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옥 개인전: 이해하지 못한 말들

2020.06.30 ▶ 2020.07.13

갤러리 담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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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옥

    untitled 120x120cm, oil on Canva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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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옥

    untitled 112x162cm, oil on Canvas, 2019

  • Press Release

    작가의 글
    미숙하고 불확실한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은 언제나 나를 움직인다. 명확하게 떨어지는 것들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본인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추상적인 것들이라는 믿음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온기, 그들의 미소,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움직이는 희망, 이 모든 것들은 늘 추상적이다. 결국 이미지를 그리는 방법으로 이것들을 표현한다고 했을 때, 그 동안은 완벽하게 재현을 배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재현 할 수 없는 것들과 기억을 보여주는 방법은 상상력이 가장 큰 원천이 되어 작동한다.

    특히 이번 작업들은 자연과 도시 속에서 만난 공간으로부터 조형 요소를 추출하는 방식을 취하는 평면 작업들이다. 작품들은 자기표현self-expression 이라 굳게 믿었던 미국 추상화가들처럼 최대한 직관에 의지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만큼 잠재의식이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들이다.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식적으로나 감각적으로 무정형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것은 설명적인 묘사가 아니고, 차라리 그것들은 신념이거나 사상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뢰즈 회화이론에서 형상(figure)은 모방재현이 아닌 대상을 현실적 맥락으로부터 ‘추출 또는 고립’시킨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 이라고 보았듯이. 본인도 어떤 대상의 부분이나 전체의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단순화 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을 추출하거나 고립시켜 순수하게 형상적인 부분을 극대화 한 것이다.

    본인이 다루고 있는 공간은 기억된 장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에 가깝다. 어렸을 때 보았던 풍경의 한 장면이거나 어느 날 방 안에 틀어박혀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응시했던 벽장 한 모퉁이일수도 있다. 또는 그 책장에 꼽혀있던 애정 하는 시인의 글 일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억과 시간들 있다 잊혀진 감정을 환기 시키는 장소, 그 공간은 가능성과 가정, 환상이 일어난 어떤 곳이 된다. 또한 작업들은 비장소non place 일수도 있다. 그 위에 본인의 지각perception과 인식cognition을 작동시켜 표현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실제이기 도하고 가상이기도 하다. 지각과 인식은 작품을 재조직하고 해석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장소space의 상징적인 가치라든지, 심리적인 의미들은 2차적 평면 위에서 어떻게 축적되는지, 또한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는 어떻게 변화되고 재정의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색하고자 한다.
    Keywords:
    색colors, 공간space, 상상력imagination, 추상표현abstract expression, 잠재의식subconscious 유희적 드로잉 drawing with play


    평론_ 허경
    “말에서 떨어진 푸네스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에게 현재는 거의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일들까지도 기억이 났다. … 우리는 한 번 쳐다보고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유리컵을 지각한다. 그러나 푸네스는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들의 수를 기억한다. 그는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그 구름들과, 단 한 차례 본 스페인 장정의 어떤 책에 있던 줄무늬들, 그리고 께브라초 무장 항쟁이 일어나기 전날 밤 네그로 강에서 노가 일으킨 물결들의 모양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러한 기억들은 간단한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는 근육, 체온 등에 얽힌 이미지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는 꿈과 비몽사몽간의 일들을 모두 복원시킬 수 있었다. 그는 두어 차례 하루 전체를 되돌이켜 보곤 했었다. 그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지만 그러한 복원 작업만으로도 하루 전체가 소요되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 이레네오 푸네스에게는 말의 곤두선 갈기들, 언덕 위의 가축떼들,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불길, 그리고 수많은 재들, 긴 임종의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망자의 얼굴들에 대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별들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184쪽)

    1.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별들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정규옥에 대해 우리는 바로 이러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하늘의 별을, 밤하늘의 별을, 흘러가는 저녁의 구름을, 흘러가는 새벽의 구름, 그 모양을, 빛깔을, 그때의 기분을, 그때의 마음의 상념을, 육체의 온도를, 대지의 습도를, 기억하는 것일까? 물론 이때의 정규옥은 동시에 나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꽃들을, 빗방울을,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던 것일까? 지하철역 가는 길가의 작은 꽃을, 그 위를 나는 벌을, 그것을 찍는 한 사람을, 그를 바라보는 나의 기분을,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들 중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내 마음에 찍힌 인상들, 이 무수한 이미지들, 색깔들, 소리들, 개념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나의 개념으로, 이미지로, 내가 아는 것들로 환원하여 기억한다, 떠올린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아는 것, 개념, 이미지로 축소하여 기억한다.

    2. 들뢰즈의 탁월한 지적처럼, 그리고 모든 작가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실로 비어 있는 캔버스를 채워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림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과 관습들로 가득 차 있는 캔버스를 비워나가는 일이다.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리게 될 줄 모른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처럼, 아주 모르지는 않지만, 흐릿한 대강의 이미지만 가지고 시작한 그림은 늘 나의 뇌, 차라리 나의 손이 그려내는 이미지와 내가 그리려는 이미지 사이를 조정하는 영원한 과정, 대화이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고 글을 쓰는 일이다. 인간은 현재밖에는 살 수가 없으므로 그림도 글도 모두 지금 이 현재의 느낌에 따르면서, 현재의 느낌과 상응하면서, 현재에 이루어지는 어떤 일이다. 그리고 현재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은 이 현재를 과거 자신의 개념과 이미지에 기대어 이해하려 하나, 이 현재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에 의해 우리에게 비로소 드러나는 개념의 결과물이므로, 현재를 개념으로 또는 이미지로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이른바 합리성에 입각한 개념적 이해는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현재는 오직 느낌과 지각작용, 막연한 이미지에 의해 인도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무엇인지 명료한 개념을 갖고 시작한다 해도,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항상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비극으로 볼 수도 한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즐거움으로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어떤 그림이 될 줄 모른다는 이 사실, 아주 모르지는 않아도, 결국 다 그려놓고 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 도리지 시작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이 사실. 우리는 하나의 예술작품을 필연의 산물로도 우연의 산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하나의 예술작품은 신과 작가의 합작품이고, 작가가 덜 개입할수록 좋아진다(그런데 신과 작가 중 어떤 것이 필연일까?). 이 세상의 모든 일처럼, 나의 의도는 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이 통제할 수 없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통제하려는 (절망적인 또는 즐거운) 시도가 작가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불필요한 또는 불가피한) 시도의 총체가 우리가 학교에서 ‘미술, 예술이란 이런저런 것’이라고 배운 모든 개념과 실천이다.

    3.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뒤샹이라는 젊은이가 동시대 예술과 관련하여 설정한 새로운 게임 규칙은 이 ‘미술/개념’의 쌍을 이른바 ‘미술’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사이의 관계를 내가 다시 설정하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술이다. 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은 ‘시각적 이미지/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모든 것’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실천 자체를 예술로 규정한다. 뒤샹의 천재성은 예술에 대한 이러한 자신의 개념규정에 대한 후대의 새로운 규정들 전부를 다시금 예술의 영역 안에 넣도록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뒤샹이 설정한 동시대 예술의 규칙은 ‘이미지/텍스트’ 사이의 관계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림이라는 이미지와 그 그림 또는 이미지가 놓여 있고 생산된 컨텍스트, 곧 이 경우 텍스트와 개념은 분리되지 않는 불가분의 요소들이다(이런 면에서는 1950~1960년대의 개념미술을 뒤샹의 혁명이 일정부분 완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크게 보아, 이른바 동시대 미술, 현대(contemporary) 미술은 여전히 뒤샹이 20세기 초 이미지/개념 사이에 설정한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펼치는 자장(磁場)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뒤샹의 이러한 새로운 설정이 가져온 다양한 결과들 중 하나는 이미지에 대한 개념의 (암묵적이나, 실질적인) 우위이다. 이제 예술가는 스스로가 훌륭한 글을 쓰거나, 또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비평가의 보증을 필요로 한다(물론 이전에도 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뒤샹 이후 이는 예술의 필수적 부분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중과 비평가들만이 아니라, 예술가 스스로의 작업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는 (이러한 변화를 자기 문화 내부의 역사적 변형으로 수용하는 서양의 예술가들보다는) 비서양의 예술가들에게서 더욱 그러하다. ‘현대미술’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20세기 초 프랑스의 뒤샹이라는 젊은이가 고안한 ‘서양현대미술’이라는 고유명사였던 것이다. 뒤샹의 혁명은 ‘이미지/언어’의 이분법을 파괴하는 동시에, (뒤샹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또는 의도를 따라) 이미지에 대한 언어의 암묵적 우위를 상정한다.

    4. 정규옥의 그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규옥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또는 의도를 따라) 개념 또는 관념이 지배하는 현대예술의 근본적 경향을 거스르는 소중한 작업이다. 현대예술, 적어도 현대예술의 지배적 동향은 이미지보다 개념이, 동일한 논리의 연장으로서, 회화보다 비디오 또는 설치 작업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이는 물론 현대예술이 이미지나 회화를 등한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지와 개념은 분리불가능하다). 그러나 정규옥의 작업은 미술이 미술로 존재하는 한 결코 잃을 수 없는 이미지와 회화의 원초적 우위를 간직한다. 그의 작품은 개념이 아니라, 이미지로 넘쳐난다.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눈으로 말을 건넨다. 정규옥 작품의 대부분이 제목이 없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 이미지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러니까 개념적 설명을 더하는 것은 많은 경우 이 이미지들이 스스로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들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이 없었으면, 작품이 훨씬 더 명료하게 전달되었을 텐데….” 자신이 방금 연주한 소나타를 설명해달라는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곡을 한 번 더 연주했다는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또는 말라르메가 말했던 것처럼, 사물의 이름을 말해버리는 것은 시가 주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이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정규옥의 이미지들에 설명을 더 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실은 군더더기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는 때로 나의 전반적인 (말할 수 없는, 실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느낌이 아니라, 일련의 (좁은, 특정한) 논리와 개념에 따라 이해되면서 작품 향유의 지평을 좁히지 않는가(가령, 지금 나의 이 글 역시 군더더기이고, 작품을 특정방향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하면서 작품의 참다운 향유를 방해하는 측면은 없는가)? 그러나 이미지와 개념은 (특정 목적을 위한 ‘방편적’ 구분이라면 몰라도) 실제로는 구분될 수 없는 두 이름들이다. 더욱이 ‘참다운’ 향유란 것이 없다(모든 이른바 참다운 향유란 그 말을 한 ‘당사자’가 참다운 향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특정 관점, 권력 담론일 뿐이다).

    5. 정규옥의 그림들을 나는 추상(抽象, abstract)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개라는 개념이 짖지 않는 것처럼, 무한이라는 개념이 실은 유한한 개념인 것처럼, 추상이라는 개념은 추상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구상적 개념이다. 추상이라는 말에 (어떤 언어, 개념 규정에 의해서도 묶일 수 없는) 정규옥의 이미지들을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 모든 비평은, 실은 인간의 모든 언어와 기억과 이해는, 자신의 기준보다 크면 잘라내고 작으면 잘라내는 프로스크루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마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이, 그리고 뒤샹이 그랬던 것처럼)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림을 보고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또는, 그런 일은 가능한 일일까? 가령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 무용을 보고 글을 쓴다는 것, 한 편의 글을 읽고 작곡을 한다는 것, 하루를 살고 글을 쓴다는 것은 가능할 일일까?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명의 작가처럼, 마음속의 이미지들을 글로 또는 그림으로 또는 음악으로 춤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규옥의 그림들을 보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6. 정규옥의 그림들이 작가의 그림에 대한 모든 개념적 규정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규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물론 인식론적 반성이 결여된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규정에 대한 거부 자체가 이미 ‘하나의’ 규정이기 때문이다(‘신이 죽은’ 현대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직 이런저런 규정들로부터 또 다른 이런저런 규정들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이것이 현대철학자들인 들뢰즈와 푸코가 (혁명이 아닌) 배치(agencement, configuration)의 차이화(différent/ciation)와 변형(transfromation)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정규옥은 ‘이런저런 방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특정 개념, 특정 고정관점에 의한 관점의 고착화를 거부할 뿐 개념도 규정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규옥 작품의 소중한 부분이다. 정규옥은 이미지와 아마도 도형과, 색깔과 색채를 이리저리 바꾸어 배치하고 배열한다. 자기 작품의 어느 배치가 어느 배치보다 낫고 못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작품을 그리고 있는 작가라 불리는 이 사람의 결단일 뿐이다(이 결단의 최종 결정요소는 개념이 아니므로, 결단들 사이에는 정답이 없다). 정규옥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이려 하지 않는다. 정규옥은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규옥의 모든 이미지들은 이미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를 이미지들의 축제라 불러도 좋고, 색채들의 시간이라 불러도 좋다.

    7. 그러나 이름은 이름일 뿐, 그 실체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관념이, 개념이 현실을 생산하지 않는가? 이미지와 그림은, 낮과 밤은, 나와 나의 적은 동시에 탄생하는 쌍둥이들이 아닌가? 그림과 이미지는 둘인가, 같은가, 다른가? 이미지와 개념은 둘인가, 다른가? 구분되는가, 그러니까 이들은 둘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인가? 개념이 없다면 인식이, 이해가, 기억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뒤샹은 옳았다(옳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지와 개념은 둘이 아니다. 마그리트와 푸코가 잘 보여주듯, 그림과 이미지는 처음부터 이 게임의 분리 불가능한 두 요소들이다(이들 중 한 쪽만을 중시하면서 나머지를 폄하하는 이들은 바보들이다). 뒤샹은 현대미술의 역사를 영원히 불가역적으로 바꾸어놓았다(뒤샹이 없었어도 누군가가 나타나서 같은 말, 또는 적어도 거의 같은 말을 하고 현대미술은 크게 보아 다른 어떤 모습이 아닌 바로 오늘의 이 모습이 되었을까? 철학과 과학의 차이가 이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술은 문학과 더 비슷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카프카가 없었어도 누군가가 똑 같은, 또는 거의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냈을 것이란 말은 농담이다).

    8. 장미의 이름, “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있을 뿐.”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이름일 뿐일까? 장미를 백합이라 부르든 히아신스라 부르든, 장미는 늘 같은 그 장미일까? 예전의 그 장미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저 이름일 뿐, 나에게는 그저 그 이름만이 남아 있을 뿐일까? 정규옥의 작품들은 그림과 제목 또는 비평 사이의 관계 자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그림들이다. 어린 시절 바닷가 밤하늘에서 보았던 그 별들을 떠올리는 우리의 기억, 그 아름다움을, 그 서늘함을, 그 말할 수 없는 기분을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기억하고 또 이해하는 것일까? 정규옥은 그의 작품을 통해 그 자신이, 내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 말로 표현되지 않는, 모든 것을 그려내서는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정규옥은 나와 당신의 어린 시절 기억들, 그 저녁 하늘, 그 바닷가, 그 별들을, 그 숲의 온도를,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을, 말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이미지들, 생각들, 마음속 풍경을 그려낸다. 그림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방법이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가령 상념과 이미지들을 펼쳐 보이는 방법, 마법과 같은 방법이자, 말로 구성된 모든 의미체계로부터 (마침내) 풀려난 이미지와 색깔 사이의 차이와 배치의 놀이이며, 색채의 시간, 이미지의 우주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별들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전시제목정규옥 개인전: 이해하지 못한 말들

    전시기간2020.06.30(화) - 2020.07.13(월)

    참여작가 정규옥

    관람시간12:00pm - 06:00pm / 일요일_12:00pm - 05: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

    연락처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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