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레지던시 ⋞ 송신
예술가에게 레지던시는 일과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장소다. 그 장소가 익숙함에서 멀어질수록 작가는 전작과는 다른 낯선 선택을 할 기회를 얻게 된다. 레지던시는 새로운 여정이 생성되는 거점이자 간혹 여행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제도적인 도움이나 단단한 작업 계획이 없더라도, 이를테면 누군가 자발적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혹은 그러한 상황이 계기가 되어 창작이 발아할 수 있음을 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미국 서부와 멕시코 횡단 길에서 태어난 것처럼, 작가들도 미처 모르는 창작의 단서는 일상 밖 생소한 공간에 있을 때 필연처럼 찾아와 주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레지던시 제도의 핵심은 - 안정적인 작업 환경, 전문가나 동료와의 네트워킹, 전시 지원을 보장받는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생각의 길을 새로 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본 전시에 참여하는 김도희와 방지원, 이승연, 전보경은 2023년에 각각 일본, 프랑스, 핀란드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입주 기간이나 오픈 스튜디오 등 결과 발표 활동은 레지던시의 운영 방향에 따라 제각각이었으나, 작가들은 감정, 혹은 신체 감각이 사고로 확장되는 시간의 흐름을 싣고 돌아왔다.《송신》은 예술가가 레지던시에서 사용한 절대적인 시간, 말하자면 시계의 시간을 되짚어 그들이 느낀 주관적인 장소감(sense of place)을 전시장에 불러오고자 한다.
수신 Footsteps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북미와 영국에서 레지던시 개념을 위시한 예술 공동체가 발생한 시기에는 창작이란 산업화한 도심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다. 또한 레지던시란 예술가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얼마간의 시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피정(retreat) 개념의 레지던시 뿐만 아니라 지역 내 사회적 참여를 독려하는 레지던시나 대도심 내에 위치해 다국적 참여자와의 인적 연결을 긴밀히 지원하는 레지던시 등 그 다양성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레지던시의 개별적 존재 이유와 특성은 다양하지만, 외부의 압박없이 연구하고 창작할 수 있는 장소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지던시의 의미는 작가들의 작업 다변화와 성장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산한 것이 주변에 전달하는 예술적인 영향에 있다. 《송신》의 작가들이 레지던시에서 가져와 재구성한 작품들과 그들이 발산하는 개별적인 장소감은 우리가 가진 사회 문화적 인식을 작가들이 제시한 것과 빗대어 보게 하거나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각 장소에 대한 감각은 수용자의 경험이나 성향에 따라 감응의 편차를 만들고, 이는 우리가 문학이라는 간접 경험을 할 때 글의 내용과 형식, 문체의 전달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용의 폭을 조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관객은 몸을 움직여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대상을 마주할 수 있으니 전시라는 이 한시적인 장소의 감도를 직접 작동시킬 수 있다.
김도희는 후쿠오카에서 야타이(屋台)를 발견했다. 야타이는 일본식 포장마차로, 에도 시대부터 성행하다가 위생 문제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중 후쿠오카는 예외적으로 대규모 야타이 영업 허가를 받은 도시인데, 작가는 그 이유가 2차 세계대전 후 가장이 된 여성들이 야타이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온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야타이 구조에 한국의 상여(관을 운반하는 전통 가마)를 결합해 먹는 행위(生)와 장례 행위(死)가 우위 없이 수평적으로 만나도록 제작했다. 이원론으로 나뉜 개념들이 결국은 순환하며 연결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렇게 등장하게 된 <김명태 승천기: 상여 야타이 놀이>는 화려한 종이꽃으로 장식한, 故김명태의 승천을 주관하는 상여와 포장마차의 특징인 삶의 소란함이 함께 제시됐다.
방지원은 동해안별신굿의 화랭이로 이 제의적 놀이에 요령잡이이자 상여소리꾼으로 참여했다. 그는 생과 사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교차시킨 자리에 상엿소리를 선창하며 잔치 같은 추모 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도희와 방지원은 한국에서 다시 만나 음력의 첫 번째 달인 정월에 열리는 본 전시에서 협업을 진행한다. 먼저 전시 공간을 겨울과 봄, 음과 양으로 팽창시키고 시간의 흐름이 있는 공간으로 상정하여 지하 전시장과 지상층을 동그랗게 연결해 <김명태 승천기>를 정월과 연계한 개별 작품으로 다시금 선보인다. 지하층에는 방지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수집한 징과 여타의 것을 포함한 총 13개의 징이 설치 작업으로 제시된다. 열두 달, 그리고 윤달을 상징하는 <달 울리기>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관객이 직접 두드려 보며 배음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됐다. 이들이 재현하는 세시풍속은 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과 믿음을 환기한다.
이승연은 파리의 이응노 레지던시에 입주해 조르주 상드, 그리고 그와 교류했던 프레데리크 쇼팽이나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명사들의 궤적을 따라 그들이 남긴 사적인 갈래를 탐험했다. 작가는 일종의 가상 트레일을 만들어 구조화된 시간 밖에서 그들의 의식을 가늠해 보는데 집중했고, 이를 한국화 소재인 장지에 먹과 실 드로잉을 올리는 방식- 다소 전통적이면서도 손쉽고 빠르게 인상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다수의 드로잉을 남겼다. 여행자로서의 삶을 지탱해 온 작가의 지난 작업의 갈래 역시 수많은 의식과 발상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사하라 사막, 포르투갈의 대서양, 루마니아의 카르파티아 산맥의 역사, 문화, 생태 등을 체험하며 받은 인상을 작업에 소여한 태피스트리 연작과 팬데믹이 세계를 관통하는 동안 동시대적 이미지에 고대 설화나 신화적 위상을 입혀 시리즈로 만든 라이트 박스 작업, 그리고 소리꾼 이희문과 협업한 <신낙원도> 등을 함께 선보인다.
전보경은 핀란드의 HIAP(헬싱키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헬싱키의 생태를 보는 방식에 대한 작업을 하게 된다. 전작에서 훈련된 몸이나 기계가 촉발하는 인간 신체의 변화, 혹은 그 경계에 걸려있는 몸에 대한 작업을 이어온 작가는 레지던시에서 풍화와 발아가 뒤섞인 장소를 살피며 기록을 남겼다. 현지에서 자생하는 민들레를 말려 씨를 얻거나, 자연꿀벌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핀란드 템페라 대학교(Tampere University)에서 개발 중인 인공벌(일명 '요정')에 대해 리서치하면서 무생물과 생물, 인공과 자연의 산물, 그리고 인간 신체 바깥의 움직임을 조사했다. 작가는 수림큐브의 2층 두 개 전시장을 활용한 이번 전시에 헬싱키에서 선별해 온 여러 사물들과 현지 기록들- 돌, 벌, 씨앗, 사진 연작과 냄새, 그리고 빛을 가져온다. 영상 작업인 < W ing Wi ng > 또한 그가 낯선 기류의 환경을 감각하는 과정에서 찾은 몇 가지 주요 개체와 행위를 현지 퍼포머가 수행해 보는 즉흥과 완결 사이의 리서치를 담고 있다.
주최 및 주관: 수림문화재단
글. 진행: 김수정
홍보: 진윤희, 강수미
그래픽 디자인: 기조측면
공간 조성 및 설치: 김연세
1979년 부산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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