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호展

2021.08.18 ▶ 2021.08.30

갤러리 담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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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호

    무제 Untitled oil on canvas, 133 x 194 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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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호

    백야 (나스첸카) White night oil on canvas, 133 x 194 cm, 2021

  • Press Release

    들끓는 파토스, 때로 정적이고 더러 격렬한

    언제나 무형의 것에 관심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은 항상 내게 큰 영감을 준다. 그것들은 내 눈앞에 던져진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다...본다는 경험을 만드는 것. (작가 노트)

    좋은 그림이 주는 힘이란 감각의 밸브를 여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박준호의 그림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결정적인 것은 색감이고 질감이다. 더러 미색과 연두색 그리고 청색과 같은 다른 계조의 색채가 없지 않지만, 주로 붉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붉은 색조가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검붉은 색조를 작가의 지배적인 색채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계조라고 했고, 색조라고 했다. 작가의 색채감정은 청색 혹은 녹색 혹은 적색과 같이 어떤 색채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미에 가까운, 어떤 색채의 기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떤 색채의 다층적인 층위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 가깝다.
    이 계조며 색조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과정과 방법이 궁금하다. 작가는 묽게 갠 물감을 캔버스 한쪽에 부은 후 캔버스를 기울여 물감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게 했다고 한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봐가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한 차례 이상의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의 유사한 과정과 방법이 적용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화면에는 같은 색조가 서로 스미면서 포개지는 다층적인 색 구조가 형성되었다. 물감이 퍼져나가면서 다만 한 차례 지나가고 만 자리가 밝게 드러나는가 하면, 물감이 고여 층을 이룬 부분이 짙은 검붉은색으로 고착되면서 화면 내부에 비정형의 공간(유사 공간? 추상적 공간? 내면적 공간?)을 연상시키는 공간감이며 내진감이 조성되었다.
    마치 물을 머금은 종이 위로 먹이 번져나가듯, 수묵화에서의 선염법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색채감정으로 치자면 흡사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나 볼 법한 투명한 붉은 색이, 그 속에 빛의 기미를 품고 있는, 스스로 발광하는 붉은색이 인상적이고 광학적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적이다(비가시적인 정신적 영역은 항상 내게 큰 영감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붉은색 자체의 상징적 의미로 치자면 마치 내면에 응축된(억압된?) 격정을 보는 듯, 정중동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내적 에너지를 봉합하고 있는 듯 파토스적이다. 니체라면 내적 질서 그러므로 에토스와는 비교되는,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면은 물감이 마르면서 생긴 자잘한 기포와 균열이 미세한 자국을 만들고,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맺힌 자국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마치 색깔 속에서 빛이 배어나는 듯 은근한 발광이, 마치 그 속에 불덩어리를 품고 있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검붉은 연기와 화산재 주변으로 폭죽이라도 터지듯 불똥을 흩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태초에 우주가 창조되던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는 것도 같고, 정적이고 격정적인 파토스의 분출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위에 드리워진 드로잉이, 흩뿌려진 물감 알갱이가, 그리고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트라우마의 표상 같다. 그리고 더러 영문자와 숫자들이 그림에 갇힌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색채감정이다. 여기서 색채와 색채감정은 다르다. 색채가 스스로는 가치 중립적인 색채 자체를 지시한다면, 색채감정은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의미하고, 가능한 무언가의 표상 형식을 의미한다. 비록 외관상 작가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여기에 꼭 맞는 전언을 예비하고 있다. 회화는 표현이며, 색채가 다름 아닌 표현이라고 했다. 표현이란 내적인 무엇을 표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다른 색도 있지만, 특히 검붉은 색채감정을 통해 내적 파토스(다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적인 영역)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적 파토스든 정신적인 영역이든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실체를 밝히기 전에 작가의 그림이, 특히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검붉은 색채감정이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싶다. 그 전제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의 그림이 그 속에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의미를 파고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재현적인 그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탈재현적인 그림인가. 다시, 그렇다면 여기서 탈재현적이란 무슨 의미인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재현을 제도의 속성이라고 본다. 제도에 관한 한 재현되지 않는 것은 없고, 의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재현화의 과정 그러므로 의미화의 과정은 제도를 존속시키는 전제조건이 되고, 그러므로 제도가 존재를 억압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무정형(어쩌면 앵포르멜의 비정형과도 통하는, 그리고 작가의 경우에는 무형)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무정형을 실천하는 것으로 예술의 당위성을 요청한다. 규정할 수 없는 것, 재현되지 않는 것,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제도의 재현화의 기획에 반하는 실천 논리다.
    그러므로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이 지향하는 실천 논리와도 그 경우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 모두와 함께, 그리고 어쩌면 이보다는 회화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회적인 사건, 그러므로 재현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본, 그리고 이로부터 숭고의 감정을 도출해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입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검붉은 색채감정의 형식은 무정형이었고, 그 의미론적 실체는 숭고의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무형의 것에, 비가시적인 것에, 정신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것들은 보고, 듣고, 만져지는 감각적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폴 클레는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작가의 입장이 그럴 것이다. 여기서 무형의 것, 비가시적인 것, 정신적인 것은 작가가 보기에 진정한 현실이 된다. 어쩌면 감각적 현실을 밀어 올리는 현실, 그러므로 감각적 현실의 원형적 현실일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면 감각의 밸브를 여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의 밸브는 어떻게 열리는가.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고, 새롭게 만져지는 감각경험(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본다는 경험을 만드는 것)을 통해 감각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술가는 감각의 개발자들이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춤추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측백나무도 없었고, 코로가 아니라면 햇빛과 나뭇잎이 서로 희롱하는 감각적 유희도 없었을 것이다. 뭉크가 없었다면 공포스러운 노을도 없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니라면 말하는 그림자 그러므로 의미하는 그림자도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시적 회화(visual poetry)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이런 감각의 개발자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 닫힌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시는 단어와 단어의 열린 관계와 관련이 깊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색감과 질감의 관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색감과 질감의 예기치 못한 만남에 연유한 열린 의미(움베르토 에코), 매번 일회적인 그래서 재현 불가능한 사건(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면에서 들끓는 잔혹한 파토스(아르토),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의 또 다른 타자(자기_타자)와 대면하게 만든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업에 대하여
    우리는 매 순간 ‘상징’과 함께 숨 쉬며 그것으로부터 인식의 승인을 받는다.
    언제나 무형의 것에 관심이 많았기에 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역은 항상 큰 영감이 되었다. 그것들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무엇보다 현실적이며, 그렇기에 그것들을 관찰하며 그림으로 탄생시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재-집중이다. 이것은 삶, 혹은 인류에 대한 의지 이자 탐구이며, 호기심이다. 그러한 형태들이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길 원하며, 나의 그림이 개인에게 하루의 선택에 있어서 허용을 주는 상징이 되길 바란다. ‘본다’라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파랑’이 없던 것처럼, 아직 우리에겐 모르기에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보고, 경험하며 인지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삶에 직접적이고 영향을 준다. 그렇게 새로운 인식은 우리 삶 깊이 들어와 어떠한 생각,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인식의 기반이 되곤 한다.

    미에 대한 기준은 시대의 정신과 함께 변해왔으며 그것은 미술사를 통해 관찰할 수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고대 벽화부터 근현대미술에 이루기까지.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탑이다. 그 방대한 자료는 나의 탐구에 있어서 모두 배제할 수 없는 역사이자 영감이다. 티치아노, 피카소, 프란시스 베이컨, 루이즈 부르주아, 싸이 퉘블리, 김환기 등 훌륭한 예술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그 작품들이 담아낸 그 당시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유산을 빌려 만들어가는 나만의 회화적 언어로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미의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예술(art)은 인공물, 가공(artifact)이다. 나는 그것으로 보다 날것으로, 즉각적으로 보는 이에게 센세이션을 주고 싶다.

    색, 구조, 형태가 줄수 있는 시각적인 의미에 재집중하며 특정한 순간과,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 기억들이 연결되며 자전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이 된다.

    음악은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클래식부터 팝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저를 강렬하게 자극합니다. 존 케이지의 실험적인 작품은 무한한 회화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나아가 크리스 브라운, 지드래곤, BTS등 그들의 음악은 개개인의 주제를 현재 정서로 재해석해서 만들어내는 사운드라는 면에서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이러한 음악들을 저만의 visual poetry(시적 회화)로 만들어 그들과 같은 자극, 충격을 주길 바랍니다. 좋은 그림이 주는 힘이란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대로 감각의 밸브를 여는 것 이겠지요. 무제(bloom)은 존케이지의 불확실성 속 완전함, 그 속의서의 질서에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또한 무제(연두, 보내드린 작품)는 BTS의 Dynamite라는 곡의 산뜻함을 실어 보았습니다. 무제(빨강)은 크리스 브라운의 Indigo 라는 인간의 욕망, 사랑, 그리고 갈망에 대해 다룬 앨범을 기반으로 한 작업 입니다.

    소설 또한 저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중에는-

    백야 (나스첸카) - ‘그러나 나스첸카! 당신은 내가 모욕당한 것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원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당신의 하늘이 언제나 높고 푸르기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ㅡ 도스토프예스키 백야 중. 사랑하는 여인을 가까이 할 수 없어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녀에게 하는 독백 입니다. 과연 그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_존버거
    영국의 미술 평론가이자 소설가 입니다. 저에게 큰 영향을 주신 분이며 그분의 책을 읽고 한 작품 입니다.
    -자두-
    “… 그 아이는 여덟 살에서 열 살 반 사이, 사춘기에 짓눌리기 전에 독립심을 키워 가는 나이다. 아이가 손에 자두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 한입 베어 물면, 과일의 혀는 쏜살같이 목 뒤로 넘어가고 아이는 그것의 약속을 삼킨다. 무엇의 약속일까? 아직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이제 곧 아이가 이름을 붙이게 될 뭔가에 대한 약속. 아이가 느끼는 달콤함은 더 이상 설탕의 맛이 아니고, 계속 자라나는 가지, 끝이 없는 것만 같은 그것의 맛이다. 그것은 아이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어떤 몸에 달려있다. 그 몸에는 세 개의 팔다리가 더 있고 목과 발목이 있으며, 소년의 몸과 비슷하다. 단지 뒤집혀 있을 뿐. 가지의 구석구석으로 수액이 끊임없이 흐른다. 아이는 잇새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소녀나무라고 부르는, 이름 없는 하얀 나무의 수액. 자두 백 개 중에 하나만이라도 이런 느낌을 되살려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작가는 글 중 하나의 열매를 처음 베어 먹으면 하나의 약속이 된다는 말을 합니다. 제가 처음 먹은 열매는 어떤 느낌인지, 혹은 제가 앞으로 바라고 있는 열매의 약속은 어떠할지.

    이것은 제가 얘기하는 인식과도 같은 것 입니다. 제 작품들 또한 하나의 열매가 되어 보는 이에게 약속을 하길 바랍니다.

    무제(remedy)는 폭설이 내리던 날 산 중턱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 그린 그림이며, 저와 함께 있던 연인은 산길 언덕에서 본 하얀 세상을 통해 치유를 받는 경험 이였습니다. 두 몸뚱아리와 두 개의 태양 입니다. 그렇게 밝은 세상의 태양은 마치 두개였던 듯 합니다.

    숫자 드로잉은 0) <빈델로프의 비너스> 시작이며 모두의 어머니 입니다.
    1) 고립. 출발의 의미. 2)조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3)처음- 중간- 끝,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가 성장을 의미 합니다.

    이렇듯 문학, 예술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 합니다. 저의 그림도 그렇게 필요로 하는 이미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그림이 많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박준호

    전시제목박준호展

    전시기간2021.08.18(수) - 2021.08.30(월)

    참여작가 박준호

    관람시간12:00pm - 06:00pm / 일요일_12:00pm - 05:00pm
    마지막 날은 오후 4시까지 입니다.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

    연락처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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