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생곤
연기가 흐르는 풍경1 캔버스에 호분 안료, 33x53cm, 2019
한생곤
연기가 흐르는 풍경2 목탄 위에 먹 안료, 20x29cm , 2019
한생곤
연기가 흐르는 풍경3 캔버스에 먹 안료, 24x32cm, 2019
한생곤
새로운 연기 캔버스에 먹 안료, 24x33cm, 2019
한생곤
돌을 키우는 사람 캔버스에 안료 홍합껍질가루, 41x53cm, 2019
한생곤
새로운 연기 캔버스에 안료, 53x73cm, 2019
한생곤
황해에서 캔버스에 안료 먹 콘테, 24x33cm, 2019
한생곤
겨울산 캔버스에 목탄 호분 안료, 32x42cm, 2019
연기가 흐르는 풍경
그림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한다. 뭘 어떻게 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스키스나 드로잉이라는 행(行)이 따른다. 어둠 속을 더듬는 막연한 탐색이다. 이런 끄적거림을 통해 흐릿한 심상(心象)이 조금씩 구체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식(識)이 일어난다.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어떤 재료를 써야 할지 감이 잡힌다. 이로써 실마리가 풀려나간다.
명색(名色)은 우리가 사는 공간 속 여러 사물들이다. 사물들은 이름이 있다. 이 사물들을 지각하는 감각이 육입(六入)이다. 육입은 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살아있는 이상 주변의 이런 존재들과 감각기관이 부딪히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촉(觸)이다. 이 촉에 의해 수(受)가 일어난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뉘앙스를 ‘수(受)’하는 감각이 좋다. ‘수’를 하다보면 호불호가 생긴다. 이를 애(愛)라고 한다.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취(取)가 생긴다. 취사선택은 골라잡는 것이다. 골라잡게 되면 내 것이 된다. 이것이 유(有)이다.
원래는 연기(煙氣), 그러니까 영어로 스모크(smoke)를 그렸던 것이 시작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들판에서 일을 하시고 난 다음 남은 것들을 태우시는 모습이 먼저 있었다. 그런데 연기와 연기의 발음이 같아서 연상작용으로 개념이 이동하였다. 유(有)에서 생(生)이 연결된 것이다. 다시말해 스모크의 연기가 먼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12연기의 연기라는 개념이 다시 전생(轉生)한 것이다. 일단 나면 노사(老死)는 필연이다. 늙고 죽는다는 것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흐름을 대표하는 말이다. 그래서 ‘흐르다’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연기와 연기, 이 말은 묘하게도 의미로나 이미지로나 잘 섞인다.
이렇게 불교의 12연기(緣起)를 작업과정과 매치시켜보았다. 여기서 작업(作業)이란 말도 재밌다. 업(業)을 짓(作)는 행위니까. 업이란 바로 위의 12연기 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공간에서 쌓이는 메카니즘이다. 이로써 유형과 무형의 양차원에서 업의 무더기인 업장(業藏)이 나온다. 화가는 작업을 통해 보기 좋은 업장, 즉 작품(作品)을 만드는 사람이다. 끝없이 생멸하는 인연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서 다시 나투게 하는 것이 내 작업활동의 본질이다. 나툼이란 나타내는 걸 말한다. 나툼은 동어를 반복하는 재현(再現)이 아니다. 요컨대 술은 쌀이 아니다. 시인들이 시를 빚어내고 작곡가가 음악을 창조하는 일은 동어반복의 재현행위가 아니다. 재현은 같은 차원에서 멤돌지만 나툼은 차원에서 차원으로 건너뛴다. 이 끝없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연기의 흐름만큼 흥미로운 드라마가 있을까? 내가 지금도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림을 그린다’는 이 일의 연기 작용이 매우 흥미로운 조형적 놀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타이틀을 보고 공기 중에 흐르는 연기(煙氣)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안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출발 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불교의 연기(緣起)라는 개념이 달라붙었고 이 둘이 왔다갔다 섞이며 이번 그림들이 태어났다. 이러다보니 그림을 볼 때도 이게 공기 중의 연기인지 불교 인식론에서 말하는 12연기의 연기인지 오락가락 하게된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림이라는 사물에 촉하여 수가 생기고 애와 취의 망설임이 생기는 현장. 호불호하며 마음에 뭔가가 모락모락 생기는 현상. 바로 이것이 연기가 흐르는 풍경이므로.
-한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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