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디지털 환경을 기반으로 제작, 생산되는 시각물에서 드러나는 관습, 관행적인 측면은 작업에 있어 주된 관심사 중 하나이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워드등 과 같은 대중적인 소프트웨어는 컴퓨터와 인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각각의 소프트웨어에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명령어, 템플릿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용자를 편리하게 함과 동시에 오늘날 시각적 환경의 관행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물질화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입출력 기기들도 역시 특정한 방식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요구한다.

길거리의 현수막, 전단지, 널부러진 불법 명함, 건물을 뒤덮고 있는 간판 등등은 도시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풍경이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비슷한 모습의 길거리 인쇄물은 우리 사회의 관행성을 드러내는 지표 중 하나이다. 소프트웨어에 기본적으로 설정되어있는 템플릿의 선택과 조합만으로 큰 고민의 흔적 없이(?) 관성적으로 제작되어 온 것 같은 길거리 인쇄물들은 디자인 되었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선택되고 배치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길거리의 각종 인쇄물들은 오브제이기도 하다. 오브제로서 가지고 있는 미묘한 물성적인 느낌은 강렬하고 촌스러운 시각적인 형식과 어우러져 획일적이지만 독특한(?) 지역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길거리의 버내큘러한 풍경은 매우 일상적이지만 ‘고급’이라고 불리우는 영역에서, 혹은 아카데믹한 영역에서 흔히 외면하는 타자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빨강, 노랑, 파랑의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색감, 명확한 가시성, 자본주의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밷는 직설적이고 명쾌한 문구, 값싼 제작비용,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닮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발칙함은 ‘고급’의 영역에서 받아들이기 불편한 표면인 것 같다.

그동안 작업해온 삐죽삐죽한 형상은 과거에 디자인 분야에 있으면서 경험했던 효율성, 경제성, 안전성 등등 과 같은 가치, 관습에 대한 개인적인 의구심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삐죽삐죽한 형상을 구현하는데는 일반적인 형태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 가격이 높기 마련이다.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물리적인 제약이 많이 따른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에서 재현될 때에도 삐죽삐죽한 형상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대각선들로 인해 이미지가 온전히 구현되기 보다는 이미지의 불확정적인 측면을 종종 드러낸다. 어떻게 보면 디지털 환경을 매개로 변환되고 유동하는 이미지는 동일한 데이터로 copy & paste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직관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열화된 데이터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질적인 이미지로 간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거리의 인쇄물과 삐죽삐죽한 것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양 극의 위치에 있어 보인다. 하나는 저렴하고 쉽게 만들어지며 또 다른 하나는 비효율적이고 여러모로 불편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타자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조승범-

전시제목조승범: 빨강 노랑 파랑 검정

전시기간2018.07.25(수) - 2018.08.26(일)

참여작가 조승범

관람시간10:30am - 06:00pm

휴관일없음, 휴관시 갤러리 웹사이트 공지

장르드로잉, 설치

관람료없음

장소갤러리 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인사동) 갤러리 밈 3층)

연락처02-733-8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