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모란미술관 기획전 ⟪사물로부터⟫
2025.04.22 ▶ 2025.06.29
2025.04.22 ▶ 2025.06.29
전시 포스터
정현
전시 전경(제4전시실)
고근호
쓰레기반가사유상 2024, 페지, 바다쓰레기, 84x36x47cm
이용덕
전시 전경(백련사 대웅전)
김신일
전시 전경(제3전시실)
이순종
전시 전경(제1전시실)
김유정
전시 전경(제5전시실)
정현
전시 전경(백련사)
사물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최태만/국민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사물은 말없이 세계에 개입하고, 인간과 더불어 의미를 생산한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이 전시는 조각가와 물질의 관계를 주체와 객체의 구조로부터 평형의 구조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한 발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가는 무생물의 재료를 변형, 가공하여 작품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은 단지 예술가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까. 만약 물질이 세계를 구성하고 의미를 생산한다면 인간의 창조적 행위의 결과인 예술은 존립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물질을 넘어 모든 존재하는 것, 즉 사물에 대한 성찰로 인도한다. ‘사물로부터’는 사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존재론적 검토로부터 출발한다.
형상과 질료의 존재론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조각은 흙·밀랍·나무·돌·금속 등의 물질을 가공하여 구체적인 구조와 형태를 지니도록 제작하여 공간을 점유하는 삼차원의 입체이다. 물리적 실체의 기본 구성요소로서 아직 구체적인 형태를 갖지 않은 상태의 재료나 원료를 물질(material)이라고 한다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실체로서 원자·분자·고체·액체·기체·플라즈마 상태의 물질을 질료(matter)라고 부른다. 이 질료가 형상화된 것을 사물(things)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중요한 개념인 형상(μορφή, morphē, form)과 질료(ὕλη, hyle, matter)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존재의 본질과 그 근거를 탐구하며 형상과 질료의 개념을 분석했다. 한편 『자연학(Physics)』에서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는 형상이 사물의 본질, 즉 ‘무언가를 그것답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질료는 형상이 구현되는 물리적 토대나 가능성을 지닌 물질이라고 했다. 질료가 잠재적인 가능성이라면 사물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οὐσία, ousia, being)인 형상은 현실성을 의미한다. 예컨대 조각가의 손에 의해 비생명의 물질인 대리석이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구현되었다면 그 조각상의 형상이 대리석을 현실화했다는 논리이다. 색채, 음향, 경성(硬性), 양감 등은 사물의 질료적 요소이며, 질료로서의 사물이라는 이 규정성 가운데는 이미 형상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감각적이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므로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모르페라고 한다면 어떤 사물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이도스(εἶδος)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사물은 모르페를 통해 현실세계에 드러나지만 그것의 사물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에이도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동시대 조각에 대입시키기에는 어느 정도 제한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조각이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나아가 조각이 의미 없는 사물이 아닌 한 형상과 질료의 개념으로 조각의 특성을 분석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인 실체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고 했다. 이런 점을 주목한다면 형상과 질료의 개념은 동아시아에서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인 음양(陰陽)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형성적이며 사물의 밝은 측면과 창조적 측면을 나타내는 양이 형상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수동적이고 잠재적인 가능성의 상태인 음은 질료에 상응한다. 그런데 조각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삼차원의 공간이다. 조각은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 내에 공간을 지니기도 한다. 물리적 실체인 조각의 공간은 닫힌 것일 수도 있고, 열린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 공간은 채워진(positive) 것이기도 하고 비워진(negative)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조각에서 형태와 물질, 공간은 서로 무의미하게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도구와 사물, 사물다움
조각은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물질의 구성체로서 크기와 무게를 지니므로 사물(object)에 해당하지만, 책상이나 의자처럼 기능을 지닌 것, 즉 도구라기보다 심미적 목적을 위한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각에서는 물체가 불러일으키는 미적 요소인 덩어리(mass), 양감(volume), 동세(movement), 질감, 빛 등이 중요한 조형요소를 차지한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실체만을 사물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너머의, 우리가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를 ‘물자체(Ding an sich)’라고 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 전체도 사물이며, 심지어 신(神)까지도 스스로 현상하지 않는 사물, 즉 물자체와 같은 종류의 사물이다.
사물을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과 물자체처럼 물리적 실체는 아니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론을 발전시킨 철학자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였다. 모두 세 장으로 구성된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하여」의 제1장 ‘사물과 작품’에서 도구와 예술작품의 차이를 언급하며 사물에 대한 철학적 인식론을 예술작품의 해석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는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를 예로 들며 ‘예술작품은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자와 존재를 개시한다’고 했다. 작품 가운데서 개시하는 것은 탈은폐이며, 여기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생성된다. 예술 가운데서 존재자의 진리가 정립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에 대해 ‘예술은 진리의 작품 가운데로의 자기정립이다’고 했다. 제2장 ‘작품과 진리’에 이어 제3장 ‘진리와 예술’에서 ‘작품-속으로의-진리의-정립’에는 진리가 정립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란 이중의 의미를 숨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체와 객체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했다. 이 모순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붙임말(後記)에서 논지를 더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진리가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라면 작품 속의 정립된 진리가 다시 진리를 작품 속에 정립할 것이다.
사물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존재와 시간』(1927), 『예술작품의 근원』(1935-36)에 이어 1950년 바이에른 예술아카데미에서 가진 강연 ‘사물’(Das Ding)에 이르러 네 개의 중요한 요소(das Geviert)란 개념으로 발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간과 공간의 모든 거리가 축소’된 현실에 직면하여 하이데거는 ‘가까움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사물로서 사유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물인 항아리를 예로 들어 항아리의 사물적 차원은 흙과 같은 재료가 아니라 그것의 비움을 통해 항아리임을 드러낸다고 했다. 즉 물이나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능력(기능)이 항아리의 본질이 아니라 비어있음, 물과 인간, 하늘과 땅, 신과 죽은 자 등의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 방식이 ‘항아리의 존재방식이다. 또한 항아리로부터 (포도주를) 쏟아붓는다는 것은 나누어주기(schenken)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철학자 김형효는 이 나누어주기를 항아리의 물성이 보시(報施)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렇게 자신을 쏟아붓는 과정에서 하늘과 대지, 인간과 제신의 관계가 상호 형성되는 사중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부음의 선사에는 하늘과 땅, 신과 죽은 자들이 동시에 머문다. 이처럼 사물은 땅, 하늘, 신성, 인간이란 세계를 이루는 네 가지 근원적 존재방식이 모이고, 얽히고, 발현되는 장이다. 이 모이고 얽히고 드러나는 것은 화엄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포섭하고 서로 투명하게 침투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와도 상통한다. 나아가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물(物)이 물화(物化)한다’(das Ding dingt)는 것은 사물이 고정된 고체와 같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기(性起)의 관계와 같은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화엄적으로 말하여 마치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있는 인드라망의 보석들이 서로서로 ‘반/짝’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영하고 있듯이, 이 세상의 사물들이 상호 조영(照影)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물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건대 우리는 이러한 잠정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존재한다. 세계는 끊임없이 스스로 열어 보이지만 인간은 이 조용한 드러남을 종종 놓치거나 지나쳐 버린다. 사물은 언제나 거기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지 사용하고 소모하는 대상으로만 여겼다. 사물은 단순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물이라고 할 때 인간도 사물에 해당한다. 그것은 물리적 실체로서의 나의 신체뿐만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은 ‘격물(格物)’과도 만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으로부터 비롯한 격물이란 개념은 ‘사물의 이치’를 일컫는다. 이 개념은 훗날 남송대의 주희(朱熹)에 의해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러 나의 지식을 극진하게 이른다’(格物致知)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물이란 무엇인가? 주희는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 ‘천도가 유행하여 (만물이) 생기고 자라나니, 천지 사이에서 소리와 형상, 질감을 갖는 모든 것들이 바로 (物)이다’고 했다. 그러나 물은 단지 지각가능한 실재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마음이란 물이 몸을 주재하는데 그 체(體)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다. 주희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에 입각하여 ‘인간의 마음은 사물에 닿아(卽物) 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窮理)으로써 각성된다’고 했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은 주희의 주지주의적 이학(理學) 사상을 비판하며 마음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제창하였다. 왕수인은 주희처럼 의(義)·심(心)·신(身)·가(家)·국(國)·천하(天下)의 대상적 존재를 물이라 파악했으며, 성(誠)·정(正)·수(修)·제(齊)·치평(治平)의 행위적 사실을 사(事)라고 봤다. 이처럼 동아시아적 사유체계에서도 물은 단순히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시의 제목이자 주제이며 지향점인 ‘사물로부터’는 지금까지 짧게 훑어본 철학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위치와 이치’에 더 주안점을 둔다는 점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하기 위해 빌려온 개념임을 밝혀둔다. 그러므로 이 전시에서 사용하는 사물은 물질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비롯하는 사건까지 탐구하는 물리(物理)와도 상응하는 개념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 전시의 핵심 개념인 사물은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며 형태와 크기를 가진 구체적인 대상(Object)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거나 비물리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서 사물(Things)을 의미한다, 예컨대 무생물, 생물, 추상적 개념이나 현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개념 속에 포섭할 수 있다. 조각에서의 사물과 재료에 대한 탐구는 단순히 물질을 주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물로부터’는 이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이 조각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사색에 있음을 드러낸다.
궁극적으로 이 전시는 전통적인 장르 개념으로서의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서 비물질의 가능성까지 추구하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과연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로써 ‘사물로부터’는 질료에 깃든 가능성과 생동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형상과 본질을 현실화하는 창조적 개입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 전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각 작품이 지닌 의미의 영역이며, 전시는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물다움에 대한 조각적 응답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사물을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땅과 하늘, 신과 인간이 모이는 자리로 보았다. 그에게 사물은 세계를 모으는 것이며 존재를 여는 하나의 방식이다. 『화엄경』 또한 모든 존재가 서로를 비추고 포섭하는 인드라망과 같은 구조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음양이론은 이분법적 분리가 아니라 거울처럼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작용을 통해 우주의 운행 원리를 설명한다. 마음은 영혼의 산물이 아니라 몸이 작용한 결과이다. 사물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사용을 기다리는 수동적 물건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지닌 또 하나의 세계이다. 한 점의 먼저, 하나의 부서진 조각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우주의 무게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고립되지 않고, 전체와 연결된 세계로 존재한다.
모든 사물은 말 없이 세계에 개입하고, 인간과 함께 의미를 생산하며, 이 세계를 다시 구축한다. 인간과 사물은 수평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흐름 위에 서 있는 이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사물들의 내밀한 소리와 자신들의 ‘있음’을 보라는 요청에 귀 기울인다. 그래서 이 전시는 인간 중심적 창조 행위를 넘어서서 하이데거가 말한 ‘내맡김(Gelassenheit)’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것은 예술을 위해 예술가의 의지를 관철하기보다 사물 스스로가 존재를 드러내도록 매개하고 돕고 자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고근호는 생명평화 미술행동에서 활동하며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폐품이나 재활용품에 주목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배출하는 택배 상자는 재활용되거나 환경 쓰레기로 소각될 수 있지만 그는 그것을 쉽게 작업이 가능한 재료로 파악하여 종이상자로 미륵불상과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구세주에 비견할 수 있는 미륵불은 우리나라 민간신앙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부처로서 지역에서 민불(民佛)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민불이기 때문에 불상의 기본적인 도상만 갖추었을 뿐 투박한 비례와 형태를 지닌 것이 대부분이지만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어서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고근호는 종이상자를 이어붙여 민불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민중들의 생활도구였던 방망이, 흙벽을 미장할 때 사용했던 흙손, 몽당빗자루, 나무 국자, 호미, 목수들이 사용했던 먹줄 등과 함께 무안지역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파편들을 붙였다. 결국 미륵불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사물에는 이것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시간이 녹아있다. 이 작품에서는 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부처와 만나 존재를 회복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김신일의 <오색사이-마 0.6초--2024-1>은 작품의 가장 가운데에서 마음이란 글자의 첫 자음인 ‘ㅁ’으로부터 시작한 기하학적 형태가 일정한 두께로 외부로 확장하며 평면에 깊은 공간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두께를 형성하는 아주 가는 띠가 지닌 다섯 색상은 우리의 시선을 혼란시키는데 정작 이 가는 띠의 색은 재활용센터에서 프레스에 압축된 깡통이나 알루미늄 캔에서 추출하여 사진을 아크릴에 압착하는 고급 프린트 기법인 디아섹(Diasec)으로 재현한 것이다. 아주 납작하게 압착된 폐기물이라는 ‘쓸모를 다 한 것’ 속에 숨어있는 색태와 에너지를 발견한 것은 ‘재생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오색의 띠가 만들어내는 결은 ‘인간의 생리작용 시간을 제외한 12시간을 초로 환산한 숫자’와 겹쳐진다. 옵아트의 일루전 효과를 활용하여 한글의 자음이 일정한 모듈을 지닌 채 확장하는 이 작품은 마음의 지층이자 우물이라 할 수 있다.
김유정의 <흐르는 숨>은 버려진 가구를 자연을 바라보는 창이거나 그것을 배양하는 인큐베이터로 되살린다. 나무와 창에 비친 식물의 이파리, 그리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빛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침투하며 사물에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한다. 가구의 틀로 만든 반투명의 창으로 경험하는 빛의 파장과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마음의 진동과 같은 것이며, 사각형으로 연결된 빛의 정원은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거주하는 장이기도 하다. 사물과 빛, 소리가 어우러진 이 설치작업에는 비물질적 서사와 정서적 풍경이 함께 자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억과 감정의 잔상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도 한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조각의 볼륨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위반한다. 볼룩 튀어나온 것이 실제로는 오목하게 들어간 음의 공간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지각체계가 환영(illusion)에 의해 얼마나 지배받고 있는가를 깨닫게 만든다. 역상조각에서 빈 공간은 관람객이 움직일 때 이미지도 따라 움직이며 오목에서 볼록으로 바뀌는 시각효과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이 비어있는 공간은 하이데거가 은유를 떠올리게 만든다. 즉 항아리의 ‘비어있음’이 항아리의 사물로서의 본질인 것처럼 빈 공간은 단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이 거주하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비어있음은 나눔(보시)이 아니라 보는 것을 유도 또는 작품 가까이 다가와 보도록 유혹한다. 비어있다는 것은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으로 나타나는 그의 공간은 존재자끼리 자유로운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이순종은 생활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다이소에서 구입한 주방용품들을 조립하여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병과 컵을 쌓고, 그 사이에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된 그릇, 집게, 뜰채 등을 연결한 아상블라주 구조물은 매미와 같은 곤충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거룩한 낭비>란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인 과도한 낭비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거룩한 낭비’는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에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낭비’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싸기 때문에 흥청망청 낭비하는 것은 풍요라기보다 결핍과 빈곤의 대리 충족이며, 거룩한 낭비란 결국 거룩한 폐기물의 사원을 짓는 행위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잘 오시네>에서처럼 식기류와 같은 소비재가 제기(祭器)로 변모하며 제의적 차원을 획득하기도 한다. 대량생산된 평범한 사물은 작가가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어 입주작가로 활동할 때 난 산불 현장에서 주운 불에 탄 나무토막과 함께 놓여 신성함과 일상성을 교차하며 존재의 깊이를 열어 보일 뿐만 아니라 전시공간을 제의공간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정현은 여수 앞바다의 장도에 있는 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생활할 때 매일 섬 주변을 산책하며 파도에 휩쓸려 둥글게 닳은 형태의 돌과 파도에 부서져 표면이 예리한 작은 돌들을 수집하였다. 입주작가의 시기를 마치고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온 후 그 돌들을 바라보던 그는 남서울미술관 개인전을 계기로 시간에 의해 마모되거나 혹은 파괴된 돌에게 새로운 시간을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인 돌은 3D스캐닝에 의해 터무니없이 거대한 크기로 확대되었으나 그 물질은 스티로폼이기 때문에 부피에 비해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이렇게 확대된 돌은 마치 선돌이나 토템처럼 우뚝 서서 하늘의 정기를 땅으로 전달하며, 그 주변을 두 개의 둥근 돌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입체로 구성한 삼면화(triptych)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작품이 놓인 장소는 작은 돌이 애초에 있던 장소를 떠나 낯선 장소에 거주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공간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 전시는 사물로부터 시작해 인간과 사물이 엮어내는 세계의 내적 운동을 탐구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화엄사상의 ‘사물 하나가 전체를 담는다(一卽多 多卽一)’와 인드라망과 같은 연기적 세계관, 성리학의 격물 사상, 나아가 사물의 주체적 생동력과 행위성을 인정하는 신유물론을 가로지르며 사물이 더 이상 도구이거나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생성하는 능동적 주체로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전시제목2025 모란미술관 기획전 ⟪사물로부터⟫
전시기간2025.04.22(화) - 2025.06.29(일)
참여작가 고근호, 김신일, 김유정, 이순종, 이용덕, 정현
초대일시2025년 5월 9일 금요일 오후 4시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휴관
장르조각, 설치, 드로잉 등
관람료성인: 10,000원
남양주시민(성인): 8,000원
청소년(중/고등학생): 6,000원
어린이(36개월 이상~초등학생): 5,000원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경증장애인: 6,000원
중증 장애인, 동반자 1인: 각 5,000원
미취학 아동: 무료(36개월 이하 / 보호자 동반 필수 / 단체 X)
장소모란미술관 Moran Museum of Art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 (월산리, 모란미술관) 모란미술관)
기획최태만(국민대학교 교수)
주최모란미술관
주관모란미술관
연락처031-594-8001
1966년 출생
1971년 출생
1974년 출생
1953년 서울출생
1956년 출생
1956년 인천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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