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회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기상학자가 저마다 바람, 구름, 비, 눈으로 향하는 길을 냈다. 정량적 수치와 실증적 관찰로 도출한 연구 결과가 인류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제안해 준다면, 화가는 어떤 시선으로 날씨를 바라보며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김수연은 우리에게 주어진 날씨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에 화가로서 자신이 지닌 주관적인 필터(filter)를 덧댄다. 그의 회화는 자연의 흐름과 화가의 시선이 동일한 시간 속에서 교차하며 서로를 침범하고 유영하는 방식을 그린다. 두 가지 체계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넘나들며, 김수연은 날씨 그리기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WCRS》를 통해 김수연이 제시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Q. 《WCRS》는 중선농원에서 열리는 김수연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입니다. 본인과 전시를 소개해 주세요.
A. 이번 전시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제작한 ‘날씨’ 연작을 선보입니다. 저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인상과 상상, 정확함과 부정확함, 채움과 비움, 자연에 대한 사유와 손의 노동이 만들어 내는 그림 등 상반되는 두 가지 범주를 오가는 동시에 함께 상상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지난 10년간 식물도감, 백과사전, 춘화집 등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입체물로 제작한 뒤 이를 정물화의 형식으로 구현했습니다. 최근에는 날씨로 표상되는 시간을 물질로 치환하는 방식에 집중하여 다양한 기후 현상을 경유한 주관적 경험을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바람, 구름, 비, 눈 네 종류의 날씨를 그린 연작으로 구성했습니다. 전시 제목 《WCRS》는 ‘Wind(바람)’, ‘Cloud(구름)’, ‘Rain(비)’, ‘Snow(눈)’의 앞 글자를 조합한 단어입니다.
Q. 날씨를 전시의 주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특히 여러 해에 걸쳐 그린 작업이 함께 모여 있는 점이 흥미로운데, 네 종류의 날씨는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요?
A. ‘비’, ‘눈’, ‘구름’ 연작은 2020년에, ‘바람’ 연작은 2022년부터 그렸습니다. 저는 매번 당시의 관심사에 기반해 중심 소재를 선택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내용을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새, 식물, 백과사전, 춘화, 날씨 등 지금까지 제가 회화의 대상으로 삼아 온 대상은 모두 존재했는데 사라져 버린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일련의 작업에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저의ᅠ 염원이 공통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제주도에 위치한 갤러리2 중선농원은 감귤을 보관하던 큰 창고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 공간이 자연 한복판에 서서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캔버스 같은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방문한 관객들이 자연을 더욱 가까이에서 체험하도록 ‘날씨’ 연작으로만 구성한 전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전시 제목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W)은 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만들고, 구름(C)은 땅으로 떨어지는 비를 형성하고, 비(R)는 기온이 낮아지면 눈(S)이 되잖아요. 사실 ‘날씨’ 연작을 제작하기 이전에는 저에게 날씨라는 것이 그날의 감정에 따라 파편적으로만 다가오는 개념이었는데요. 연작을 만드는 동안 매일 달라지는 날씨를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인과관계를 발견했고 그 관계가 순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람에서 눈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관계를 맺는 네 종류의 날씨를 전시의 주제로 선택해 보았습니다.
Q. 날씨는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의 요소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님의 작업도 날씨의 구체적인 형상을 발견하거나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접근이 드러나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날씨를 그리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각 날씨의 종류마다 그리게 된 계기가 다른가요?
A. ‘날씨’ 연작 초기에는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현상에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인상을 덧대어 표현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비’였어요. 2020년에 50일간 길게 장마가 이어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하늘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는데요. 그러면서 비가 내리는 날씨라는 것이 장마라는 범주에 속하는 동일한 기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습기, 온도 등 날씨를 나타내는 여러 지표에 따라 매일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이러한 미세한 변화를 느낀 이후 이를 어떻게 회화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또한 이 무렵 신체의 감각에 더욱 민감하게 생각할 계기가 생기면서 날씨가 특히 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단순히 날씨의 영향으로 발생한 실증적인 결과,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날씨가 달라지는 미묘한 과정, 그것이 개인의 삶에 반영되는 과정 자체를 회화로 드러내 보고자 했습니다.
비는 셀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언젠가 비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오기 시작했을 때 웅덩이에 떨어지는 비를 세어 본 적이 있어요. 그 순간 제게 가장 많이 보이고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눈’과 ‘구름’도 ‘비’ 연작과 유사합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서 “네가 혼자 있는 것 같아도 항상 자연이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행동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성인이 되고서 어느 겨울, 첫눈을 맞고 있는데 그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마치 그때 내리는 눈(雪)에 눈(目)이 달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눈이라는 자연이 하늘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며 저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구름은 여러 종류의 날씨 중에서도 특히 그날의 감정 상태를 더욱 고양시켜 주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구름은 유난히 지역의 특성에 따라 모양이 현저히 다릅니다. 도시의 구름은 미세먼지를 머금어 형태와 색이 대부분 균일하지만, 시골의 맑은 구름은 더 웅장하고 부피감이 극적으로 상이합니다. 과거 어느 청명한 가을날, 기차 밖에 보였던 통통한 뭉게구름이 지닌 계절감에서 큰 감흥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 후로 뭉게구름을 볼 때면 동물이나 캐릭터의 얼굴을 빗대어 상상하는 순간이 많았고, 그런 인상에 영향을 받아 눈과 입을 가진 모양의 구름을 그렸습니다. 날씨에 관한 요소를 연구하다 문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매일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순식간에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서 바람을 기록하기 위해 ‘바람’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바람’ 연작은 실외에서 종이와 붓 혹은 펜을 활용해 바람의 움직임을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이를 회화로 옮긴 작업입니다. 바람의 움직임이 종이에 그려지는 과정에서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형태가 나타나는데요. 그래서 저는 이 과정을 무언가를 잡아 모은다는 의미에서 ‘채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연이 남기는 종잡을 수 없는 모양 그 자체가 지닌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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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바람’ 연작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다’, ‘채집한다’는 말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도구를 활용한 점이 두드러지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바람’ 연작은 어떻게 제작하나요?
A. 먼저 바람이 부는 시간에 A3 크기의 종이를 바닥에 놓고, 위쪽에 먹이나 유화를 묻힌 붓, 펜 등 여러 가지 도구를 줄에 매달아 둡니다. 줄이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흔적이 그려지도록 합니다. 이후 종이를 스캔하여 바람을 채집한 날짜와 시간, 채집에 소요된 시간, 채집한 장소를 제목으로 설정해 컴퓨터에 저장합니다. 이를 회화로 옮길 때는 저장한 이미지를 캔버스 크기와 비율에 맞게 확대하여 인쇄한 뒤 먹지로 윤곽을 그린 다음 채집 당시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재료로 채색을 합니다. 작업 초기에는 바람의 힘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재료인 마카, 아크릴, 오일 스틱 등을 줄에 매달아 활용했습니다. 모두 바닥에 긁히면서 다양한 모양을 낼 수 있는 재료죠. 채집 시간은 계절이나 절기에 따라 정하기도 하고, 그날그날의 감각에 따라 시간을 마구잡이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하루에 한 번씩 주관적인 기준으로 설정한 시간에 바람을 모으고, 그중 제 생각에 가장 아름다운 흔적이 기록된 종이만을 남겨 보관해요.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한, 두 시간까지 진행합니다. 습도가 비교적 높은 여름은 재료가 건조되는 시간이 길어 채집을 오래 할 수 있고 온도가 낮은 겨울에는 재료가 얼기 때문에 채집하는 시간이 짧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바람’ 연작은 바람을 그린 여러 작업 중에서도 봄에 그린 ‘춘분’ 연작입니다. ‘춘분’ 연작은 절기상 춘분에 매시 정각을 기준 삼아 바람을 채집해 그린 작업입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동일한 절기예요.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나누어질 때 하늘의 색과 바람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관찰해 보니 봄바람의 모양은 매 시각 다채로웠어요. 낮과 밤의 하늘 색은 각각 동일했지만 일출과 일몰로 인해 색이 급격하게 변하는 구간이 보이기도 했어요. 작업할 당시에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동안 오롯이 기록하는 과업을 스스로에게 주었는데요. 새삼 하늘의 풍경과 바람의 모양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체감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특히 ‘춘분’ 연작은 여타의 ‘바람’ 연작과 달리 드로잉을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트지와 아크릴을 사용했습니다. 흰색의 텅 빈 캔버스 위에 바람의 세밀한 형태를 보여주고자 윤곽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트 컷팅을 이용했고, 날씨 변화의 바탕이 되는 대기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부드럽게 표현되는 에어브러시로 아크릴을 칠했습니다.
Q.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요소를 도구의 도움을 받아 그림으로 그린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이나 모양을 활용하는 방식이 중요해 보입니다. 작가님의 전반적인 작업에서 어떤 의미의 도구, 도움이 활용되나요?
A. 저에게 드로잉은 일반적인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저는 제가 직접 만든 입체물, 혹은 도구의 도움을 받아 그린 그림을 드로잉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모든 작업에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그리기의 과정 중에서 그림자를 그리기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제 작업에서 그림자는 존재가 존재하는 순간을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소망의 정서를 내포합니다. 제게 그림자라는 건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또 형태나 색이 변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어딘가의 곁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대상입니다. 마치 부타데스의 그림자 일화처럼요. 이 일화가 사랑을 추억하기 위한 보조물, 연인의 부재를 눈앞에 현시하는 것으로 재현하기 위함이었다는 미학적, 문화사적 접근이 제가 그림자를 사랑하는 이유를 잘 설명합니다.
‘바람’ 연작 이전에는 회화를 위한 에스키스로서 종이로 입체물을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했습니다. 당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인터넷에서 저장한 새, 행성 등의 사진을 출력하여 이들의 원래 모양과 닮은 입체물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를 조명 아래에 두어 빛의 영향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의 모양, 색을 관찰했고 그 결과를 회화에 반영했습니다. 반면 ‘바람’ 연작에서 그림자는 철저히 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바람을 관찰하는 동안 가시화되는 실체가 없고 금방 사라질 수 있지만, 그것의 무게나 존재를 피부로 느끼는 찰나의 순간에 남겨지는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어요. 어떻게 보면 제게 드로잉이라는 것이 입체물에서 평면으로 바뀐 건데요. 입체물, 드로잉 모두 온전히 제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예측이 불가능한 지점이 반영된 방식이라는 점에서 각각 자족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회화에서 그 흔적을 이용한다고 생각하고요.
Q.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되돌아보게 된 생각이 있나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어떤 감상을 남기기를 바라나요?
A.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정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정원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방과 같은 비가시적인 장소입니다. 그곳에는 저마다 자라 온 만큼의 보이지 않는 시간이 내재해 있죠.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흔히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된다”고 푸념하잖아요. 하루 안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은 매일의 다른 차이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인위적인 개념이죠. 중선농원을 찾아주신 분들이 이곳에서 계속 변화하는 날씨를 관찰하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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