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ssom
2010.09.17 ▶ 2010.10.10
2010.09.17 ▶ 2010.10.10
전병현
나무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90.0x72.7cm, 2009
전병현
나무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50x150cm, 2009
전병현
나무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50x150cm, 2009
전병현
나무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80x170cm, 2008
전병현
길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12.1x162.2cm, 2010
전병현
오솔길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00x100cm, 2009
전병현
오솔길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00x100cm, 2009
전병현
눈 속에서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200x200cm, 2009
전병현
세한도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50x150cm, 2009
전병현
숲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50x150cm, 2008
전병현
정물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12.1x162.2cm, 2010
전병현
정물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62.2x130.3cm, 2010
그가 없는 세상에 너와 내가 있는 풍경
내가 불쑥 묻자 그는 대뜸 대답했다. “오로지 색으로 남고 싶다.” 내 질문은 그저 지나칠 양이지 곧이곧대로 답을 구한 게 아니었다. 옛 시에 나오기를, ‘산중 스님의 하루는 차 석 잔에 저물고/ 어부의 평생은 오직 외가닥 낚싯대’라 했다. 에둘러 이 구절을 읊고 나서 ‘화가 전병현의 생을 압축한다면 뭐가 되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의 즉답이 단호해서 놀랐고, 나온 말이 ‘색’이라서 뜨악했다.
나는 그를 ‘색의 화가’로 기억한 적이 거의 없다. 그가 건넨 몇 권의 도록을 다시 뒤적여 봐도 반신반의다. 데뷔 시절의 음울한 사실주의 화풍은 소멸하는 빛이 형상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잔재한다. 그 빛은 색으로서의 발언을 주저하면서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90년대의 작품은 어떤가. 미망과 착종의 흔적이 난무하되 그의 터치와 제스처는 안타깝게 몸부림치며 색을 삼켜버린다. 색의 몸뚱어리가 비로소 전면에 등장한 것은 뒷날 정연한 단색조 화면에 와서다. 그 색은 빛이 흡수, 투과, 반사한 결과일진대, 이 또한 눈을 찌르는 원색과 거리가 멀다. 당시 평자들은 그의 색을 ‘입히는 색’이 아니라 ‘벗기는 색’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니 그의 컬러는 ‘컬러풀’하지 않다. 흰색은 물러나려 하고, 푸른색은 가라앉으려 하고, 검은색은 묵언에 들어간다. 색동의 엷은 띠와 점이 종무소식인 화면에 그나마 표정을 심어줄 뿐, 각막을 흔드는 화려함은 눈 씻고 봐도 안 보인다. 그의 전작들이 무릇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색’이라 했다. 하여 돌이켜본다. 그가 ‘아는’ 색은 내가 ‘보는’ 색과 다른가.
앞당겨 말하고자 한다. 내가 본 것이 잘못이고 그가 아는 것이 맞다. 내가 본 색은 모양 밖에 덧씌워진 빛깔이었다. 그가 아는 색은 모양 안에 숨은 기운이었다. 하여 그의 색은 발현하기보다 잠재한다. 그 잠재된 기운은 존재의 실감을 애타게 간구하며 출렁거리지만, 그의 색은 칠해서 될 일이 아니라 물들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스며들어 물든 색은 들뜨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소재와 불목(不睦)하지 않고 동화된다. 그의 근작들은 화목한 색들의 내심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내 앞에 작품 <숲>이 있다. 그 길로 내가 걸어간다. 서리 뒤덮인 가을 숲, 힘겹게 잎을 매단 여윈 나무 사이로 발길을 돌리자 나는 하얀 사내가 된다. 잎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사내도 하얗다. 벌거벗김의 낌새가 두려운 나무들마저 하얀 빛에 머잖아 젖어들 운명, 가을 찬 서리는 온 숲을 점령할 기세다. 엄습하는 이 추상(秋霜)의 기운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숙살(肅殺)! 그렇다, 만물을 시들게도 마르게도 하는 ‘고요한 죽임(silent killing)’이다. 걸음걸이 하나 없이도 숙살의 기운이 온천지에 스며든다. 적막하다 못해 격절된 느낌인지라 외톨이 사내는 길 아닌 길로 접어든다. 화면은 거무죽죽해지는 황토와 금방이라도 천지를 거두어 갈 듯한 백색으로 차 있다. 거기에 옹글게 서린 것이 서릿발이다. 하여 말할 수 있다. 서릿발의 기운, 그것이 <숲>의 색이다.
듬성한 나무 사이로 연기가 드세게 피어나는 <가을숲>은 어떤가. 먼저 온 길손 둘이 부러진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운다. 잎사귀에 묻어나는 단풍색은 울긋불긋하지만 호기를 부리기에는 이미 철이 기울 즈음이다. 늦가을의 수풀은 단풍이 풀 죽은 모습이고 사람이 지핀 연기만 오롯하다. 한랭한 기운은 바닥에서 스멀거리다 연기를 따라 치밀어 오른다. 한랭한 기운과 입김처럼 새나오는 미연(未燃)의 자취, 그것이 이 그림 속의 색이다. 계절이 바뀌어 어느 새 겨울, 이제 <세한도>를 본다. 그가 눈을 그릴 땐, 조선 후기 화가 우봉 조희룡과 추사 김정희를 떠올린다고 말한 적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평담하지만 깊숙한 지경이 보인다. 눈송이 날리는 둔덕에 침엽수와 활엽수 두 그루가 서있다.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뒤덮을 듯 하염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나무는 세한의 시린 맛을 되새긴다. 하지만 움츠리지 않는다. 나무는 서로 어깨를 겯는다. 음향이 소거된 화면처럼 내리는 눈은 소리가 없고, 나무를 윽박지르지 않은 채 오히려 축복인 양 감싼다. 그림에서 눈은 녹지 않는 흰색이다. 찬 기운을 만난 대기 중의 수증기가 강고한 색의 결정체로 존재를 드러낸다. 위에서 본 세 그림들은 하나같이 색을 성급히 구현하지 않는다. 또한 나대거나 현혹하지 않는다. 색은 스스로 그렇게 태어난 듯 보는 이를 설득한다. 그림의 질감인들 다르겠는가. 그가 쌓아올린 질감은 자연의 살갗이자 민낯이다. 눈으로 더듬어보는 이와 결코 갈등하지 않는다.
그의 색감과 질감은 어떻게 나오는가. 그는 여러 차례 작업 공정을 밝힌 바 있다. 그의 입을 빌어 다시 요약해보자. ‘나무 모양, 꽃 모양 등 갖가지 형태를 흙으로 빚은 뒤 석고를 부어 틀을 만든다. 석고틀 위에 물에 이갠 닥종이를 부어 말리면 한지부조로 사용될 기초 형태가 나온다. 캔버스에 이 부조를 나의 구상대로 찢어 붙이고 황토를 바른다. 그 다음 조선백자의 유백색 느낌이 나는 돌가루를 입히고 먹과 안료로 색을 낸다. 마지막에 목탄으로 선을 그린다. 모든 과정이 자연미를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바닥 재료는 제대로 봐야 보인다
덧붙여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나의 춘추전국 시절인 30대에 극사실과 색면추상과 사군자를 다 해봤다. 그 가운데 일관된 요소가 있다면 우리의 감성, 우리의 소박미, 우리의 풍류였다. 그것들을 재료 기법 사유, 삼박자에 버무렸다. 내뱉지 않고 스며드는 수묵화의 성질, 그리고 요철이 드러나는 한지 부조의 음양을 늘 마음속에 둔다. 속이 비어있어도 강고한 형태감이 지탱되는 이 작업이 나는 좋다.”
작업과정을 들어보면, 그의 그림은 물이 있고 흙이 있고 돌이 있고 나무가 있다. 이것들은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고, 성분 그 자체로 남아있기도 하다. 성분이 성질을 조성하고 성질이 외양을 좌우한다. 풍경을 그리되 자연의 성분과 성질과 외양이 조형성과 겉돌지 않는 것이 그의 미덕이다. 그는 ‘모든 과정이 자연미를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자연의 조밀함과 공소함을 눈여겨본다. <숲>에서 숲의 빽빽함에 숨통을 터주는 하얀 길은 그의 말에 따르면 ‘바람구멍’이자 ‘그림의 눈’이다. 그러니 그는 풍경의 거죽만 그리는 것이 아닌 셈이다. 그 거죽에 어룽진 풍경의 성질과 문양을 잡아내려 애쓴다. 북한산의 활엽수를 그려도, 국립수목원의 자작나무를 그려도, 지리산의 산벚나무를 그려도, 겉은 안과 따로 놀거나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겉볼안’인데, 나무와 꽃과 바위와 파도의 골기가 영락없이 희노애락의 표정과 닮는다. 이는 그의 마지막 공정에서도 보인다. 그는 형태를 목탄으로 그은 선으로 마름질한다. ‘선’이라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준(皴)’이다. 동양화에서 윤곽을 구분하는 구륵처럼 동원된 그의 선은 엄밀히 말해 ‘라인(line)’과 다르다. ‘준’은 손등이 얼어터지거나 주름이 잡힌 상태를 뜻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곧 피부의 결이 준이다. 줄기를 그리고 잎을 그리고 바위를 그리는 그의 준은 자연의 살결과 표정을 되살리는 지혜로운 방편이다.
글. 손철주(학고재 주간)
1957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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