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회화예술

한국미술사조선초기 회화예술

유교적 사색의 구현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간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과 미감을 결정짓는 중요한 가치체계였다.
조선의 건국을 이끈 사대부들은 유교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예술과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세종연간에는 중국 북송대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서화(書畵) 예술의 초석이 잡혔고, 안평대군의 후원 속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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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효자편

    향덕의 효행-앞면 그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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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효자편>, 뒷면 글씨부분

    ‘향덕이 넓적다리를 베다’는 백제인이었던 향덕(向德)이 굶주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는 장면을 앞장에 그림으로 그리고, 뒷장에 그 내용을 한문으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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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효자편>, 문충의 효행

    ‘문충이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다’는 30리 떨어진 곳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고려인 문충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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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 <몽유도원도>

    1447, 비단에 담채, 38.6×106.2cm, 일본 천리대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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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유도원도> 2/4부분의 기암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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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유도원도> 4/4부분의 도원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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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대군, <몽유도원도> 제발부분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며 둘째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서예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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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희, <조춘도(早春圖)>

    11세기, 비단에 담채, 158.3×108.1cm,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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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傳 안견),《소상팔경도》중 <연사모종>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80.4×47.9cm, 일본 대화문화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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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소상팔경도》중 <산시청람>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96.0×42.0cm, 호암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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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傳 안견),《소상팔경도》중 <어촌석조>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31.1×3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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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傳 안견),《소상팔경도》중 <강천모설>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31.1×3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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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傳 안견), 《사시팔경도》중 <초여름[早夏圖]>

    15세기 중반, 비단에 수묵, 35.8×2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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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문, <악양루도(岳陽樓圖)>, 15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102.3×44.7cm, 일본 개인소장

    이수문은 1424년 조선에 온 일본 승려를 따라 일본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좌측 하단에 힘을 준 강한 대각선 구도는 조선 초기 산수화에 근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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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안, <고사관수도>,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4×15.7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 좌측상단에 ‘인재(仁齋)’라는 낙관(강희안의 호)이 찍혀있다. 조선 초기에는 거의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이름 모를 소장자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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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맹, <독조도>, 15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132×86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고깃배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고사를 그린 작품으로, 강희안의 부드러운 필선에 비해 날카롭고 거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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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팽손, <산수도>, 16세기 전반, 종이에 담채, 88.2×46.5cm, 국립중앙박물관

    조광조의 친구였던 양팽손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사람파의 거두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사건)에 연루돼 파면당한 후 낙향한 인물이다. 이후 고향 시냇가에 학포당(學圃堂)이란 정자를 짓고 자신의 은거생활을 담은 산수도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자신의 거처를 찾은 지인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광경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솟은 언덕, 곧게 뻗은 소나무, 안개에 가려진 먼 산의 표현 등이 안견의 작품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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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0×44.9cm, 호암미술관

    늦은 봄날 마당에서 노니는 천진하고 앙증맞은 동물을 그린 작품으로, 이암은 조선초기 문인들이 선호하지 않던 동물화를 그린 사대부 화가이다. 그 때문에 한때 일본인 화가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화면 하단 바위표현은 조선초기 회화의 특징 중 하나인 단선점준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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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암, <화조묘구>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7.0×44cm, 소장처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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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 《초충도십곡병》 중 <수박과 들쥐>, 16세기, 종이에 채색, 34×28.3cm, 국립중앙박물관

    신사임당은 7세 때부터 안견을 그림을 따라그렸다고 전해질 만큼 그림공부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사임당의 작품 중 대표작인 《초충도십곡병》에서 보이는 관찰대상을 통해 당시 외출이 여의치 않았던 아낙네들의 삶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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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하관계회도>, 1541, 비단에 수묵, 97×59cm, 개인소장

    1541년 병조(兵曹)에 근무하던 낭관(郎官)들의 계회를 기념해 제작된 <하관계회도>는 실제모임장소를 그렸다기보다, 당시 유행하던 안견 화풍의 산수를 가미해 당시 모임을 조선초기의 미의식으로 바꿔그렸다는 특징이 있다. 모임에 늦어 바쁘게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의 모습이 해학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 Description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간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세계관과 미감을 결정짓는 중요한 가치체계였다. 조선의 건국을 이끈 사대부들은 유교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예술과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세종연간에는 중국 북송대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서화(書畵) 예술의 초석이 잡혔고, 안평대군의 후원 속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탄생되었다.

     


    조선의 개국과 유교 윤리

    조선은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홍건적(紅巾賊) ·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배이념으로서 자리를 굳힌 유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 지방에는 향교(鄕校)와 사립(私立)의 서원(書院)이 설치되어 인재양성과 제사가 거기서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강화로 인해 고려시대 불교문화가 이룩했던 많은 문화유산들을 없애거나 거부함으로써 이전 시대의 미술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문화․예술면에서 큰 발달이 있었던 세종대에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중요성이 고취되고 집현전(集賢殿)이 건립되는 등 유교적 예술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은 중국 유학이 우주론적 관심을 앞세운 데 비해, 인간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사대부 중심의 문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조선초기 미술활동의 특징

    조선초기는 유교적 통치체계가 정비되고 서서히 그 영향력이 강화된 시기로, 조선 500년의 역사와 문화의 방향이 형성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던 관청인 ‘도화원(圖畵院, 훗날 그리는 일의 격을 낮추어 도화서로 개칭)’이 설치돼 많은 화원(畵員)들이 배출되었고, 이로써 조선미술을 이끌 인적 토양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각종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동원됐는데, 때에 따라 사대부의 요구에 맞는 <계회도(契會圖)>, <초상화> 등을 그리거나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담당하였다. 

     

    이러한 화원들의 선발과 승진에는 사대부들의 요구가 고스란히 반영되었으므로, 화원들은 자연스럽게 유교적 미의식과 예술관이 드러난 작품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초기의 미술작품은 고려와 달리, 유교생활에 바탕을 두고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조화시켜 자연미를 살리면서 고상하고 기품이 있었다. 

     

    특히 각 방면에서 두드러진 성과가 있었던 세종대왕 재위기간(1397~1450)에는 중국 북송예술의 영향을 받아 회화와 글씨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 중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린 안견(安堅)과 이 그림을 주문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당대 회화와 글씨의 양대 산맥으로 조선 초기 문화의 초석을 닦았다. 한편, 조선으로 전승된 중국 서화와 명나라의 문화교류 역시 이 시기 문화형성에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 경향

    -<삼강행실도>가 전하는 유교윤리

    조선시대 성군(聖君)으로 이름을 높인 세종대왕 재위기간에는 충효를 근간으로 한 유교윤리를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1431년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부친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접한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널리 교육시킬 목적으로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효행록(孝行錄)』을 간행하게 하였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적에서 효자, 충신, 열녀 각 110명을 뽑아 330명의 일화를 모은 저서를 편찬했다. 책의 앞부분에는 글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뒷부분에는 그 일화를 기록하고 시(詩)와 찬(贊; 찬양하는 글)을 붙여 총330장으로 구성된 《삼강행실도》를 1433년에 완성한 것이다.

     

    -이상향에 동경의 꿈, <몽유도원도>

    1447년 음력 4월 20일,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온통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을 방문한다. 길을 읽은 그들에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북쪽으로 돌아 골짜기로 가면 도원(桃園)이 나올 것이라고 전한다. 그 말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니 높게 치솟은 산이 둘러친 평화로운 마을을 자욱한 구름과 안개가 복숭아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박팽년과 도원을 노닐던 안평대군은 문득 잠에서 깼는데, 바로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니 3일 만에 완성하였다.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는 조선의 화가 안견(安堅)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그린 산수화이다. 세종(1418-1450)과 문종(1450-1452) 때의 화가인 안견은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 그림에는 안견의 독창성이 잘 나타나 있다. 1447년에 그려졌고, 비단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세로 38.7cm, 가로 106.5cm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도연명의 《도화원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통의 두루마리 그림과는 다르게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성을 가지고 있는데 왼편 하단부에는 현실세계, 나머지는 꿈속 세계를 표현하였다. 복숭아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절벽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대조적인 분위기이지만 통일감이 있고 조화롭게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화풍인 이곽파 화풍을 이용해 그렸는데, 부감법을 이용해 그림 공간처리나 높이에 따른 대조, 운두준법, 세형침수, 조광효과의 표현 등에서 이곽파 화풍의 영향이 잘 나타난다. 그림 양쪽으로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1수가 적혀있고,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의 당대 20여명의 찬문이 있는데 모두 친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고, 한국 산수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몽유도원도를 소장했던 일본소장가 중 도진구징(島津久徵)의 생애나 활동을 미루어 1900년 전 일본에 있었다는 사실이 추정되고 있다. 2009년 9월 29일, 몽유도원도는 2009년 11월 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여민해락(與民 偕樂)'을 통해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 이후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안견(安堅, ?~?)

    화원 출신으로 세종 때 도화원(圖畵院) 종6품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인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하였다. 조선시대 화원은 최고 종6품까지 올라가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이것을 깬 최초의 인물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1447년(세종29)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를 그리고 이듬해〈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를 그렸다.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郭熙)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 많은 명작을 남겼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사군자·의장도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산수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며,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작품; 비해당25세진,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팔준도(八駿圖),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 묵죽도(墨竹圖), 적벽도(赤壁圖)

     

    -곽희 화풍의 영향

    안견이 곽희 화풍의 영향을 받은 이유는 그를 후원해준 안평대군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222점이나 되는 중국 역대서화를 소유했는데, 특히 송과 원의 작품이 많았고 곁에서 그를 보필했던 안견은 북송대의 화원이었던 곽희(郭熙, 1020?~1100)의 작품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곽희의 화풍은 중국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빛과 습도에 따른 거대한 산수 변화를 중시하는 북방계 산수화의 전형을 완성시켰다. 화풍의 특징으로는 운두준(韻頭皴; 산봉우리를 뭉게구름처럼 표현)․해조묘(蟹爪描; 마른 나무의 구부러진 모습을 게의 발처럼 그림)의 사용, 산의 하단에서 조명을 비추는 듯한 조광효과(照光效果), 붓질을 이어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필법 등이 있다. 아들인 곽사(郭思)의 『임천고치(林泉高致)』를 통해 곽희의 회화이론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산수의 정취를 화폭에 담다, 《소상팔경도》

    문인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됐던 산수화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직접 산수유람을 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그림을 보며 대신 즐기는 ‘와유(臥遊; 집 앞에 가만히 누워서 산수를 즐기다)’ 사상을 심어주었다. 조선 초기 관료들의 이상이었던 장소는 중국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소상(瀟湘)’으로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에 있는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합쳐지는 일대를 말한다. 이 곳의 아름다운 경치 8곳을 뽑은 것을 ‘소상팔경(瀟湘八景)’이라 한다. 

     

    소상팔경을 그린 《소상팔경도》의 내용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산시청람(山市晴嵐)>은 따뜻한 봄 아침에 아지랑이에 둘러싸인 산속시장을 그린 그림을, <연사모종(燃寺暮鐘)>은 저녁 무렵 멀리 구름과 안개로 둘러쌓인 산사(山寺)에서 어렴풋이 들러오는 종소리를 묘사한 그림을, <원포귀범(遠浦歸帆)>은 가을 저녁 무렵에 먼 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돛단배를 표현할 그림을, <어촌석조(漁村夕照)>는 저녁 무렵 한가한 어촌에 찾아든 붉을 노을을 표현한 그림이다. 

     

    <소상야우(瀟湘夜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상의 밤 풍경을 표현한 그림을, <동정추월(洞庭秋月)>은 가을날 동정호에 비친 맑은 달을 표현한 그림을, <평사낙안(平沙落雁)>은 늦가을 저녁 무렵 넓은 모래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그린 그림을, <강천모설(江天暮雪)>은 겨울 저녁에 하늘에서 강가로 눈이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소상팔경도》와 유사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로 수려한 사계절을 정취를 각각 2장면씩 그린 것이다.  


     

    마음으로 본 자연, 사대부 그림

    조선초기에는 자연의 이치가 본질이고, 예술은 이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화원화가들의 정밀한 채색화보다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담은 수묵화가 더 훌륭하다가 생각했다. 성종이 궁궐에 화원들을 모아놓고 초목과 동물을 그리게 하자, 신하들이 “진귀한 물건이나 기예에 빠져 큰 뜻을 잃는 것[완물상지(玩物喪志)]을 경계해야한다”고 간언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그림의 본질은 겉모습을 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수양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작가로는 고사(高士;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선비)를 잘 그린 강희안(姜希顔, 1419~1464), 그의 동생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안견 화풍을 이은 양팽손(梁彭孫, 1480~1545) 등이 있다. 그 밖에 사대부화가 중 독특한 동물화를 선보였던 이암(李巖, 1499~?), 현모양처로 알려진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申思任堂, 1504~1551)이 있다.

     

    -사대부들의 친목도모, <계회도>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친목이나 경제적 목적으로 행했던 다양한 계(契)의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한 예가 있다. 바로 관료들의 풍류와 친목도모를 그린 <계회도(契會圖)>로, 여러 장을 똑같이 그려 참여한 사람들에게 한 장씩 나눠줬다는 점에서 일종의 단체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 관료사회가 자를 잡아가던 15세기부터 적극적으로 그려진 <계회도>는 시대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면서 조선말까지 제작되었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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