사나 기도문의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채우고 화면의 중앙에 특정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서 바탕과 이미지의 관계에 주목케 하는 작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문자와 이미지는 화면에서 서로 융합되고 구조화되면서 그 자체로 고유한 형상들을 드러내는 독자성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화면을 깨알같은 글자로 채워가는 허정호의 작업방식은 편집광적인 기질과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주변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허정호의 문자도는 그의 소묘능력에 의해 화격이 높아진다. 작가의 극사실적 묘사력은 때로 그의 작품에 회화성을 축소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정도로 치밀하다. 그러나 뛰어난 소묘능력과 화면 경영의 철저함은 그의 그림을 특화시키는 요인이다. 완벽을 지향하는 그의 성품이 문자도와 상호 결합되면서 독자적인 조형 방식과 이념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작업은 이 진정성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진정성이란 작가의 예술적 성취가 자신이 지향하는 철학적 명제와 일치되거나, 예술과 삶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에서 연유된 속성이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대부분 100호에서 150호에 이르는 대작들이다. 각각의 작품에는 하나의 항아리가 화면에 거대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으며 작가는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문양에서 문자도의 묘미를 살리는데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캔버스의 바탕이나 도자기의 표면 그리고 문양에 이르는 화면 전체는 문자로 채워져 있으며 명암의 효과나 색채의 농도도 역시 배치된 글자의 밀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거리를 두고 그림을 마주하면 철저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진 착한 항아리 이미지가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항아리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일루전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치밀한 계산과 의도가 담겨있다.

    허정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의미는 ‘채우기와 비우기 사이의 간극’이다. 작가가 선택한 항아리는 채움과 비움의 동시적 의미를 내포하는 사물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아리는 채움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면서도 비어있음을 본질로 삼는 존재물이다. 항아리의 빈 공간은 채움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고, 비어있음이 드러내는 충만감을 발견하게 되는 철학적 공간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회화 작품으로서 허정호의 항아리 그림은 이러한 인식론적 명제를 구체적 이미지로 드러내기 위한 시각적 장치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 면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가는 항아리의 형태를 배경으로부터 명확히 분리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이를 위해 작가는 항아리 자체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명암의 대비효과를 최소화 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와 배경의 관계를 소극적으로 처리해 항아리의 물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화면에서 바탕과 항아리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처리하여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문양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의 결과다. 그의 그림은 항아리의 은은한 볼륨감과 더불어 평면성을 띠게 되며 이로써 화면에 명상적 공간이 드러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허정호의 작업실 한 벽면에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발췌한 ‘대영약충(大盈若沖)’이란 구절이 붙어있다. ‘큰 채워짐은 텅빈것과 같다’는 의미의 이 고사성어는 그가 항아리를 그림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와, 거대한 화면을 채움과 비움의 사상이 교차하는 인식의 터로 만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단서이다. 실상 그림의 장구한 역사는 화면에 어떤 것을 채우거나 비워내는 과정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권력 따위의 거대 담론으로 채워진 아카데미즘 미술에서, 화면을 비워내고 궁극적으로 추상에 이르는 모더니즘 까지의 노정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허정호의 평면회화에서 채움과 비움의 사이에 대한 성찰은 회화사의 맥락에서 이해될 가능성을 지닌다.

    허정호의 작품을 대할 때 떠오르는 또 다른 명제는 편집광적 작업방식이다. 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화면에 달라붙어 산다. 캔버스가 대형이니 달라붙어 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바늘처럼 세밀한 펜을 들고 끝없는 문자쓰기 여행을 하는 그의 심리는 아마도 대양의 심연을 탐사하는 잠수부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반복과 나열의 과정을 통해 무의미의 영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자아를 만나는 도인의 심상을 찾아나선 것일까. 이렇듯 허정호의 편집광적 작업방식은 논리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직관과 무의미의 유희로 가득찬 색다른 정원으로 보는이들을 이끌고 있다.


    허정호의 작업실 한구석에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또 하나의 구절이 걸려있다. ‘사물의 유용성은 물질에서 나오지만 사물의 본질을 비물질에서 나온다’. 이 구절은 허정호의 문자도 작업이 점, 선, 면의 조형언어를 글자로 변주해 사용하는 차원의 회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에 연유된 새로운 차원의 사상에 끈이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과 비물질의 사이에 놓인 세상의 가치, 우리가 이것을 이해 할 때 허정호의 문자도에서 색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제목허정호 초대전 - 펜으로 그린 세월

    전시기간2018.07.03(화) - 2018.07.15(일)

    참여작가 허정호

    관람시간10:30am - 06:3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금보성아트센터 KumBoseong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6길 20 (평창동) )

    연락처02-396-8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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