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리더 Scott Reeder: Bread & Butter
2024.08.23 ▶ 2024.10.05
2024.08.23 ▶ 2024.10.05
전시 포스터
스캇 리더(Scott Reeder)
Bread & Butter (Pink Modern Pool) 2023, Oil on canvas, 24 × 40in (61.0 × 101.6cm)
스캇 리더(Scott Reeder)
Pear with Banana (Therapy) 2021, Oil on canvas, 24 × 30in (61.0 × 76.2cm)
스캇 리더(Scott Reeder)
Pink Interior 2024 Oil on canvas, 30 x 24in (76.2 x 61.0cm)
스캇 리더(Scott Reeder)
Pink Studio (by the sea) 2024, Oil on canvas, 24 x 30in (50.8 x 76.2cm)
“단지 하나씩 계속 쌓으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이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가장 흥미로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스캇 리더
갤러리JJ는 미국의 시카고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스캇 리더(Scott Reeder, 1970)의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
야자수 나무 아래 선탠과 수영을 즐기는 버터와 식빵 커플, 하필 뜨거운 열대에 드러누운 아이스크림이나 버터의 터무니없는 조합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간결하게 만화 같은 평면적 구성과 파스텔 톤의 독특한 컬러 조합을 더한 화면은 유쾌한 상상력의 무대가 된다. 때로 작품 <핑크 스튜디오>(2024)처럼 마티스나 피카소의 ‘미술가와 모델’, ‘스튜디오’ 같이 잘 알려진 주제의 이미지가 엿보이기도 한다. 작업은 소위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의 이슈가 읽히기도 하며, 종종 미묘한 긴장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대미술의 다양한 컨텍스트로 바라보게 한다. 리더는 유머를 통해 회화 역사에 도전하고 삶의 모순 같은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의인화된 빵과 버터, 바나나 등 일상 사물들의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한 광경을 담은 ‘이미지 페인팅’ 시리즈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대표적인 시리즈로, 작가는 여러가지 작품 연작을 다년간에 걸쳐 동시에 진행하고 있으며, 동일한 주제를 수많은 버전으로 반복하여 작업한다.
리더는 2010년 즈음, 텍스트 기반의 회화와 프로세스 회화의 패러디 작품으로 처음 알려지면서 각종 미술관과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었다. 살펴보면, 정물화 전통을 바탕으로 실내 인테리어, 빵과 버터, 과일 및 다양한 일상용품 같은 무생물에 감정 표현과 사회적 관계를 투영하는 ‘이미지 페인팅’ 시리즈(2007년~), 잭슨 폴록의 액션과 견주어 우리가 알고 있는 추상표현주의 또는 추상회화의 미술 양식과 회화라는 매체의 진지함을 위트있게 비틀어 재고하는 ‘파스타 회화’ 시리즈, ‘단어 회화’ 시리즈가 나오고(2010년~), 비교적 최근에 좀더 집중적으로 작업하는 ‘세라믹 부조 회화’ 및 세라믹 조각 작업은 세라믹으로 제작, 복제된 일상 속 흔한 사물들을 늘어놓아 마치 색인처럼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소비 행태, 욕망과 악습을 성찰하게 한다(2016년~). 한편 즉흥성을 기반으로 한 SF영화 <문 더스트 Moon Dust>(2014년), 아이러니를 테마로 한 아트페어인 <다크 페어 Dark Fair>(2008년) 같은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자신의 작업세계를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빵과 버터’는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작품 제목으로, 단어 자체의 의미와 더불어 삶에서 필수적인 ‘생계’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리더가 늘 그래왔듯이, 이 역시 미리 써둔 단어 리스트에서 랜덤하게 고른 단어의 조합이다. 그는 먼저 단어들을 고른 후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반복하여 조금씩의 차이를 두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려왔다. 이번 ‘이미지 페인팅’ 신작들은 예전보다 마치 수채화처럼 색감이 엷고 투명하며 붓질이 더 드러난다. 주인공으로 야채가 등장하고, 캐릭터에 움직임이 더해지기도 한다.
Ⅰ ‘유머는 그림의 필수 요소’
“그것이 웃기든 웃기지 않든, 나는 극도의 환원과 절제, 담담한 유머를 통해 작품에서 간단명료한 것을 추구한다.” —스캇 리더
사적 공간을 몰래 엿보는 바나나는 관음증 환자인가. 아이스크림은 열대에서 휴식은 커녕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테라피가 필요한 바나나, 담배를 피거나 술에 취한 화분 속 꽃을 힘들게 하는 세상살이의 사연이 궁금하고, 녹아 내리면서도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시지프스 아이스크림은 왠지 공감이 간다. 의인화된 사물들의 아이러니한 광경은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궁금증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그저 무덤덤하게 그려진 사물 너머로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으레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그저 사물일 뿐인 것들에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투사하는 일의 허황됨을 비튼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캐릭터들 사이에 놓인 남성과 여성, 관음증,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긴장감이나 권력 관계를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구상 회화와 대량생산된 일상용품을 본뜬 미니어처 오브제들, 생 파스타와 익힌 파스타를 흩뿌려 추상회화에 가한 신랄한 유머까지, 작업은 전반에 걸쳐 관객에게 유머로 농담을 걸어오고 수수께끼를 던지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문화예술계에 다양한 유머코드가 등장하는 이유는,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점 외에도 특정 대상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는 점을 꼽는다. 리더는 ‘유머는 관객의 초기 참여를 유도하는 큰 장치’라고 말한다. 관객은 웃다 보면 어느새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농담의 공모자가 된다. 또한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소리—가치나 계급 구조 등에 대한 본질적 의심 같은 것들—를 유머를 통해 우회적으로 증폭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유머는 좌절하지 않으며, 반항적이다. 들여다보면, 리더의 작품은 진지한 예술, 통념, 엘리트주의를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가볍게 접근하고 때로는 뒤집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 시대 달의 리조트를 배경으로 그림 같은 세트 속에서 벌어지는 코미디 풍의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이며, 사회적 계급 구조와 미국 도시들에 대한 역설적 내레이션이기도 하다. ‘밀워키 인터내셔널’ 그룹을 조직하여 개최한 기발한 ‘다크페어’(자연광과 조명을 사용하지 않는 미니 아트페어) 같은 공공 프로젝트와 더불어 이러한 유머 코드를 이해함에 있어서, 자본주의와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과 대비하여 번성했던 경제가 급속도로 기운 디트로이트의 상황, 곧 작가가 자란 미국 중부 지역의 문화적 성격은 고려해야 할 요소일 것이다.
작가는 일상을 관찰하고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현실 속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는 점에서 ‘미중서부의 마그리트’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실지로 그는 특히 르네 마그리트의 짧았던 ‘바슈 vache’ 시기의 야수주의를 풍자하는 역설적인 작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통념을 벗어나는 뜻밖의 반전은 평범한 순간을 기묘하게 부조리함으로 나타내 보인다. 유머에 의한 전복은 제프 쿤스가 말하듯, 현대미술의 한 방법이다.
Ⅱ. 언어, 우연, 그리고 ‘회화’
“그리기 위해서는 알지 못하는 길로 가야 한다. 예술은 모퉁이를 도는 것과 같다;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밀턴 에브리 Milton Avery
리더는 자신이 선호하는 모티프들—버터와 빵, 바나나, 배, 아이스크림 등—의 레퍼토리를 연속으로 개발하고 변주를 거듭한다. 이러한 반복 작업은 하나의 대상을 다양하게 확장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와 이미지의 발견은 그가 생각날때마다 미리 써둔 텍스트, 단어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디트로이트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단어 리스트를 쓴(혹은 그린) 큰 캔버스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이 ‘리스트 페인팅’과 함께 텍스트 작업에는 단어 조합과 색채로 언어 유희를 보여주는 ‘단어 회화’, ‘네온’ 작업도 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 그는 다양한 아이디어 창고 격인 리스트가 적힌 노트에 다트를 던지는 등 무작위로 단어를 선택하여 이미지를 떠올리고 실행한다. 제목이 먼저 정해지고 이미지가 그다음에 오는 식이다. 곧 리더의 모든 작업은 언어에서 시작하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놀이가 작업의 주요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기표와 기의는 사람의 기호적 해석 작용에 따라 계속하여 다른 의미의 기호를 생성하게 된다. 맥락과 의미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그는 관련 없는 단어나 이미지 조각을 결합하여 예상치 못한 서사나 내용, 새롭게 혼합된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무작위적인 언어 추출이나 파스타 면을 바닥에 흩뿌리는 작업은 마치 과거에 한스 아르프가 종이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려 우연히 배열된 상태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처럼 우연성을 모티브로 한다. 그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우연히 도출되며, 존 케이지, 다다이스트들의 모든 우연성에 대한 탐구가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존 것에 대한 탐구와 실험으로 리더의 작업에는 회화 전통에서 어느덧 클리셰로 자리잡은 다양한 근현대미술사의 상징적 레퍼런스가 광범위하게 내재한다. 곧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 중 하나는 회화, 혹은 회화의 역사를 활용하는 점이다. 필립 거스통의 만화 같은 대상, 마티스의 붉은 스튜디오, 호크니의 수영장, 만 레이의 레이요그래프(rayograph)처럼 보이기도 하는 빛나는 듯한 추상 이미지는 실은 스파게티 면발의 실루엣으로, 잭슨 폴록의 올-오버 페인팅에 대한 패러디이며 더 나아가 페인트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붓 사용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추상과 재현, 고급과 저급 등 대립되는 이분법적인 범주 자체를 소재로 예술사적 아이콘을 부조리한 패러디로 다루면서, 한 켠에는 모더니즘이 매몰되어 있던 이성과 질서의 거대서사를 회의했던 현대미술 대가들을 향한 신뢰의 태도가 있다. 특히 과감한 유머와 풍자적인 오브제 설치 및 이미지를 넘나들던 마틴 키펜베르거,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관계나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회화의 수단에 제한을 두지 않은 포괄적인 작업 방식을 가진 시그마 폴케, 군더더기가 빠진 간결한 형태와 환상적인 색채의 밀턴 에브리 등 느슨하게는 독일의 신표현주의나 자국의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 기조의 작가들이다. 리더는 이들의 궤적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전통회화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부단한 시도를 거듭한다. 회화사에서 답습된 것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리더의 작업은 그래서 좀더 복잡한 층위의 의미를 함유하며, 달콤한 색상과 유치해보이는 주제, 악동 같은 유머 등 자신만의 행보로 현대회화에 새로운 담론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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