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미술

한국미술사고구려의 미술

호방한 고대문화의 보고(寶庫)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고구려는 호방하고 당당한 기상을 미술문화 안에서 꽃피웠다.
특히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산재한 고분(古墳)은 고구려 미술인 동시에 고대 동북아시아 고대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91기의 벽화 고분은 고구려 문화의 국제적인 보편성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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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릉비

    지린 성 지안, 응회암(凝灰岩), 높이 6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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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릉 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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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4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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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린 성 지안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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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남 남포시의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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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영총 천장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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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걸이(왼쪽)

    서울 능동 발굴, 길이 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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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지린성 지안 출토로 전함, 길이 34.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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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무덤형태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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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3호분 <주인공 초상>

    357년, 전실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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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3호분 <주인공 부인상>

    357년, 전실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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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3호분 <행렬도>

    357년, 회랑 동벽과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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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흥리고분 <견우와 직녀>

    408년, 전실 북벽과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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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총 <수렵도>

    5세기경, 주실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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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파리 1호분 <소나무>

    6세기 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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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현무도>

    6세기, 널방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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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현무도>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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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주작도>

    6세기, 널방 남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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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청룡도>

    6세기, 널방 동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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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대묘 <백호도>

    6세기, 널방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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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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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수막새

    지름 대략 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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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다카마쓰쓰카 <여인군상>

    7세기말~8세기 초, 일본 아스카

  • Description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고구려는 호방하고 당당한 기상을 미술문화 안에서 꽃피웠다. 특히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산재한 고분(古墳)은 고구려 미술인 동시에 고대 동북아시아 고대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91기의 벽화 고분은 고구려 문화의 국제적인 보편성을 입증하고 있다. 

     


    고구려의 패권과 지배자상

    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년경~668년)는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했으나, 고구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현도군을 압박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고, 이러한 지배자상의 구현은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이후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으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호화로운 귀족문화와 능묘건축

    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들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고분 벽화의 세계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여 형성된 무덤 내부 장식예술이다. 현재까지 발견 조사된 벽화고분은 100여기에 이르는데,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런[桓仁], 지안[集安]과 평양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벽화는 주로 흘무지돌방무덤에서 발견되지만 돌무지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룡(靑龍)·백호(白虎) 등이 그려진 강서대묘(大墓)의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수산리 고분·안악3호분의 고분벽화가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분 벽화의 주제

    고분벽화의 주제는 각각의 주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립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서로 혼합되기도 하는데, 크게 생활풍속․장식무늬․사신(四神)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분구조와 주제 등을 고려해 그 제작시기를 가늠하면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3세기 말~5세기 초); 여러방무덤[多室墓]에 생활풍속이 즐겨 그려진다. 주로 묻힌 자의 살이 있을 때의 생활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과 풍요로운 생활 모습을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된 주제이다. 때문에 무덤 내부를 생전의 주택처럼 꾸미고, 그 안에 주인 부부가 시중받는 장면, 대행렬에 둘러싸여 출행하는 장면, 사냥하는 장면, 연회를 베풀고 가무와 놀이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기법은 벽면에 회(灰)를 바르고 회가 마르기 전에 밑그림을 그린 후 채색하는 습지벽화법(濕地壁畵法, Fresco)을 사용했다. 

     

    ② 제2기(5세기 중엽~6세기 초); 두방무덤[二室墓]이나 외방무덤[單室墓]에 생활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과 장식무늬 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진다. 장식무늬로는 불교의 정토(淨土)를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즐겨 선택되며, 넝쿨무늬, 동심원무늬, ‘王’자 무늬, 구름무늬 등이 혼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벽화는 습지벽화법에, 회가 마른 다음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乾地壁畵法)이 부분적으로 더해지기도 했다. 

     

    ③ 제3기(6세기 중엽~7세기 중엽); 외방무덤에 사신이 즐겨 그려진다. 이 시기 고분벽화의 사신은 널방의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실상의 유일한 제재로, 단순히 하늘 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方位神)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세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이다. 특이한 것은 평양의 사신 그림이 배경 표현을 억제하면서 사신만을 부각한 반면, 지안 지역의 사신 그림은 복잡하고 화려한 배경 위에 표현되는 경향이 있어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시기 사신도 중 가장 힘차고 생동감을 주며 세련된 것은 ‘강서대묘’의 것을 꼽는다.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불교 미술의 전래

    고구려의 불교 미술은 중국의 북위(北魏)풍의 영향으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의 미술품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다. 다만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소형의 이불(泥佛)과 연가(延嘉) 7년이 새겨진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당대(當代)의 양식을 잘 나타낸 불상조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 최고(最古)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이 금동 불상은 문자명왕(文咨明王, 491~519)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2년 충청북도 유성군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기와를 제작․사용했는데, 선이 굵고 날카로우며 크게 도드라진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구려 문화의 활달성 및 강건성과 통하는 것이다. 4세기 후반 불교가 전래되면서 연꽃무늬 수막새가 출현해 유행했으며, 평양 천도 이후에는 연꽃무늬 외에 넝쿨무늬, 짐승얼굴무늬 기와[怪獸面文], 기하학 무늬 등 다양한 문양의 막새기와가 유행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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