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Net 설치,합사, 255X205cm, 2010
이창훈
empty 설치, DVD 프로젝션 5대_11’ 35’’, 가변크기, 2010
이창훈
벽-epilogue(부분) 캔버스에 아크릴, 130X194cm, 2010
이창훈
조용한 풍경 fine art print, 70X110cm, 2010
이창훈
Babelstreet fine art print, 90X127cm, 2008
이창훈
A City 단채널비디오_5’ 57’’, 2007
이창훈
Open Studio-獨水空房 작가의 작업실, 물, 보트, 1150X830X350cm, 2009
림보에 갇힌 그림자
이병희(갤러리정미소 아트디렉터)
얼마 전에 영화
이창훈의 작업들을 일별해보면서, 나는 현대 주체를 특징지어 온 의심하고 성찰하는 이성적 의미의 주체상을 넘어, (들뢰즈적 의미를 빌어서 이야기하는) 시간의 종합 혹은 반복으로서의 ‘현대의 시간성’을 ‘우연적으로’ 경험하는 훨씬 분열적이고 복합적이며 post-human적인 주체상을 상상해 보았다. 물론 그것은 지금의 상징적 구조의 변화를 골치 아프게 야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창훈의 작업 중, 걸어가는 사람의 뒤통수에 비디오를 장착하여 그 사람의 뒤 풍경을 기록하는 작업인 (비)가시적인(싱글채널비디오, 2006), 개와 개에 비유된 한 남자가 곳곳에 설치되고 그 남자가 스스로를 반영해보도록 거울을 설치한 작업인 <나, 개, 거울, 그리고 나>(혼합설치, 2003), 종이로 만든 돌과 자연석을 나란히 병치시키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돌’인가를 질문한 작업인 stone,(stone)...(테이블위에 설치, 2004) 등은 때때로 정체성을 질문하고, 무대화시키는, 즉 반영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주체의 조건에 대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내가 보기엔 주로 (죽은, 시든, 사라지는, 상실되는) ‘흔적’에 대한 작업들로 볼 수 있는 작업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종의 반복으로서의 우리 삶 혹은 시간성의 측면에서 조망된다. 가령 비디오 작업인 화분이 서서히 시드는 영상을 길거리 창가에 프로젝션 한 작업인 춤(DVD프로젝션, 2004),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스크린에 자막이 서서히 올라가고 빛이 없는 블랙 화면만 남는 장면처럼 새의 이름이 승천하듯 자막처럼 올라가도록 만든 날아가다(비디오설치, 2004), 실제 꽃잎들이 시들어가는 것을 전시한 <채집> (꽃잎들, 2004) 등을 비롯하여, 0(혹은 無)에서 시작하여 0(혹은 원)으로 끝나는 부질없는 우리 삶을 주사위 게임에 비유한 작업인 게임(모니터와 사진 설치, 2005) 에서는 주사위가 구르고 구르다 (마치 영원히 굴러야할 것처럼) 둥글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사람 모양의 초들(즉 군상)을 전시장에서 태우고 난 흔적들을 전시함으로써(애초에는 타 들어가는 과정까지 전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엔) 일종의 폐허처럼 보이게 한 <창조>(양초, 2008, 설치) 등은 전시 자체가 ‘어떤 사건의 잔재 혹은 그 흔적’으로 제시된 작업들이다. 영상 작업의 특징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기억이나 자취 등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 있다.
이 작업들은 ‘흔적’을 가시화 시키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경험케하고, 미래적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을 암시하는 작업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시간성’에 대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보는 것은 결국에는 어떤 흔적들이다. 즉 관객의 시간에서 보자면 이들은 과거의 산물인데, 그것을 경험하는 관람이란 행위는 이 과거란 것이 어떻게 현재에 침투되어왔는지의 과정을 추적케 하는 과정이다. 때로 어떤 흔적들은 ‘죽음’의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반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것 까지도 암시되기도 한다. 즉 관객의 경험은 (여타의 사건들의) 흔적들, 그 흔적에 이르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미래적으로도 반복될 가능성 모두가 공존하는 시간대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시간성을 전진하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반복하는 의미에서 주목한 경우 이창훈의 작업 중에서 1999년의 <계획된 사각-partⅨ>에서도 보인다. 그는 건물 사진을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개월에 걸쳐서 한 장씩 꺼내었다. 빠르게 도시화되어가는 ‘건설’의 이미지는 진보주의적인 미래를 향한 시간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진 이미지는 자연(땅속)에 의해 훼손되고 파괴되어 간다. 즉 이 훼손된 사진-이미지는 회상이나 트라우마적 느낌을 줌으로써 쇠퇴의 시간성을 보여주고 관객은 그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시간성은 이창훈의 작업(뿐만 아니라 현대의 여타의 매체들)에서는 비교적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2006, 2007년 스틸 사진을 활용한 싱글채널비디오 작업인 <무제>, <리베라 메>, <걷다> 등을 보면 작가가 영상매체를 주로 시간매체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이들에게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의 착시효과랄까, 착각, 판타지 등으로 매개되는 ‘우연성’이 특징이 됨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스틸 사진 컷들을 반복해서 돌아가게 함으로써 (주로 고대의) 어떤 (부동적인, 고정적인) 동상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마치 근대 초기 시간의 기록으로써의 사진의 탄생이나 실험영화에서처럼 일선형적인 시간성을 활용한 테스트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누가 보는 자이고, 누가 찍는 자이며, 어떤 것이 대상인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었다. 관객, 촬영(작가 혹은 매체), 대상 사이의 우연한 조우를 도출해보고자 한 것이 특징적이다(사실 나는 이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의 우연은 의도한 우연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트라우마의 흔적들로서의 무의식, 환상 등까지도 매개하면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 착각, 혹은 매체적 오류 등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여타의 사진, 비디오, 혹은 미술이라는 매체에 관람이란 요소가 어떻게 매개되는가에 따라 그 매체의 특징이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비매품이지만 유일하게 ‘판매된’ 작업인 <비매품>(캔버스에 아크릴, 2005)은 ‘빗나간 조우’이지만 ‘과녁을 맞힌 듯한’ 우연한 계기가 아닌가 싶다.
현대의 매체들이 하고 있는 이 역할 속에서의 주체상은 일종의 반복에 얽혀있는 주체상이다. 그/녀는 반복은 의심과 불안이 그 원동력이다. 물론 근대 이래로 그/녀는 의심과 반성의 주체였지만, 바로 그 의심의 대상이며 핵심이었다. 그/녀는 결코 의심으로부터 어떠한 확고부동한 상징 혹은 의미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의미망들로부터 미끄러질 뿐만 아니라 의미망자체가 어긋나게 된다. 아무리 상상적, 환상적 구성물로서의 상징적 질서 혹은 의미망으로 자신을 편입시켜본들, 또다시 그로부터 미끄러지고, 그 구성물은 해체를 거듭하며 괴상망측한 하이브리드가 되어간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실패한 채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이 반복의 사슬에 메여있는 것이 바로 분열된 현대 주체의 초상 자체이다. 그래서 현대 주체는 불완전함을 향유하는 자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를 림보에 갇혀있다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그/녀는 림보의 시간에 갇혀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림보가 아닌 어떤 상태에 있다는 망상이나 환상을 믿다가, 배반당하기를 거듭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싱글채널비디오, 2007),
(Babelstreet), (조용한 풍경), (A city), (net). 이번 개인전 “타인의 방”에서 (벽)과 (empty)와 같은 영상 설치 작업에서는 벽을 쌓는 그림자가 주인공이다. 물론 이 그림자는 주체의 반영으로서의 타자의 상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어설프거나 어딘지 불완전한 자이다. 어쨌거나 이 그림자의 역할은 반복해서 끊임없이 벽을 쌓는 “타인의 방”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정미소)벽에 (그림자)벽을 쌓는다. 심지어 관객이 들어서야 할 정미소 갤러리 공간의 문마저 막아 버린다(입구). 그런데 결국 텅 빈 공간과 벽만 남는 설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다름 아닌 벽을 쌓던 그림자라는 존재이다. 벽을 다 쌓고 나자 그림자는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닌, 전시장(혹은 방)에 있는 것도 아닌 채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애초에 벽을 쌓던 그림자는 그림자였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사라질, 사라지는, 또 다시 사라질 존재였다. 과연 그는 탈출 혹은 비상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영원히 벽을 쌓는 존재로, 벽에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다. 이 갇힌 존재가 탈출하는, 혹은 호명받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속한 개별의 그림자가 되거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다른 질서 속에 속하거나 일 것이다. 즉 우리가 (지젝을 빌자면) 좀비 상태에서 벗어나기, 혹은 림보로부터 탈출하기는 새로운 상징적 질서로의 호명이거나 그 림보 자체가 질서가 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1971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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