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전희경
바람에 흩날리고, 햇빛에 바래지고, 비에 젖으며, 이야기들이 나아간다, Wind-scattered, Sun-faded, Rain-soaked Narratives are Moving Forward 2024, Acrylic, acrylic spray on canvas, 162.2 x 390.9cm ( x 3P)
전희경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산, My Mountain as It is 2024, Acrylic on canvas, 90.9 x 72.7cm
전희경
연속적 블루_에메랄드빛 웅덩이, Interminable Blue_an Emerald Puddle 2024, Acrylic, acrylic spray on canvas, 130.3 x 97cm
“떨어지자마자, 또는 심지어 떨어지면서, 또는 흩날릴 때조차도 이미 눈은 극히 거침없이, 지각 불가능하게 끝없이 우리 눈 앞에서 녹고 있지 않은가? ... 녹고 있는 이 눈은 아직 눈으로 존재하는가? 또는 그것은 이미 물이 아닌가?” —프랑수아 줄리앙, 『고요한 변화』
우리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 적이 종종 있었던가? 갤러리JJ는 자연을 매개로 내면세계와 추상적인 회화 공간을 탐구해온 전희경(b.1981)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작가는 물리적 현실이나 절대적인 것들의 사이 공간에 주목하여, 보이지 않는 심상을 자유로운 추상의 필치가 빚어내는 어떤 풍경, 장소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번 전시 < 전희경: Richer Viridian >은 작가가 지난 2023년 1년간의 제주 레지던시 입주를 마친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으로, 도시를 떠나 당시 자신이 몸담았던 짙고 푸른 자연에 영감을 받은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는 약 4미터 길이의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20여점의 신작들로 구성되며, 특히 2021년부터 시작된 ‘연속적 블루’ 시리즈는 부제를 붙여 새롭게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숲으로부터 무한한 우주공간을 연결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배경 위에 풍경이 놓이는 구도, 동적으로 상승하는 곡선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등 작업은 보다 확장된 시야와 자연에 대해 유기적이고 관조하는 태도로 다가온다.
I.
전희경은 계곡이나 폭포를 연상시키는 요소 혹은 빛과 바람, 기후같이 비가시적인 자연현상에서의 감각적 경험과 회화적 상상을 더해 추상 언어로 풀어낸다. 이때 펼쳐진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회화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세계로 다가온다. 다양한 톤의 초록과 푸른 색채, 거침없는 획의 흐름과 레이어를 통한 공간감, 중층적인 하얀 여백의 회화적 깊이만으로도 풍경을 암시하거나 상상의 장소를 가시화하며 예기치 않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한편, 마치 전통 산수화에서 느끼듯 우리를 화면의 낯선 장소 속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작업은 초기의 ’-살이’시리즈(2009), 이어서 <이상적 삶>(2015)이나 <이상적 풍경>(2017) 등을 통하여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포착하거나 혹은 아예 도피처로써 유토피아를 암시하는 듯했다. 이후 점차 비가시적인 자연의 요소가 깊숙이 들어오면서 그림의 형식에서도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 터치가 두드러졌다. <바람에 대한 연구>(2021)를 지나 <연속적 블루>시리즈에서는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비롯하여 동굴 등 미지의 자연 속을 탐험하는 서사구조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전희경의 추상적인 화면을 ‘풍경’이라고 명칭을 한다면 그것은 심상 풍경을 가리킨다. 이는 곧 작가 자신이 부유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틈새, 욕망이 떠도는 사이 공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변화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의 가시적 표현이다. 미루어 보면, 작가에게는 지향하는 어떤 공간이나 일련의 장소성이 있으며 자연의 장소라는 뉘앙스를 의도한다. 애초에 풍경 예찬이나 관광적 풍경은 아니기에, 그의 풍경은 감각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 자연을 매개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 인간의 무의식에 본원적으로 내재된 자연의 형태 혹은 장소로 몰고 간다. 이제 제주도에서의 경험은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지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전환점이 된 듯하다. 이번 전시는 그가 직접 대자연의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와 이끼, 빛과 바람 등을 온전히 몸으로 체험하고 받아들이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와 함께 요동치는 힘의 근원, 인간과 삶으로 확장한 사유의 리포트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는 풍경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 그 사회의 모든 것이 투영된 문화’이다.
II.
‘바람에 흩날리는 모든 풍경’, ‘조금 더 짙고 푸르렀으며 광활하고 눈부셨다’, ‘에메랄드빛 웅덩이’… 화면처럼 제목 역시 무척 시적이고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법한 표현이다. 작가는 일기를 쓰듯 작품 제목에서 개인적인 심상을 표현하며(실지로 그는 일기에서 작품 제목을 선택하기도 한다), 심지어 화면 속 이야기가 프레임 외부로 확장하여 그림과 그림 사이를 서로 연결할 수 있도록 서사의 전개 구조를 열어두고자 한다. 곧 하나의 회화가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인 동시에 물리적 공간에서 경험되는 회화 설치를 통해 여러 점의 회화가 연속되는 구조 사이에서 새로운 내러티브가 발생하는 방식을 모색한다. 아무리 회화가 문학적 요소를 배제하고 추상화되었더라도 관객은 내용을 찾고 작가는 은밀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는 오래전부터 회화에서 구체적 형상 없이도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방식, 그림 속으로 들고날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해왔다. 작품 속 기본 바탕칠에서부터 비롯된 흰색의 여백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 텍스트가 나아가는 생산 장소이다. 붓과 스퀴지, 해면스펀지 같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때로는 색을 지워내며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오간다. 이렇게 여백과 채워진 공간이 교차하면서 화면 속 장면을 따라 천천히 거닐 수 있는 서사구조에는 전통 산수화에서의 생명의 생성과 소멸이, 수사적 시공간이 겹쳐진다. 여기에서는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2013년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수상했던 경력이 있다. 전희경은 ‘그리는 과정에서 자신은 마치 금강산을 유람하듯이 그림 속을 들고나면서, 그 풍경 속 장소를 오롯이 즐기는 유희자’라고 말한다.
특히 이번 ‘연속적 블루’ 신작들에는 배경이라고 할만한 공간이 등장함과 동시에 위에서 밑으로 내려본 듯한 새로운 시점이 등장한다. 이는 경관에 대한 재현적 관심이나 서구의 원근법이기보다, 동아시아 산수화의 원근에서 구현하는 삼원법으로 보면 심원, 혹은 조감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작가가 작업에서 전통산수화의 방법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머리 속에 떠있는 풍경을 그대로 떠서 우주, 곧 내면의 무한한 공간에 옮겨 놓고자 한다. 마치 원림을 내집앞에 만들어 놓던 옛 방식으로 말이다. 제주에서의 짧은 시간을 보냈기도 하여서 그런지, 망망대해에 떠있는 제주의 섬 모양이 내가 나의 내면에 옮겨다 놓은 어느 풍경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인 듯하다.” —작가노트
오히려 그는 배경에 풍경이 하나의 이미지로 얹어진 정물화 구도를 말한다. 바라보는 대상이나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하나의 우주 풍경이다. 광활한 자연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몸의 움직임이나 호흡이 어느덧 자연과 깊이 연결되면서, 주체로서의 내가 아닌 자연의 일부가 된다. 이와 같은 체험은 화면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는 자연, 숲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풍경, 무중력의 우주에서 내려다본 숲의 형태로 표현된다. 캔버스가 풍경 속 하나의 캡처가 아니라 여기서는 무한한 우주공간, 곧 작가 내면의 우주인 셈이다. 작가는 대자연의 풍경을 자신만의 작은 ‘원림’으로 만들어 화면 위에 자유자재로 풀어놓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원림(園林)이란 일종의 자연상태의 정원을 곁에 두는 문화로 사대부들의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성을 지닌다. 지금껏 부유하며 맴돌았던 심리적 풍경이 어느덧 두께가 생기고 작가 스스로에게 일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일까? 고려와 조선시대에 ‘정원’과 같은 뜻인 집 안팎의 조경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으나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용어인 원림은 '놀고 휴식하는 장소'를 뜻하며 선비들의 관념과 사상이 축적되어있는 장소로써, 우리의 정서에 깊게 관여되어 왔다. 자연은 쉬는 곳이고 나를 편안히 안겨주는 곳이라는 인식은 18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유행했던 픽처레스크 취향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도시 부르주아들의 반도시적 욕망의 표상일 수 있다. 도시에 살지만 작가가 꿈꾸고 나아가는 삶의 세계, 미지의 장소가 자연에 근거한 쉼터와 관계한다는 사실은 비단 작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에 본원적으로 내재하는 원형적 장소 혹은 아르카디엔의 세계, 치유 공간으로서의 현실의 유토피아, 혹은 오히려 심연일 지도 모르는 그곳은 자연을 향해 열려있다. 선이나 명상, 삶의 태도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온 그림은 불안, 번뇌를 거쳐 욕망, 심상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저 너머의 장소는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III.
“이건 안개가 아니다. 나는 지금 필시 구름 속에 있다. 구름이 잠시 땅 근처까지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작가노트
전희경에게 ‘자연(自然)’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이며, 그는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모든 이치’라고 말한다. 작업의 표현적 터치는 의도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지지만 들여다보면, 작업에서 상승하듯 연속적으로 휘감기는 곡선의 획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인 에너지로 끊길 듯 새롭게 이어지는 수많은 포물선들은, 즉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변화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물과 웅덩이, 구름과 안개, 이끼와 나무, 조금 더 짙고 푸르러진 하늘과 녹음의 색… 형체가 바뀌어도 만물은 파노라마처럼 연결되어 있고 모두 순환의 고리에 있음이 감지된다. ‘빛에 적셔진 곳은 어디서 끝나며 어디서 빛이 오므라들기 시작하는가?’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한순간도 같지 않고 우리 의식에 포착되지 않더라도 조용히 변화하듯이, 삶 또한 단절이 없으며 ‘고요한 변화’이다. 화면 속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색과 붓질의 흐름은 새로운 리듬으로 연결되어 또다른 의미와 가능성을 열며, 이렇게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끝없이 순환하는 연결 구조는 미적 경험은 물론 자연과 삶의 본질을 아우르며 질문과 성찰의 기회를 준다. 고단한 인간세상을 떠나 도달하고자 하는 귀의처로서의 자연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가 자연 풍경을 통해 이르는 곳이 다시 인간과 삶의 세계임은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임에, 모든 생겨남이 그 자체로 연속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 아닌가?
전희경의 심상 풍경은 시각현상에 기반한 서양식 풍경화와는 거리가 있으며, 자연경을 빌려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서술하는 동아시아의 산수화와도 다르다. 자연의 장소라는 물질성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마치 바람, 안개, 하늘의 푸름을 만지고 듣는 듯 시각은 물론 촉각과 후각을 통한 몸 체험에 이르기까지 비가시적 현존을 시각화하는 그의 작업은,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우리를 시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인공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이 내재한다. 전희경의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그의 작업은 풍경과 산수, 현실과 비현실, 현상과 감각, 과거와 현재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해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사이에서 고뇌하며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 내외부의 변화에 대처하여 열림과 닫힘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전시에서 누구나 무의식 속에 하나쯤은 갖고 있는, 닿고자 하는, 존재하지 않지만 한번은 갔다 온 듯 익숙한, 그립고 편안한, 별이 쏟아지는 그런 곳… 이러한 것들과의 모종의 마주침,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글│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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