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디지털 문명과 아날로그적 가치의 기록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선은 조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윤곽을 규정하고 공간을 구획하여 원근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선은 동양회화에서 특히 주목받아 독특한 조형관과 심미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른바 동양회화의 특징을 ‘선에 의한 예술’이라 설명하는 것은 선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형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양회화에서 초기의 선의 기능은 주로 인물의 외형과 옷 주름 표현에 집중되었다. 이른바 의습선의 표현은 유려한 선에 의한 부드럽고 우아함을 강조하는 춘잠토사(春蠶吐絲)의 유사묘(流絲描)에서 비롯되어 선의 강약과 동세를 표출하는 난엽묘(蘭葉描) 등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점차 그 내용이 풍부해지고 조형적 경험이 축적되었다. 이후 오로지 선만으로 조형을 완성하는 백묘법(白描法)에 이르러 선의 발전은 일정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선의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는 서예에서 축적된 풍부한 운필의 경험이 회화에 유입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른바 서화동원론(書畫同源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동양회화의 선은 서예를 통해 획득된 원필붕봉(圓筆中鋒), 순면이철(純綿裏鐵) 등과 같은 심미적 가치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수묵 제일주의의 사조에 따라 동양회화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작가 이기은의 작업은 선에 의한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다. 드로잉은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드로잉 역시 점차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아 가고 있는 추세이다. 작가의 작업은 수묵을 이용한 드로잉이다. 당연히 수묵의 맛과 모필 특유의 심미적 내용들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그의 선은 앞서 거론한 동양회화에서의 선의 발전과정과 일정한 연계를 짐작케 한다. 모필을 통한 수묵드로잉, 혹은 선을 이용한 수묵 심미의 발현 등은 모두 전통과 일정한 연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은 중봉의 원칙을 기본으로 강약을 구분하고 완급을 조절하며 선에 의한 화면 구성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선은 흔들리며 작가의 호흡을 반영하고, 순간적인 선택을 통해 수묵의 흔적을 남긴다. 인물, 혹은 대상의 외형은 존중하지만 그것에 반드시 얽매이거나 구애됨이 없는 자유롭고 분방한 운필이 돋보인다. 이는 극히 아날로그적인 표현인 동시에 다분히 전통적 가치에 충실한 것이다.
작가는 이에 더하여 기계적인 선을 도입하여 일종의 대비와 충돌의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재봉틀을 이용한 균일한 규격과 일정한 간격을 지닌 선의 도입이 그것이다. 이는 기계적인 선이다. 그것은 모필에 의한 아날로그적 특성과 가치를 무색케 하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것이다. 전통적인 모필의 선이 선 자체의 심미적 표현을 넘어 작가 개인의 사상과 감정, 나아가서는 인품까지 반영한다는 전통적 선의 심미에서 보자면 가히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선의 도입이다. 이에 이르면 작가의 화면은 평범한 전통적 가치의 연장선상에서의 해석이 돌연 무색해 진다. 이질적인 형상과 가치의 병열에 따른 충돌과 대립은 일종의 긴장을 형성한다. 그것은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대립이자 충돌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선의 심미를 현대라는 시공에 노출시킨다. 파격적이다.
주지하듯이 현대를 규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변화이다. 그 변화는 속도를 동반한 빠른 것으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물질을 통한 아날로그적 문명의 발전은 이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문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기계문명의 절정에서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는 점차 상실되거나 훼손되고 있다.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대립과 충돌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를 통한 변화, 혹은 변혁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 상황에서 작가는 다분히 인간적인 모필에 의한 선과 엄숙한 기계적인 재봉질에 의한 선을 대비, 충돌시킴으로써 이러한 문명 상황에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읽혀진다. 그것은 동서의 만남이자 충돌인 동시에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이다. 디지털화 한 격변의 현대라는 시공에서 확인하는 전통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망실되어 가는 인간적 가치의 흔적들을 기록하는 것이 바로 작가 작업의 핵심인 셈이다.
한 작가의 작업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작품이라 함은 개인의 창작인 동시에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에서 전해지는 전통과 현대,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충돌과 융합은 어쩌면 문명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장치 우리가 마주해야 할 문명의 한 단면을 예시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성적인 기계적 효율의 디지털적 가치와 인간적인 아날로그적 감성의 대비의 화면은 그래서 단순한 드로잉의 확장을 넘어 또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오늘이라는 시공이 그만큼 급변하고 있고, 이러한 가치의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인가가 망실되고 있는 것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은연중 전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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