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우리 시대는 단지 지구적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지구적 시대의 끝점이자 ‘행성적인 것(the planetary)’이라 부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 이신철 옮김(에코리브르, 2023), 13쪽.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발생하는 각종 생태학적 위기와 재난 상황들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의 존재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기계, 동물, 식물, 사상 등 다양한 형태를 띠는 비인간들은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간주되었고 사회적 현상들은 이러한 행위자들 간의 관계로 파악되었습니다. ‘지구’가 인간 중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행성’을 세계, 대지 및 지구와는 다른 대안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행성적 관점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에 따르면 지구적인 것은 인간적인 시간의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지칭하는 반면, 행성은 인간을 탈중심화하며 비인간적 차원의 광대한 과정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 형식보다 특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의 행성적 사유는 인간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동등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SeMA 옴니버스는 2024년 서울시립미술관 기관의제 ‘연결’과 관련하여 본관과 분관 등 4곳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소장품 기획전입니다. 그중 남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제9행성≫은 모든 것이 초연결되어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과 관계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현시점에 미술관 소장품을 통해 인간이 아닌 생물, 무생물 등 다른 행위자에 주목하고 여기서 촉발되는 질문들을 탐구합니다. 또한 더 이상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위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행성을 상상합니다.
전시명 ‘제9행성’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태양계의 8개 행성 외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아홉 번째 행성으로, 인간이 규정하고 이름 붙인 태양계의 여덟 행성과 다른 미지의 영역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기계, 로봇, 자연, 일상의 사물, 비가시적인 바이러스 등 다양한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연결을 그려내고 그동안 망각되었던 가치와 존재들의 의미를 되묻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번성하기 위해 만들어 온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인간의 관점으로 구성한 범주들을 흔듭니다.
“지구적인 것 그 자체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차크라바르티의 말처럼 행성적 관점은 인간적인 지평에서 한발 물러나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유할 것을 촉구합니다.
[파트 1] 기계와 인간 전보경과 고창선의 작업은 기계와 로봇의 등장이 인간과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룹니다. 전보경은 4명의 무용가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로봇의 일률적 움직임을 독자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영상 작업을 통해 인간 고유의 특성과 비효율성의 가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갑니다.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 장치를 통해 구현되는 고창선의 작업은 작품과 관객이 맺는 능동적 관계에 중점을 둡니다. 작품 속에서 일시적으로 재설정되는 작품과 관객의 관계는 기계와 인간, 서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을 데이터화하고 시공간적 인식을 재구성하는 기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기계 혹은 기술과 함께 진화하는 예술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파트 2] 침투하는 존재 조은지, 정혜정, 황문정은 자연을 비롯한 유기물, 무기물 등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과 인간의 연결을 드러내고 실재와 가상을 넘나들며 다종의 존재들과 얽힌 생태계를 노출시킵니다. 조은지는 각종 차별적 경계들을 파괴하고 무화하는 수행적 작업을 통해 또 다른 행성을 상상하며 서로 다른 종 사이의 공명의 지점을 만들어 냅니다. 산호의 생물학적 특성에 착안한 정혜정의 구조물 설치 작업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혼종적 신체와 다양한 몸을 그려내며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온 개념들에 균열을 가합니다. 황문정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각종 비인간 존재들을 작가 특유의 로우테크적(low-tech) 접근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작품을 통해 비인간들의 생태계에 주목하고 그들의 환경적 조건을 재검토함으로써 이들과의 공생 방식을 고찰합니다.
[파트 3] 보이지 않는 것 염지혜, 뮌, 정승, 신정필의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가시화되지는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것에 대한 집중적 관심과 탐구를 통해 망각되기 쉬운 존재들의 의미를 밝혀 나갑니다. 염지혜는 2015년 메르스 확산으로 전 국민이 경험했던 공포와 불안을 바탕으로 우리 삶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을 둘러싼 루머 등으로 극대화된 감각을 노출시킵니다. 뮌은 우리가 몰입하는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사회 정치적 맥락을 들추며 텅 빈 경기장 속에 감도는 긴장감을 통해 군중을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은유적으로 드러냅니다. 정승은 산업 사회를 대변하는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은 자동차를 분해하고 그 파편들을 부드러운 펠트 천과 수공예적 기법으로 재현합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루며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던 부품들은 원래 모습과 다른 크기와 표피를 지닌 존재로 재탄생하여 산업 시스템 속 개인과 작은 존재들의 가치를 조명합니다. 신정필은 시각에만 의존한 사물 인식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재료와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고 그것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되살리고자 합니다.
1970년 출생
1972년 출생
1982년 서울출생
1976년 출생
197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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