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희: 얇은 땅 위에 On Thin Land

2019.11.08 ▶ 2019.12.01

갤러리 학고재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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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ㅣ 2019년 11월 08일 금요일 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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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얇은 땅 위에 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62.1x260.6cm (162.1x130.3cm 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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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Sudden Nagging 2010/19, Oil on canvas, 90.9x116.7cm (5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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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A Month Later 2018, Acrylic, oil on canvas, 100x8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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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Human Agony 2018, Acrylic on canvas, 90.9x116.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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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Youth Theater 2018, Acrylic on canvas, 73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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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원희

    The Monument’s Place 2 2018, Acrylic on canvas, 130.3x162.1cm

  • Press Release

    인간의 삶, 그림의 쓸모
    '화가'에 대해 생각하며 "화가는 그림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의식과 본질을 계속 캐묻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다. 또한, "화가의 고민은 그림에서 미학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가 합일된 이상적 상태를 도출해내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이미 회화의 역할과 유효성에 대한 해묵은 질문들을 뒤적거리는 것이 될 수 있다"라고도 말했다. 이러한 말들이 '노원희'라는 작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녀가 실제 우리의 삶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림의 쓸모'에 대해 쉼 없이 질문해온 작가라는 것이다. 노원희는 '힘없는 그림'의 쓸모를 굳이 변론하지 않은 채, 피상적이지 않은 '그림의 힘'을 계속 모색해왔다.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속해서 묻는다는 것을 달리 생각해보면 그림이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원희는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비판적 현실주의 문법을 토대로, 삶 속에서 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궁리해온 작가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내용'들을 붙잡고" 그림을 그리되,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며 고통의 실재성에 다가가기 위한 기록과 재현의 방식을 고민해왔다. 한국 사회라는 버티고 서 있기조차 어려운 '얇은 땅 위'의 폭력적 현실은 작가에게 고통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노원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더불어, 폭력의 재현에 붙은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나, 눈앞의 현실을 성찰적 목격자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발화의 영점
    「무기를 들고」(2018)에서는 프라이팬을 움켜쥔 채 하늘을 향해 팔을 치켜세우며 강하게 항의하는 시위자들의 '몸짓'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의 반전 포스터 「전쟁은 이제 그만! Nie wieder Krieg!」(1924)을 떠올린 것은 강렬한 감정이 전해지는 몸짓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석판화로 제작되어 독일 거리 곳곳에 붙여졌던 이 작업은 검지와 중지를 곧게 세운 오른손을 일직선으로 뻗은 채, 왼손을 가슴에 올린 젊은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와 함께.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몸짓(gesture)'을 '감정의 물리적 증상'1)이라 하며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분석했다. 동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표정에서 드러나는 긴박감, 전쟁에 대한 분노가 담긴 신체적 반응을 빠르고 강한 필치로 그려내어 메시지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노원희의 그림 역시 시위자들의 몸짓에서 어떠한 감정을 읽어 낼 수 있다. 검고 굵은 단단한 선으로 표현된 시위자들의 모습에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또한, 붓질에서 감지되는 단호함은 평범한 인물들에게 강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한편, 프라이팬을 든 시위자 뒤편에는 어지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다. 냄비, 들통, 국자 등이 널린 부엌세간 사이로 보이는 것은 폭력의 광경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물리적 폭력,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처럼 내밀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암시하는 이미지들, 동시에 폭력 행위를 방관하는 양복 입은 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양복쟁이'들이 등을 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행위를 외면하는듯한 몸짓에서 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에 의해 나중으로 밀린, 우리 사회가 방치한 문제들이 떠오른다. 과연 선후, 경중의 기준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누구의 말에 더 귀 기울이냐는 사회적 권력이 작동할 때 발생하는 위계 속에서 결정된다. 사회적 문제들의 위계는 방관자로서 침묵을 공모하는 우리 모두에 의해 공고해진다.
    노원희는 그 공고함에 맞서기 위해 '프라이팬'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헤밍웨이 소설의 제목인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를 연상케 하는 「무기를 들고」는 무기로 은유 되는 폭력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환한다. 그렇지만 폭력에 맞서는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무기로 그녀가 선택한 것은 프라이팬이다. 사소하고 다소 하찮게 여겨지는 살림살이를 무기로 지정함으로써 그 사소함에 얽힌 사회적인 젠더 위계를 환기한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뒤편에 놓인 집안일에 사용되는 부엌 도구들은 가사 노동이 '여성이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과 더불어 하찮고 사소한 것들로 치부되는 모든 것을 은유한다. 그러나 이 사소함은 사실 가사와 가정을 가장 사적인 세계로 만드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젠더 위계에 따른 결과이다. 작가는 위계의 아래에 놓여있는 '살림살이'들을 가지고 이 세상의 구조와 물적 토대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 더는 '텅 빈 기표'가 되지 않도록, 여성의 공통된 경험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프라이팬이라는 '무기를 들어' 표명하였다.
    그녀가 그린 '프라이팬'은 실제 현실에 작동되는 물리적 무기라기보다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실제 삶을 말하겠다는 의지, 즉 '발화의 의지'로 볼 수 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Muriel Rukeyser)가 1968년 발표한 '케테 콜비츠'에 쓴 유명한 시구, "한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규정지어졌다. 그리고 여성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나중으로 미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경험과 삶에 대한 아주 실제적인 이야기는 의미화되지 않고 텅 빈 기표처럼 늘 채워지지 않은 여백으로만 남아있다.
    노원희는 「무기를 들고」에서 여성,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사회적 의제로 다뤄지기 위해서 여성들의 '말하기'가 혁명적 실천이 가능한 영점(零點, ground zero)2)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더불어 우리 현실의 삶을 바꾸는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실존적 혁명, 즉 '살림살이로부터의 혁명'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그간 작업에서 지속해서 드러났다. 노원희는 「오래된 살림살이」(2001), 「대청소를 할 때에」(2003), 「돼지국밥 30년」(2006),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2012), 「오래된 살림살이 2」(2019) 등에서 집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소한 사물들을 통해 개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든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함과 동시에 변혁은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왔다.
    「오래된 살림살이 2」에는 낡은 주방 기구들이 위태롭게 쌓여있다. 이 부엌세간들은 방치되었지만 무너지지 않으려 서로서로 지탱해주고 있는듯한 느낌마저 준다. 이 '위태로운 지탱'은 가사 노동의 고단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가사 노동이 여성의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에 얼마나 길들어져 왔으며, 한편으로 치열하게 투쟁해 왔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서사이다. 가사노동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며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여성의 가사 노동을 가족을 위한 당연한 임무로 만들며 평가 절하한다. 이러한 현실에 반기를 들며 작가는 '기록해야 할 노동'으로서의 '가사 노동'을 때 묻고 낡은 살림살이를 통해 그려낸다. 그러면서 여성의 일은 공적인 문제로 무겁게 다뤄지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어 집안의 케케묵은 냄비나 프라이팬처럼 쌓여만 갈 수밖에 없는지 묻는다.
    노원희는 근작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들을 풀어놓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미투(#Me Too) 운동'을 떠오르게 하는 「인류의 고민」(2018), 그리고 작가가 어느 정치 포럼 행사에 갔을 때 남성 정치인만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렸던 「포럼」(2017) 등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지를 돌아보며, 다층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인류의 고민」의 경우 화면에 그려진 다소 기이한 형상으로 보일 수 있는 동상은 남성 세계의 공고함과 위선을 드러낸다. 또한, 동상 주변에 그려진 가해자로 지목된 듯한 남성들이 그 사실을 괴로워함과 동시에 부인, 회피하는 듯한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단지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응답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포럼」 역시 남성 중심으로 편제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 억압, 배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중심으로만 향하는 힘을 감지하는 것은 그 중력권을 벗어났을 때 환기된다. 기득권 남성의 정치 독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보편적' 혹은 '객관적'이라 여겨왔던 것들이 남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구성된 것임을 인식할 때, 사회 구조적 모순과 억압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다. 남성 정치인들이 모여있는 광경 속에 실제보다 확대 혹은 축소된 크기로 그려진 남성들의 모습을 화면 전반에 단조롭지 않게 배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전체 구성이 '남성'이라는 단일한 구조로 읽히게끔 유도한다.
    이 그림은 단지 기득권 남성에 대항하여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 및 세력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단수의 기호를 복수의 존재로 말해질 수 있게 노력하는 태도이자 윤리이지, 여성을 하나의 힘 있는 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정치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면 전체를 '남성'이라는 하나의 단면으로 읽어내게 만드는 「포럼」의 조형적 구성은 남성의 정치 독점이 해체되었을 때 들을 수 있는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노원희는 모든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응집하는 또 다른 모양의 중심주의를 경계하며, 단순하게 뭉뚱그려진 '여성'을 현실의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의미화하고자 한다.

    무거운 여백
    노원희의 작업에서 '흰 사각형'은 반복적으로 나오는 기호이다. 전해지지 않은 말을 의미하거나 혹은 비워진 기록과 같은 역할을 하는 흰 사각형은 팻말로, 캔버스로, 스크린으로, 흰 구멍으로 변주된다.
    「기념비 자리 2」(2018)에서는 이 '흰 사각형'이 적극적으로 다뤄진다. 여러 개의 봉분 사이로 화면 중앙에 정면으로 세워진 흰 사각형 위에 거대한 굴뚝이 그려져 있다. 이 위에 그려진 것은 해고자 복직 요구 고공 농성을 했던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공장의 굴뚝이다. 그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밤샘 근무 중 참변을 당해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의 얼굴이 화면 한편에 그려져 있다. 노원희는 「사발면이 든 배낭」(2016)을 통해 서울 구의역에서 하청업체 소속 청년 노동자가 혼자 안전문을 수리하던 중 사고로 숨진 사건을 그린 바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7개월 후 발생한 고(故)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는 하청업체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듯 「기념비 자리 2」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과 같이 우리 사회가 방치한 문제들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루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의 죽음은 예외적 사고나 불운이 아닌 착취의 민낯임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무엇이 이토록 생의 무게를 다르게 만드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에도 '위험을 외주화'하는 산업 구조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국가가 외면하는 상황에서 '흰 사각형'은 아무리 외쳐도 '전해지지 않은 말'인 동시에 '응답하지 않는 벽'을 의미한다.
    「참전 이야기 1 – 밥상 깨는 남자」(2017)와 「참전 이야기 2 – 맏딸이 아파요」(2018)에서 하얀 사각형은 복합적인 역할을 한다. 이 연작은 여성에게 행해지는 가정 폭력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통 받은 남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원희는 이 그림을 통해 누군가를 단죄하는 것에 앞서 폭력의 순환구조를 반추하게 만든다. 한편, 「참전 이야기 2 – 맏딸이 아파요」 화면 뒤쪽에 그려진 커튼은 치료 심리극의 무대를 연상시킨다. 온전히 무언가를 가리지 못하는 커튼은 보호막 없이 세상에 내몰린 가정 폭력 피해자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며, 관람자를 심리적으로 동참하게 만든다. 반면, 집안에 생경하게 놓여있는 흰 사각형은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의 사연과 관람자 사이에 있는 이물질과 같이, 일종의 '레이어'로 작동하며 거리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처럼 흰 사각형은 한 사건을 여러모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장치이자, 폭력의 순환구조에 응답하지 않는 벽이며, 우연한 실수나 개인의 사소한 일로 치부되는, 약자를 향한 '이름 붙여지지 않은' 폭력을 의미한다.
    「얇은 땅 위에」(2019)에서 보이는 '흰 구멍' 역시 '침묵하는 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구멍 속을 바라보는 인물은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사람처럼 깊이 없는 구멍이자 깊이를 알 수 없는 흰 구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 인물은 마치 흰 구멍이 세계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머금은 웅덩이인 마냥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듯하다. 반대로 물웅덩이로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절망적인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이 양면적인 상태는 아마 '믿지 않는 희망'을 기다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흰 구멍은 이 땅에 작용하는 중력을 뒤집을 수 있는 여지를 지닌 '무거운 여백'이 된다.

    삶, 몸짓
    「몸」(2018~2019) 연작은 50여 점의 회화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그것이 자아내는 고독의 정서를 포착하고 있다. 한 화면에는 무채색으로 그려진 인물이 채색된 인물과 쌍을 이루되 크기와 동세가 대비되어 그려져 있다. 무채색의 인물들은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무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세밀한 묘사에 치중하지도 그렇다고 뭉툭한 느낌도 아닌, 마치 인물을 '어루만지는 듯한' 붓질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비해 작은 크기로 그려진 인물은 무엇인지 모르게 경직된 것 같다. 이 인물들은 주로 양복을 입고 있으며, 권위적으로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물론 평범한 월급쟁이의 모습으로 보이는 인물도 있으나, 노원희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진 '양복'이 갖는 은유 때문인지 몰라도 마치 위선 가득한 '권력자들의 도상' 같은 인상을 주는 것들이 눈에 띈다. 또 다른 화면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어진, 속도감 있는 선들이 배경을 꽉 채우고 있다. 이는 마치 한 개인이 삶을 살며 겪는 심리적 고통을 거센 물결 흐름과 같은 수많은 선을 통해 표현했거나 혹은 개인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힘을 가시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몸」 연작을 들여다보면 인물의 크기 및 색채의 대비, 속도감 있는 선 등이 도드라져 보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 개인의 모습과 감정을 머금은 듯한 '포즈'와 '몸짓'이다. 무채색으로 그려진 인물이 취하는 동세가 '몸짓'에 가깝다면, 그와 대비되는 작은 크기로 그려진 인물들의 자세는 '포즈'에 가깝다. '몸짓(gesture)'은 '포즈(pose)'와는 다르다. 포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몸짓이다. 포즈는 인위적으로 취하는 자세이다 보니 행위자에 의해 즉각적인 감정은 일차적으로 걸러진다. 또한, 포즈는 '보는 이'를 전제한다. 보는 이가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도록 몸의 자세를 수사적으로 꾸미는 것이 포즈다. 반면, 몸짓은 포착하기 힘든 순간의 연속을 담고 있어 감정과 더 밀접하다. 감정은 마음의 상태가 방향성을 갖고 지속해서 흘러갈 때 발생하며, 자연스럽게 행동을 수반한다. 감정이 유발되면 우리의 몸은 이에 따라 반응하여 움직인다. 한편으로는 외부의 영향이나 감각적 자극에 의한 몸 상태의 변화가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몸짓은 감정과 더 밀접한 동시에, 감정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육체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몸짓은 외부에 대한 반응이란 점에서 사회적 감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동시에 사회적 규율이 작동하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물론이거니와,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정의 변화, 즉 정서(affectus)가 몸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이 드러내는 정서, 즉 '몸짓'은 명시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고통은 비명과 같은 소리나 몸짓으로만 표현될 뿐 좀처럼 언어로 명료하게 옮겨지지 않는다. 몸짓은 언어가 기입하지 못한 언어의 바깥을 건드린다.
    노원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하는 작가이자 동시에 그가 그러한 삶이 내포한 고통과 상처에 민감한 작가"3)로 여겨진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에서」(1980)의 경우, 한낮 거리에서 야바위꾼을 둘러싸고 모여있는, 한 가정의 가장일 평범한 중년 남성들의 모습을 애틋한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냈고, 「골목 2」(1989), 「아이2」(1990)와 같은 작품들 역시 엄혹한 정치 상황이 서민 삶에 스며든 모습을 통해 시대적 정서를 담아내기도 했다. 노원희 작업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정서는 단지 서민의 일상을 포착하여 '재현'해내거나, 기록의 조형적 어법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독특한 정서적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몸짓'과 '붓질'은 그녀 작품의 정서적 깊이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그녀는 인간의 '몸짓'이 드러내는 감정을 살피며 타인의 삶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듯한 '붓질'로 개개인의 삶에 깃든 보편적인 감정에 다가간다.
    노원희가 그간 그려낸 인물의 몸짓에는 계층적 감각과 정서가 구현되어 있다. 권력의 작용이 몸에 각인된 자의 몸짓과 계급적 특권 의식을 지닌 자들의 위선이 드러나는 몸짓, 삶의 고단함이 배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몸짓 등 상투적 대상화의 시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인물의 움직임과 반응을 그림에 담아낸다. 역사화되지 않는 소시민의 정서를 몸짓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그들의 투박한 삶을 꾸밈없는 붓질로 드러내 보는 이로 하여금 주목하게 한다.

    몸, 붓질
    붓질만으로 한 개인의 삶의 구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리는 자가 어떠한 의지를 갖고 그리는 대상을 바라보는지는 붓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붓질에서 드러나는 그리는 자의 태도는 설명하기 어려운 직관적인 영역이다. 붓질은 그리기의 기술적 영역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개성과 태도가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필상학(筆相學, graphology)에서 필적을 통해 한 개인의 개성과 심리를 분석할 수 있듯이, 붓질은 그리는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리는 이의 호흡, 몸짓, 감정, 의식과 태도, 총체적인 감각이 붓질을 통해 화면 위에 전이된다. 붓질에는 '그리기의 몸짓'이 담기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담긴 몸짓은 '손-붓'을 통해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감정이란 것은 내부에서 불현듯 생성되기보다는 타인이나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므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감각이 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붓질은 그리는 이의 사회적 감각이 의식화되어 몸짓을 통해 구현된 것이기도 하다. 의식화된 정서와 등치 되는 물질적 감각을 계속 좇아가는 것이 '붓질'이며, 그러한 붓질의 흔적이 '그림'이 된다.
    노원희의 붓질은 세련된 감각으로 세공된 듯한 붓질이 아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묻어있는 붓질이다. 화려한 꾸밈도, 감정이 들끓는 표현주의적 필치도, 정교한 묘사도, 거침없는 붓질도 아닌 고통의 세세한 결을 살피는 듯한 붓질이다. 노원희의 붓질은 연대의 촉각적 감각이다. 그러나 그녀의 붓질이 작품 속 인물을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며 그 고통에 반응하는 행위라는 섣부른 해석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개인의 삶을 촘촘히 바라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지각색 모양을 충실히 담아내려는 작가의 태도이자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붓질이라는 형식적 요소에서 작가 고유의 정서를 드러내는 노원희의 그림은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간섭하는지 보는 이에게 질문한다. 상처와 고통의 구조를 파헤치기보다는 그것을 충실히 기록하려는 붓질의 감각에서 그녀만의 회화적 어법이 드러난다.
    노원희는 시대적 상황과 현실을 포착하는 리얼리즘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또한, 세월호 참사와 용산 참사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을 기록하고 고발하며 사회적 아픔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녀의 그림은 폭력적 세계에 내몰린 개개인의 삶을 포착하여 보여주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사회적 폭력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게 하며 그들을 도덕적으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관중 윤리'를 담아내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구조적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결국 그들이 서로를 견디고 달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동체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두고 "힘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그림이 무거운 현실을 바꾸는데 실질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체념 어린 말일 것이다. 노원희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어루만짐'의 정서는 역사 바깥의 존재로 머물던 평범한 사람들, 힘없는 자들, 소외되고 고립된 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데 주목하며 그들 삶의 다양한 질감을 살피는 데서 정서의 울림을 준다. 정서란 것에는 사회적 감각 체계에 반응하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윤리적 혹은 정치적 문제와 밀접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명제이다. 회화의 힘은 이 감각 체계를 지속해서 건드리고, 정서를 전이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미술이라는 틀로 풀어내고자 할 때 회화는 사안에 재빨리 반응하여 신속하고 파급력 있게 그것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회화 속에 함축된 정서는 시대를 넘나들며 공동의 무의식에 말을 걸고,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삶, 기억, 생
    나는 노원희의 작업에 대해 "거대 서사가 누락한 개개인의 상처를 '정확히' 위로하기 위해 붓을 들어 기록하고자 한다."4)라고 쓴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하니 이 말은 틀렸다. 그녀는 '정확히' 위로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위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위로하는 자의 착각과 욕망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부박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이 겪는 슬픔에 가닿고자 불가능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지만, 노원희가 지난 40여 년간 그림을 마주한 태도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연대하고자 한다면, 그 고통의 주체를 쉽사리 '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헤아릴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타인을 공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확한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찌 보면 타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여 개관(槪觀)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혹은 타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도덕적 당위를 얻고자 할 때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표면에서만 작동할 법한 '정확한 위로'는 작가의 태도를 대변하지 못한다. 노원희는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동시에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충실한 '전달자'의 위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사, 세상살이를 다양한 층위로 풀어냄으로써 한 사람의 삶을 단순히 규정짓지 않을 수 있게, 그저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만 역할을 하고자 할 뿐이다.
    시인 이성복은 어느 인터뷰에서 "타인을 위해 신발을 바깥쪽으로 돌려놓는 행위가 시"라고 말했다.
    노원희 역시 역사화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의 감정과 삶의 모양새를 그림으로 기록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도록 그려내고자 한다. 그녀가 그림으로 그려내는 기록과 재현의 윤리는 타인의 삶을 기억하는 것, 그들의 삶을 말하는 것, 그리고 투명하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생의 의미를 조명하는 것, 바로 그런 것이다. ■ 장파

    * 각주
    1) E. H. Gombrich, Ritualized Gesture and Expression in Art,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Biological Sciences, Volume 251, Issue 772, 1966. p.393.
    2)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가 쓴 책, 『혁명의 영점 Revolution at Point Zero』의 제목을 참조하였다.
    3) 성완경, 이영욱, 「상처, 연민의 시각 그리고 리얼리즘」, 『담담한 기록: 인간사, 세상살이, 그리고 사건』, 이성희 외 6인, 포럼에이, 2019. 159쪽.
    4) "노원희의 그림은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실재성에 다가가기 위한 질문을 하며 삶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지난한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기록'의 힘을 쉽사리 맹신하지 않으며 거대 서사가 누락한 개개인의 상처를 '정확히' 위로하기 위해 붓을 들어 기록하고자 한다." 장파, 앞의 책, 61쪽. 『아트인컬처』(2017년 8월호)에 실린 「노원희 展: 타자의 서사」를 재수록.

    전시제목노원희: 얇은 땅 위에 On Thin Land

    전시기간2019.11.08(금) - 2019.12.01(일)

    참여작가 노원희

    초대일시2019년 11월 08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

    연락처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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