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하태임
Un Passage No. 241036 2024, Acrylic on canvas, 181.5 x 291 cm
하태임
Un Passage No. 243001 2024, Acrylic on canvas, 140 x 140 cm
하태임
Un Passage No. 243002 2024, Acrylic on canvas, 140 x 140 cm
하태임
Un Passage No. 241018 2024, Acrylic on canvas, 200 x 250 cm
하태임
Un Passage No. 241019 2024, Acrylic on canvas, 150 x 150 cm
하태임
Un Passage No. 241023 2024, Acrylic on canvas, 150 x 150 cm
하태임
전시전경
하태임
전시전경
하태임
전시전경
하태임, 강박적 아름다움에 관하여
인간에게 색은 무엇인가. 시선을 사로잡거나 마음을 빼앗기도 하고, 언어처럼 상징이나 기호가 되어 의미를 교환하기도 하는 색은 빛처럼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다 만나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물이나 자연처럼 물리적 실체인가, 아니면 빛에 의해 식별되는 감각인가. 과학에서 색은 사물 자체, 혹은 사물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빛의 객관적 속성이다. 철학에서는 색이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이나 정신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색은 물리적이면서도 정신적인 두 지점 모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의 색에 관한 연구는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20년 넘게 진지하게 색을 연구하였고, 1809년 ‘정신과 영혼의 상징화를 위한 색상환’을 통해 심리적인 언어로 색을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1) 1810년 『색채론』을 통해 색은 뉴턴처럼 광학이론으로만 접근하면 안 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까지 고려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세잔(Paul Cézanne,1839-1906)이 색을 ‘우리 뇌와 세상이 만나는 장소’라고 했던 말과도 연동된다. 즉, 정신과 경험의 접점으로서의 색이다.미술사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액션페인팅,색면추상 등으로 이어진 흐름 등은 인간의 색에 대한 예술의욕(Kunstwollen)와 표현충동의 충만한 전거들이다.
색의 현현(顯現)에 대한 많은 예술가들의 시도는 색을 드러내는 물질적인 과정에서부터 심리적인 표정과 맞닿는다. 같은 맥락에서 색의 형태이자 표현의 기호로 드러나는 예술가 하태임의 ‘색띠(colorband)’ 추상 작업은 색에 관한 일련의 미술사적 전거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강박적 아름다움(compusive beauty)’ 2)에의 심리적 욕망과 거세를 떠올리게 한다. 언뜻 보면 ‘색띠’는 ‘강박적 아름다움’이라는 미적이고도 심리적인 복잡성과 거리가 멀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왜 이렇게 아름답고 쾌적한 색채의 심상을 계속 만들어내는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유쾌하지만 절제를 통한 미적 추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절적으로 읽는 기회가 생겼다. “밝고, 쾌적하고, 간결하고, 분명하고, 반복적이나 리드미컬한” 이미지의 작업에서 색의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화사함’, 일련의 톤을 지켜내는 ‘투명성’, 한 띠가 다른 띠와 겹쳐도 그형태가 지켜지는 ‘완결성’ 등으로 하여 화면은 언제나 시각적 유쾌함으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 올도 벗어나지 않게 붓질을 해냄으로써 얻어지는 이 같은 단아한 ‘색띠’는 숭고하리만큼 고통과 쾌가 공존하는 정신적 긴장과 물질적 수행의 결과로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작가에게 색은 형태이자 언어로서 초기작업에서부터 최근 ‘색띠’ 작업에 이르기까지 조형적 질서와 심미적 표상의 균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실체이다. 이처럼 비정형적 색채 표현에서나, ‘색띠’에서나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조형적 균형과 심미적 쾌에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유전자에서부터 삶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고요한 긴장과 역동의 비계’가 수행됨으로써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문자나 언어는 지식 전달의 가장 큰 도구지만 진정한 소통의 단계에서 볼 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제가 파리에서 작업할 때 한글이나 알파벳을 화면에 투영시킨 작업을 한 다음 그것들을 지웠던 건 그 때문입니다. 문자를 그리고 지우는 행위를 하는 붓 터치가 정리되면서 컬러밴드가 나오기 시작했고, 귀국해서는 소통의 전달보다는 내면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 작가 인터뷰 中
침묵과 비정형 언어 1 : 이미지와 문자 기호의 색채 충동 1995-2004
하태임의 작업은 1995년 공식적 기록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가서 회화의 기초를 다졌던 작가는 1994년 프랑스 디종 국립 미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에 < Sans Titre > 도1)를 제작하였다. 이 초기 작업은 매우 직접적인 이미지와 기호가 등장하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색채 표현의 단초를 발견하게 한다. 사실적 묘사와 거리를 두고 붉은색을 화면 중앙의 넓은 면에 펼쳐놓고 좌우에 유기적인 남색과 검은 색으로 분할하는 추상 작업이다. 중앙의 붉은색 면과 오른쪽의 검은 색 위에 진한 푸른색 선으로 단순화된 사람의 얼굴이 기호화되어 나타난다. 왼쪽 상단으로부터 이와 유사한 초록색 선이 검은색을 품은 모양으로 자리해있다. 즉 불규칙한 세 개의 색면과 비정형의 두 이미지와 색채의 표현적 뉘앙스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누가 봐도 표현적인 정서와 추상 충동이 교차하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다. 한국에서 프랑스로의 이주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소통에 대한 단절의 경험을 갖게 했으며, 또한 쉬운 소통에 대한 간절함을 품게 했을 것이다. 붉은 색으로 뒤범벅인 중앙의 화면에 자리한 남색의 비정형의 얼굴선 안에 눈, 코, 입을 뭉그러트리듯 그려놓은 것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얼굴 자체가 기호이자 타자와의 단절을 암시한 명확한 선적 경계로 드러나 있다.
내면의 이야기를 차치하고라도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황만으로도 이 작업은 두 가지 명증적 사실을 확인시킨다. 첫째, 작가는 현실에 좌절된 경험 위에 소통을 위한 쉬운 언어, 이미지 기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둘째, 작가의 색채는 그대로 형태이자 내용인 특성을 가짐과 동시에 비정형적 형태와 색면이 중첩되는 양식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현재까지 그의 작업을 이루는 일종의 형식적 비계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내부로부터 외부를 향한 발언의 자세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의 작업에서 기호는 문자 언어를 크게 확대하거나 화면 전체에 패턴처럼 깔려 있거나 하는 경우로 나타난다. 1998년 그녀의 작업에서 주요한 타이틀로 등장하는 < Un Passage#2 > 도2)의 경우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에 주홍색 대문자 A가 상하로 마치 거울을 보듯 놓이거나, 같은 해 < Sans Titre > 도3)는 푸른 색 주조에 붉은색이 뿌려진듯한 표면 위에 검은색의 문자들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자 기호가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구체적인 변화를 맞이하는데 단순화된 기호로서 사각형의 중첩 형태로 드러난다. 사각형은 작가에게 심리적 비상구와 같은 회화적 통로일 수 있다.
2000년의 < Sans Titre >(194x130cm, acrylic on linen) 도4)에서 검은 바탕 위에 노랑과 초록이 뒤섞인 배경 가운데 대문자 P가 거의 화면 전체에 자리하고 다시 그 위에 사다리꼴의 진한 남색의 사각형이 자리해있다. 색면 분할과 전면의 색채라는 ‘색 위의 색’ 형식 실험이 구체화된 것이다. 2001년 표정이 있던 색면이 전체 화면에서 결을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 Sans Titre >(130x130cm, acrylic on canvas) 도5)의 상단은 초록으로 하단은 흰색으로 양분하고 그 위에 문자 기호가 나타나는 양상이다. 색면으로의 구분 그리고 기호의 위치는 예민하게 작동하는 시각적 감각에 의해 정해지고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 쾌적함에의 강박은 ‘습(習)’이 된다.
2002년, 2003년, 2004년을 지나면서 작가의 색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유기적 비정형성의 방향(< Les Traces >)이고 두번째는 색면 위에 색면이 기호와 함께 등장하는 양상(< La Porte >)이다. 이 시기 색채 표현 양상의 두 갈래가 치열한 심리적 공방전을 펼치는 때라 하겠다. 공통점이라면 분명한 색채 추상이다. 작가의 추상과 색채에 대한 의지는 전혀 다른 표현의 충동이나 심리적 대리 보충을 발원하게 하는데, 이는 보링거의 ‘추상충동과 감정이입’ 논의를 상기하게한다.
“만일 우리가 규칙성에 대한 동경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하학적 규칙성을 추구케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추상적 예술형식의 심리학적 발생 조건을 간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주장은 기하학적 형식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정신적, 지적일 것을 전제하고 있고 사고와 계산의 산물인양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순수한 본능적 창조력이다. 추상충동은 기하학적 형식을, 지성의 개입을 배제하고 본연의 내적 필연성을 통해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이 규치적 추상 형식은 인간이 세계의 무한한 혼돈에 직면함으로써 평정의 상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형식인 것이다.” 3)
보링거의 추상충동이 순수한 본능적 창조력이라는 주장은 규칙성과 비정형성의 두 양상을 동시에 보이는 하태임 작업에 대한 독해의 중요한 참조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보링거의 외계현상에 대한 범신론적 친화관계를 ‘감정이입’이라고 했던 것과, 외계 현상의 혼란과 불안의 상태에서 정신이 관조하고 평정을 찾는 것을 ‘추상충동’의 관점이라 했던 이분법을 하태임의 작업에서는 추상 내의 두 갈래로 적용하여 읽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예컨대 < Les Traces > 도6,7)의 작업들은 색채를 통한 ‘감정이입’으로, < La Porte > 도8)의 작업들은 ‘추상충동’의 양상으로 작가는 지독하게 색채를 통한 추상의 실험을 이어왔다. 이로부터 ‘색띠’가 2003년과 2004년 < Un Passage >라는 명제로 세 가지 타입으로 기인하였다.
밝고 명쾌한 색채의 수평과 수직으로 붓질을 그대로 평면에 고착시키는 방식이 그 하나이고, 강렬한 색채들의 유기적 붓질의 뒤섞임 혹은 자연발생적 언어처럼 꿈틀거리는 색채들로 뒤덮인 평면의 방식이 다른 하나이며, 마지막으로 기존의 색채 흔적들을 지우듯 규칙적 패턴의 붓질이 뒤덮인 형식이 세 번째이다. 결국 이 세 번째 양상은 내적 필연성에 의해 추동된 감정이입과 추상충동이 적층적으로 잠겨있는 작가의 ‘회화적 통로’가 되었다. 작가에게 그린다는 것이 다른 의미에서는 직접적인 언어적 소통 대신 침묵과 비정형의 언어로서 발언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그러한 추상으로서 발언이 자신만의 방언이 될 수도 있더라도 말이다.
예술의욕과 추상 언어 2 : 색의 적층과 소거의 반복 2005-2013
하태임 작가에게 추상은 내적 근원, 내적 필연성의 절대 언어이다. 2004년까지 드러난 작업의 세 양상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색과 형태로 보다 강력하게 실현된다. 먼저 2006년 안료가 전방위적으로 흩어진 전면 균질에 가까운 유기적 선들이 엉겨있는 화면은 < Une Porte > 도9)라는 명제 아래 분홍과 푸른 빛이 주조를 이루거나, 초록과 검은색이 어우러지거나, 노랑으로 검고 붉으며 초록인 바탕을 뒤덮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채의 표정은 비정형적 색들의 감김과 펴짐이 반복되면서 가장 안쪽의 색채를 지워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작업은 유기적 선들이 꿈틀대거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강한 표정을 지닌다. 한편 이러한 작업들과 다르게 이 시기 두 번째 표현은 수평과 수직의 색들의 적층적 구조, ‘색선’으로 드러난 방식이다. 2006년, 2008년 주로 제작된 이들은 < Une Impression > 도10)의 명제 아래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색선들로 화면을 평정한다. 선명하게 채색된 이들 선이 반복적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선들 간의 구분은 매우 명확하고 직선으로 구분되는 차분함이 있는가 하면 강렬한 색들로 정서적 생기를 뿜는다. 이렇게 매우 상이한 표현 양상이 한 시기에 시도되고 있다는 점은 작가 내면이 쉼없이 예술의욕과 추상 충동으로 구동되는 탓이리라. 세 번째 작가의 만곡 패턴에 이르는 논의에 앞서 이 상반된 양상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 보자. 다시 보링거를 관통하며 작가의 내면을 짐작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사실 하태임의 추상 양상을 보링거의 감정이입과 추상충동으로 투사하여 읽고자 하는 것은 그의 작업을 심리적 통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보링거의 이론은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의 ‘감정이입(Einfühlung)’과 알로이스 리글(Aloïs Riegl, 1858-1905)의 ‘예술의욕’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는 립스의 감정이입 미학으로부터 감정이입과 추상으로 구분한 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리글의 예술의욕 안에 감정이입 충동과 추상 충동이 잠재해있다고 인식하여 ‘감정이입과 추상충동’의 양대 축을 만들었다. 리글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충동의 형식으로 예술작품이 결과한다는 관점을 피력한 미술사학자로, 예술작품이 기인하게 되는 일종의 창작에 대한 충동이 바로 예술의욕이라 설파했다. 이는 립스, 리글, 보링거로부터 이어진 인간 내면에 자리한 창작에 대한 순수한 에너지로서의 예술의욕이며, 이는 ‘예술충동’을 제기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관점과도 연동된다. 보링거가 제기한 양극성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등장하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의미에 의존한 바 크기 때문이다. 니체는 예술충동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예술충동의 관계는 서로 대립되는 양상으로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양자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예술을 이루어내는 심리학적 통찰로 마주하게 하였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하태임의 중기 시기의 세 번째 양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작가의 < Un Passage >라는 명제 아래 특유의 탄력이 있는 두께와 곡면을 가진 ‘색띠’를 생성해낸 것이다. 작가는 이를 ‘만곡패턴’이라 하였는데, 앞서의 두 양상에 대한 심리적, 표현적 충동의 변증법적 형식이라 할만하다. 비정형 혹은 유기적 붓질 채색과 수직 또는 수평의 색선이 화해되는 것처럼 만곡의 ‘색띠’가 기인하는데, 앞의 양상들의 화학적 결합의 산물처럼 볼 수도 있다. 바닥에 가득 찬 색선들 위로 쌓고 또 쌓으며 평면의 깊이와 표면 아래로 다층적 직조가 가능해졌다. 색띠 작업들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건, 노랑색이거나 흰색을 다루거나 완벽히 작가만의 개성적 형식 언어로 등장하였다. 거의 2006년부터 2008년 사이 작가의 < Un Passage > 도11) 작업은 숨막히는 색띠의 적재로 화면 전체가 무거운 혹은 전면 균질 회화와 같은 쌓임과 펼침의 반복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2008년 이후 작업은 전체적으로 시간을 더해가면서 조금씩 무거우리만큼 밀도가 높았던 색띠의 평면에 흰색 하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시각적 무게를 덜어내는 여정을 거친다. 바탕의 어두운 색채가 거의 가려짐과 동시에 반복적 패턴으로 인한 리듬감과 색띠의 중첩들이 남기는 틈새가 평면의 표정을 만들어 내곤 했다. 이 같은 색띠 실험의 화면은 가는 선들 위에 흰 띠들이 등장하는 2012년과 2013년의 작업에서 바탕이 하나의 색채로 정리되는 것으로 이어지고, 만곡의 색띠들은 좀더 경쾌한 리듬을 만들며 강렬한 색채추상의 정점에 이른다. 아폴론적이 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충동이 내적으로 혼융되어 있는 이들 색선들은 바야흐로 몇 년간 크고 작은 변형들을 가하며 자신만의 추상언어로 도드라지게 이를 더 강박적으로 긴장하게 하는 길로 들어섰다.
“쇼펜하우어가 마야의 베일 속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해 하는 말은, 약간 벗어나가기는 하지만, 아폴론에게도 적용된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산과 같이 파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한명의 뱃사람이 자신이 탄 보잘것없는 조각배를 신뢰하며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한 가운데서 개개인의 인간은 개별화의 원리를 의지하고 믿으며 고요히 앉아 있다.’ 그렇다 그 원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그 안에 사로잡힌 자의 고요히 앉아 있는 자세가 아폴론의 형상 속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만곡패턴과 비선형 언어 3 : 고요한 긴장과 역동의 수행 2014-
“나의 작업의 주인공은 컬러밴드이다. 컬러밴드는 각각의 캔버스 위에서 마치 옥색 대양을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혹은 넘실대는 파고가 춤을 추듯 펼쳐진다. 반곡면의 컬러밴드들은 방향성과 수많은 차이를 수반하고 각각의 색들로 물들여져 삭막한 공간에 파동과 리듬감을 부여한다. 컬러밴드와 같은 제한적으로 단순 명시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회화적 역동성과 리듬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컬러밴드가 갖는 만곡 패턴의 비선형적 구성을 통해서 이다. 컬러밴드란 임의의 크기를 갖는 시각적 매스로 색면을 쪼갬으로써 얻을 수 있다.”
- 작가 노트 중
작가 스스로 색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공간을 가로지르는 파동으로 인한 회화적 역동성에 이르고 있음을 밝힌다. 2014년부터 작가의 작업은 이전 시기 구축된 색띠의 비계로 만곡패턴과 비선형의 추상언어를 고도화시킨다. 어떤 면에서 본격적인 회화의 수행적 구도로 향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에 시도하던 바탕 화면을 지우는 색채 대신 간결한 색면 위에 살아 숨 쉬듯 만곡의 시각적 매스들이 표정과 밀도로 움직임을 만들고 균형적율동은 정점에서 멈춘다. 고도의 역동성과 숨을 참는 호흡의 긴장이 파동을 만들어 한 곡의 음악이, 한 무대의 춤이 완성된 순간을 보여준다. 반복은 차이로 존재를 증명하듯 작가의 작업에서 색띠는 중첩하면서도 투명하게 겹쳐진 색들의 실체를 확인시킨다. 선명한 스침과 만곡의 시각적 균질함이 고도로 숙련된 수행적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다. 작가의 고도로 예민해진 시각에 맞춰 만곡패턴은 긴장의 통로를 한 구간, 두 구간 이어가며 그 정점의 순간에 도달한다. 보링거의 추상충동이나, 니체의 예술충동이 내적 필연성의 심연 또는 심리적 통찰에 이르고자 한 어느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 Un Passage >라는 명제로 일관된 작가의 화면은 화면을 날아오르는 적당한 두께와 움직임의 색띠가 가져다주는 시각적인 정제와 정련을 거친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수없이 반복하는 색띠들의 작업을 온몸으로 그려내는 강박적, 수행적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의 작업들은 만곡패턴을 중심으로 보면 다채로운 색띠로 결합되는 방식과, 제한된 색띠로 결합되는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컨대 2017년 < Un Passage No. 171002 > 도12)와 같은 작업은 색띠들이 거침없이 사방에서 얽힌 구조를 띠며 시각적으로 다채로운 한편 복합적 심리를 투사하고 있다. 이와 상반되게 2023년의 < Un Passage No. 231013 > 도13)의 경우는 정적인 가운데 역동적인 호흡을 드러내는데 색띠가 수평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방향으로만 표현되어 명상적이라 할 만큼 섬세한 순간을 보게 한다. 물론 이들처럼 극단으로 복잡한 경우와 극단으로 간결한 작업 사이에는 이를 넘나드는 다른 경우들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다섯가지 색들 미만이 사용되는 경우와 그 이상이 선택될 경우 색띠의 결합 방식이 확연이 달라지며, 이는 작가의 심리적 작용과 맞닿은 색채임을 인지하게 한다. 최근 들어 이 같은 팽팽한 시각적 긴장과 균형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균열을 내는 작업이 등장하기도 한다. < Un Passage No. 231005 > 도14)나 < Un Passage No. 234021 > 도15)과 같이 균질하고 매끈한 바탕에 얼룩의 흔적처럼 색띠들과 바탕에 혼성적 부분을 탑재한다. 이제 조금씩 긴장과 균형의 화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넣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95년부터 작가의 작업은 추상과 색채의 비계 위에 유기적 비정형이나 만곡패턴의 비선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황홀의 순간을 만들어왔다. 초기 작업에서부터 ‘색띠’의 정련되고 정제된 강박적 형상은 고도의 정신적 수행임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색이 충만해지면 형태가 되는 세잔의 회화처럼 작가는 색을 통한 지각과 행위가 그대로 형태이자 이미지 언어가 되는 시간을 지나왔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지나치리만큼 강렬하게 색을 온마음과 온몸으로 만나고 느끼며 ‘색띠’를 통해 발언하고 소통한다. 몸을 쓰는 것이 온통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고요하고도 깊은 심리적 긴장이 그대로 ‘색띠’에 스며들어 있다. ‘색띠’의 탄력과 유연함은 작가의 리드미컬한 언어로서 찾아진 것으로, 이를 마주하면 긴장이 만들어내는 강박적 섬세함과 절제 위에 경쾌하게 부유하고 집적하는 행위가 보인다. 지금도 그와 같은 시각적 감각과 쟁투를 벌이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팔을 길게 뻗어색을 올릴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렇게 끝없이 ‘아름다운 가상’, ‘강박적 아름다움’의 시각적 균형과 쾌적함을 찾았던 것이다.
1) 괴테는 주관적 세계와 항상 연계되어 있는 색채는 주관적인 ‘생리색’으로부터 중간단계의 ‘물리색’, 그리고 가장 객관화된 ‘화학색’의 3단계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화학색은 노랑·파랑·빨강·주황·녹색·보라의 6가지 색으로 구성된다. 이 6가지 색은 인간 내면과 각각의 방식으로 관련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자(글), 장희창 번역, 『색채론Zur Naturwissenschaft im allgemeinen』(괴테전집 12), 민음사, 2003
2) 할 포스터(Hal Foster)의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는 1995년 MIT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초현실주의 미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체적 읽기를 제공하며, ‘언캐니(uncanny)’ 개념을 환기시켰다. 할 포스터가 초현실주의 미술에 부여한 이 문구,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을 하태임의 ‘색띠’에 내재된 심연의 욕망과 거세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심리적 기제를 담은 용어로 이 글에서 차용함을 밝힌다.
3) Wilhelm Worringer, Abstraction and Empathy-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 Translated by Michael Buuock, Martino Publishing Mansfield Centre, CT, 2014, pp.84-85
4) Friedrich Wilhelm Nietzsche, “Die Geburt der Tragödie”,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nden,
Giorio colli/Mazzino Montinari, Bd, 1, Walter de Druyter:Berlin, New York, 1980, p.28
1973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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