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아
Rest metal threads, stainless steel, 90x90x120cm, 2008
김형관
more than this # colored plastic on paper, 180x118cm, 2009
구명선
왜 말 안했어(Why Didn_t You Say That) Pencil on Paper, 31x43cm, 2007
장파
식물들의 밀실(A secret Room of Plants) oil on canvas, 194x259cm, 2008
구명선
만화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그런 검은 회화다. 연필로 그려진, 채워진 그림이다. 어딘지 묘했다. 익숙한 만화적 도상과 영상적 연출로 이뤄져 있지만 묘한 긴장감을 암전처럼 전달하고 있었다. 마치 빛 바랜 영화의 한 장면이나 스쳐 지나가는 환각적이고 몽상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또렷하고 명료한 이미지에 반하는 온통 흐릿하고 몇 겹으로 떨리고 있는 그러한 장면이 소녀 캐릭터를 극화하여 몽상적 나르시시즘을 연출하고 있다.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소녀상이 좀 더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뾰족한 코와 날카로운 턱 선, 그리고 긴 팔과 마른 몸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 부위가 그렇다. 그녀의 그림에서 사실 눈은 부재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짝이는 별처럼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만화 속 여자들은 한결같이 눈이 창문처럼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얼굴에 비해 과도하게 큰 그 눈은 모든 줄거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왜 소녀들은 반짝이는 눈들을 가지고 있을까? 작가는 연필선 들의 음영을 미세하게 조절하여 여러 겹의 실루엣으로 이른바 블러효과(blur)를 내거나 캐릭터와 캐릭터의 감정상태를 만화 속의 번개기호처럼 기호화하거나 연필선 들을 넓고 두텁게 그었다가 지워서 먹물이 퍼진 듯한 느낌으로 그려내는 듯 연필이라는 매체만이 낼 수 있는 다양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작가는 원하는 형체를 얻기까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9개월을 견뎌야 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검정색의 변화로 감정이나 정서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가의 연필화는 정서적인 기억화인 셈이다. 인물들은 왜곡되어 있다. 그림 속 소녀들은 눈만을 강렬하게 반짝인다. 아니 눈은 없고 빛이 보석 같은 그 빛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빛은 오히려 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별처럼 , 불빛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눈, 어디론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 가늘고 메마른 나신은 성적환상을 불러일으킴과 함께 몽롱한 동경의 감정을 발산하고 있다. 그것은 모호하지만 막연한 정서의 세계에 강력히 기대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낭만이나 본능이나 환상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와 예술에 상투적이고 더없이 소박해 보이는 그 낭만을 선사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순정만화 속 소녀캐릭터나 영화나 아바타의 얼굴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눈 없는 얼굴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동경이나 낭만을 빨아들이는 텅 빈 구멍 같은 것이다. 그런 기이하고 매력적인 드로잉이다.
박영택(미술평론/경기대교수)
조현익 - 에로스와 타나토스,욕망의 이중주
침대 위에 마구 흩트려져 있는 여성의 머리카락. 그 여성은 흡사 메두사 같고 팜므파탈 같다. 둘 다 유혹과 처벌이 합체된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화신들이다. 여성을 매개로 한 조현익의 작업은 삶과 죽음,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상호 작용하는, 인문학의 숨 막히는 한 지점을 예시해준다. 작가는 아예 관을 도입하기도 하는데, 실제의 관에 비닐을 깔아 방수 처리한 다음, 그 안에 물을 채우고, 모델이 드러누워 포즈를 취하게 한 것이다. 흡사 <햄릿>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여주인공 오필리아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유산을 계승한다. 낭만주의 그림에서 오필리아의 주검은 마치 물속에 잠겨 영원히 잠든 것처럼 묘사되며, 여기서 물은 혼돈과 여성성(아니마), 죽음과 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작가는 여성의 주검 위에 피(희생제의와 죽음을 상징하는)와 정액(재생을 상징하는)을 뿌려 그 신화적 의미(여성은 신성한 혼돈을 상징한다는)를 완성한다. 여성 자체라기보다는 자연과 주술, 욕망과 무의식을 상징하는 이 여성들을 매개로, 작가는 어쩌면 신성한 혼돈을 복원하고 재생시키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획은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감성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 감성주의로 명명할 수도 있겠다. 고충환(미술평론)
김윤아 - 공간에 그리는 드로잉
A lover may bestride the gossamer
That idles in the wanton summer air,
And yet not fall; so light is vanity.
사랑을 하는 사람은 변덕스러운 여름날에 바람에 흔들거리는 거미줄을 타더라도 떨어지지 않을 게야. 연인과 사랑은 그만큼 가벼운 것이거든.(Shakespeare, Romeo and Juliet)아아, 사람의 인연은 하늘에서 미리 짜놓은 줄에 서로 연결되고 엮이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미리 짜여진 모양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황석영 『바리데기』중에서)작품의 인상은 그러했다. 허나 자신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허약해 보이는 존재감, 공간을 점유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가벼움, 3차원의 범주에 속하기를 머뭇거리는 덩어리 같지 않은 덩어리, 그럼에도 모질고 질기게도 얽히고설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인연처럼 김윤아의 작품은 결핍의 신체를 공간과 빛에 의탁하며 삶을 타진한다. 하여 그것은 공간에 그린 드로잉처럼 보이거나 혹은 허상인 그림자를 통하여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불완전한 존재로도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그림자를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더 용이할 때도 있다. 그림자는 존재의 일그러진 이미지일 뿐 존재판단의 절대명제가 될 수 없음에도 그 관계는 역전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허구와 허상인 예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 드러내듯이, 가벼운 존재와 그 그림자의 관계를 엮어 우리의 고착된 시각을 반성케 하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유근오(미술평론)
김형관
2005년경부터 테이프로 평면작업을 시작한 김형관은 2007년부터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조합한 일명 ‘테이프회화’를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온갖 테이프로 짜인 테이프회화는 그 자체로 앗상블라쥬이다. 그러나 테이프 앗상블라쥬는 정교한 현실이미지 재현에 의해 이미지 앗상블라쥬로 전환되는 기묘한 상황이 된다. 이것저것을 이어붙이거나 포장 마감재로 활용되는 테이프의 속성을 회화적 개념으로 차용한 그는 현실에서 소비되는 다양한 이미지(철거되는 집, 벽돌 담, 대문, 다세대 주택의 2층 난간들, 이승복 동상, 만화 캐릭터, 개, 플라스틱 의자, 탁자, 놀이터의 기구들, 불타는 숭례문, 고가다리, 풍선, 꽃, 사람들…)들을 앗상블라쥬하는 것이다. 참으로 다양한 테이프의 색상만큼이나 현실이미지의 사실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이 초현실적 풍경은 그런 두 가지 상황, 즉 테이프의 색과 현실이미지의 사실성이 빚어내는 하나의 역설일 수 있다. 2010년 한국사회의 현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파괴되고 지워지고,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타워팰리스나 ‘휴먼시아’를 부르짖으며 탄생하는 신도시와 아파트의 이면에는 쉽게 붕괴되는 달동네가 있고, 명품의 삶을 직조하겠다는 대기업 건설자본주의는 지금의 현실을 부정할 때만 가능한 반현실적 꿈을 유포시키지 않는가. 김형관의 테이프회화는 화려하고 쾌적해서 때때로 그것들은 우리를 어떤 낙원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 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세계는 결코 그렇게 낙원과 만나거나 낙원으로 형성될 수 없는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 세계란 낱낱이 아름다운 인공물의 세계일뿐이다. 바로 그것, 테이프회화가 빚어내는 테이프의 인공적 물질과 현실적 재현의 그 부조리가 김형관이 던지는 의문이고, 미학이다.
김종길(미술평론/경기도미술관 학예사)
장파 - “가혹한 그리기 혹은 아름다운 인생”
젊은 작가 장파의 그리기 방식은 80년대부터 독일과 서구에 유행처럼 번졌던 신(新)표현주의에 근접한다. 거칠고 가히 폭력적인 그리기 방식으로 우리는 요르그 임멘도르프나 줄리앙 슈나벨 등의 작가들을 연상할 수 있다. 형식과 더불어 내용상에서도 장파는 원초적인, 그래서 사회적인 문제로 개념 포장될 수 있는 병리학적 현상을 그려낸다. 이것은 마치 80년대의 신 표현주의가 유사 신화나 상징적인 조형언어로 당대의 사회를 - 이것을 시대정신(Zeitgeist)라고도 한다 - 투영하는 것처럼, 장파는 가정 내에서의 은밀한 폭력구조를 환유하는 방식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재현한다 함은 그가 대상적인 이미지를 그린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지닌 심리적인 자극으로 유도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표면의 장식적인 미에만 집착하는 현재의 신진작가들과는 달리 나름의 의식적 심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장파가 탐구하는 인간의 본질에는 폭력이란 개념으로 읽혀진다. 그렇다고 작가는 그것을 피가 낭자한 네거티브 스펙터클로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의 그림이 전하는 정서는 오히려 내밀하고 조용하다. 마치 키리코와 같은 초기 초현실주의자들의 침울함을 보는 것처럼 - 그리고 그것은 약간 무섭고 스산하다 - 실존주의적인 측면도 갖추고 있다. 폭력은 언급한 대로 환유적인 방식으로 서사적 구조를 띠고 출연한다. 식물과 동물의 폭력적 관계나 문명과 자연과의 관계 등으로 치환되어 있는 이 대립 항들을 가지고 초조한 화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대립 항에 내재된 본질적인 갈등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분류가 조장한 폭력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폭력적 상황에 대해 침묵하거나 강제로 인고해야 그 현실 속에서 작가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역적으로 역할을 바꾸는 그런 모순된 사회구조를 읽어내고 있다. 그의 그림이 말하는 이런 암울한 상황에는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절망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간헐적으로 삐쳐 나오는 일탈의 욕망이 그런 감정의 균형을 맞추어주고 있는 듯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비문명적(야만적이라고 할 것을 에둘러 말했다)으로 보이는 원색적 배경이나 불안하게 조성된 구도 그리고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 장면에 개입되는 느닷없는 이질감은 아직 더 인생을 경험해야 할 작가에게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안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능란하기에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그런 경지에 가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그의 그림에서 맡을 수 있는 생생한 폭력의 냄새가 신선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겪었을 그리고 지금도 유지되는 심리적 혹은 정신적 고통이 덜어졌으면 하지만, 그것이 현재는 그의 작업의 가장 좋은 동기로서 작동하기에 조금은 더 연장되었으면 싶다. 나의 가학 성이 또 다른 폭력으로 작가를 누르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의 변명도 더하면서.
김정락(미술사학)
1981년 출생
1981년 서울출생
1978년 충남 천안시출생
불안 해방 일지 Anxieties, when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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