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227x145.5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162x97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162x97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162x97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117x80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73x53cm, 2010
황순일
Take One oil on canvas, 73x53cm, 2010
황순일
Take Several oil on canvas, 162x97cm, 2010
황순일
Extreme Sweetness oil on canvas, 50x91cm, 2010
황순일
Extreme Sweetness oil on canvas, 91x91cm, 2010
황순일
Take a Bite oil on canvas, 117x65cm, 2010
황순일
Fresh! oil on canvas, 162x130cm, 2009
황순일의 근작들 “위험한 달콤함, 거부할 수 없는 욕망 너머”
금세라도 터질듯한 탱글탱글한 표면의 다홍빛 토마토나, 속살을 훤히 드러내 흥건한 과즙이 녹아내리는 듯한 딸기는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의 유혹이다. 겉껍질에 허연 당분이 베어나는 포도송이들은 알싸한 단내로 후각을 동요하고 침샘돌기를 흥분시킨다. 포크에 찍힌 열매들의 속살은 과즙을 흩뿌리며 곧 싱싱함이 탐닉당하는 순간임을 증거한다. 스푼 가득히 흐물대며 녹아내리는 홍시는 입안에서 식도를 타고 가도 좋을 만큼 과도하게 뭉그러져 촉촉한 반액체의 상태로 있다. 쪼개진 열매들 사이로 흐르던 흥건한 즙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엷은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간다.이처럼 황순일의 근작들은 탐스런 과일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달콤함의 재현을 뿜어낸다. 보는 순간 탐하고 싶은 과일들에의 욕망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들 가운데 하나인 식욕을 자극시키는 섬세한 리얼리티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작가 특유의 재현적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된 열매들의 표현은 ‘실재 같은, 너무나 실재 같은’ 형상성으로 하여 ‘낯익은 생경함’으로 이끈다. 이는 매끈하게 반사된 표면효과 탓인지, 실제의 것보다 확대된 크기 탓인지, 과일들의 탱탱한 겉표면이건 녹아내릴듯한 속살이건 말라져가는 순간이건, 과일의 본성을 넘어서는 감지체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득 작가의 재현물에서 기인하는 고즈넉한 실재성의 표면 아래 유동적 실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마치 나르시스 수면의 그것처럼. 나르시스가 하염없이 바라보며 빠져들었을 연못의 수면은 늘 그렇듯 고요하지만, 수면 아래 생명체들의 작은 움직임들이 헤집어 놓았을 이미지의 흔들거림은 평정을 되찾음과 동시에 동요를 수반하는 반복적인 과정들의 연속이다. 즉 작가의 재현물은 존재의 투명한 지시물이거나 대리물이라기보다, 존재의 본성과 마주치게 하는 역동성을 은닉한 정적인 장(static field)과 같다. 이는 가장 지독한 고독인 생명 멈춤의 순간에 잠재태의 리얼리티를 정박함으로써 경박한 제스처를 따돌리며 고요 속 동요의 사색으로 이끈다.
리얼리티에의 응시, 정신적 치유로서의 재현
먹어 해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과일의 재현물들은 대상 너머 주체의 욕망과 소거를 맥락화 한다. 황순일에게 회화적 표현 혹은 재현은 언제고 주체와 관여되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린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작가의 말은 분명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의 내적 필연성의 강한 표명처럼 들리듯이 말이다. 철저하게 내부로부터의 성찰과 현실에의 비판적 참여가 화면의 주체로서 자리하는 작가의 재현물은 지시적 자기동일성으로부터 자기부정을 오가며 리얼리티의 은유와 상징으로 거듭나곤 했다. 그와 같은 리얼리티의 시각화에는 회화 본연의 대상성과 이미지 구성 그리고 재인식의 카타르시스를 체험케 하는 내밀한 구조화가 틀지어져 있다. 리얼리티에의 응시로부터 좌절당한 욕망의 허무한 실체를 드러내려는 그의 재현은 일종의 정신적 치유의 과정과도 같다. 설명할 길 없는 왜곡된 환영들이 언어로 환원되어 발화되자마자 증Á정신허공에 산화해버리는 것과 같이 그는 이미지로 재현함으로써 일체의 상황을 털어내는 까닭이다.
이러한 작가의 재현에의 습성은 초기 팝적인 리얼리티의 재구성으로부터 나타난다. 1990년대식 삶의 리얼리티는 날카로운 현실적 참여의 민중미술도 식은 지 오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패러다임이 만연한 상황이었다. 작가는 아카데미의 추상적 대세보다는 리얼리스틱한 테크닉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여체와 같은 구체적 대상에의 재현에 자신을 몰입하던 작가는 차용과 전사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구성적으로 드러내며 1999년 첫무대에 선다. 이 시기 <잔상-Chaos>시리즈에 나타난 그의 재현은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들과 함께 소리와 공간의 몬드리안적 평면으로 장착되었다. 견고하게 구획된 내부는 현실과 단절된 파편적 이미지들로 채워지고 표피적인 포르노그라피나 스피커의 형상은 주체의 상실과 절박함을 들추는 단서들로 작용한다. 2000년 내부로 점점 침잠해 들어가는 그에게 음악은 현실에서도 화면에서도 가장 큰 위안이자 희망이었을 터다. 공간의 시각적 위엄보다, 공간의 청각적 지배를 염원하는 그의 제스처들은 스피커들의 중첩적 형상화를 통해 드러났다.
작가가 현실적 단서를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숭고한 리얼리티의 재현에 이르는 자신의 언어를 찾게 된 것은 2003년경이다. 날이 선 현실은 사람들을 기로에 서게 했고 때때로 익숙한 현실의 일부를 앗아가곤 했다. 자본에 의해 도살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묵묵히 견디던 어느 날, 전봇대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웅크린 쓰레기 더미를 목도한다. 이미 쓰임을 다하고 내동댕이쳐진 그것의 운명이 마치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는 뜻밖의 경험은 작업에서의 생생한 리얼리티의 재현으로 이끈다. 이것이 육고기를 통해 희생과 물질에 의존한 인간 삶을 재현하기 시작한 계기이다. 고기는 인간의 살에서부터, 감각적인 욕망을 내포한 대상이며, 모든 고기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낯선 어둠속에서>연작은 화면 안쪽 견고한 스피커로부터 날카로운 현실로부터의 비명을 에코로 울려 퍼지게 하고, 죽은 핏빛의 살코기와 뼈는 황량한 사막위의 고독한 주검으로 클로즈업된다. 정지된 생명성에 시간의 경과까지도 예민하게 포착한 그의 고깃덩어리는 썩어 들어가는 동물성의 악취를 담고 미끈거리며 녹아내리는 살갗들을 드러낸다. 더할 수 없이 확연한 이 사실성은 닭의 우둘투둘한 살갗과 부풀어진 마디에서 부패함의 흔적마저도 경이롭게 만든다. 이처럼 주검의 고깃덩어리를 우울하고 허무한 시대적 리얼리티의 알레고리로 제시함으로써 갑작스러운 지인의 죽음과 직면했던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궤를 받아들이게 된다.
감각적 혹은 에로스적 욕망의 재현
육중한 동물성의 살점들이 주체가 된 정지된 생명의 순간은 딱딱한 겉 표면의 게, 시들어가는 과일들, 바스락거리듯 말라비틀어진 호두, 마늘, 양파 등의 바니타스 화면들로 이어졌다. 처음 그렸던 고기들에서 뿜어졌던 무게감을 덜어내며 대상들은 다소간 소멸해감의 재현을 예민하게 드러내는 듯 보인다. 투명한 자기지시를 넘어선 그의 이미지들은 죽음의 과정들을 의미하는 것들이나 점차 식욕을 자극하거나 생기가 사라진 것의 감각적 재현으로 보여진다. 즉 짙은 바탕의 스피커로부터 울려 퍼지는 장중한 음들과 꺼져가는 생명성의 재현으로 이루어진 2005년과 2006년경의 작업들은 분명 주체의 죽음에 관한 연속적 메시지를 의미화한 것이었지만 보는 이들은 식욕과 감각의 기억을 환기한다. 그럴수록 형상과 배경의 선명한 명암대조로 재현을 극대화함으로써 사라져 감의 의미를 강하게 스포트라이팅 하고, 어두운 배경 속 주체의 의식적 지표로 작용했던 스피커도 소거시켜 바니타스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는 정적과 고요 그리고 허무의 뉘앙스가 연극적 무대 위에 시들어가는 키위와 체리, 석류와 포도, 감과 피망 등의 대상들을 배치하여 죽음의 과정을 구체화한다.
이는 더욱 또렷이 형상을 각인하는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리얼리즘적 효과로 하여 죽어가는 과정보다 대상 자체에 눈을 돌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보는 이들의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의 표상은 결국 작가에게 욕망하는 인간의 행위방식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게 한다. 단내를 머금은 열매의 형상들은 식욕 혹은 성욕과 같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 욕구의 대상으로 드러난 감각적 재현물이다. 열매들의 즙으로 유발되는 욕구는 상품 자본주의적 생리와 부합한다. 작가에게 상품적 가치는 욕망적 대상화로 구현될 때, 즉 싱싱함의 가치로 제시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작가는 열매들로부터 매력적인 ‘상품’이자 신체성을 드러낸 ‘몸’에 대한 조명을 구체화한다. 열매들의 상품성은 즙이라는 유기체적 속성에 의해 판단되며 가장 즉각적인 반응으로서 욕구와 소유의 대상화로 절정에 달한다. 작가에 의하면, 이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은 일련의 물리적 과정을 수반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 ‘위반’과 ‘일탈’도 자행되는 것이 그 본성인 것이다.
작가의 에로스적 욕망의 대상물로 재현된 과일들은 그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의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전 화면들이 어두운 배경으로 바니타스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과는 다르게 근작들은 밝아진 배경으로 대상물의 농염한 상품성을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죽음이 아닌 욕망을 향한 작가의 이같은 선택은 관조자적 시선을 넘어 스스로 화면의 대상물에 탐닉하는 주체의 행위가 강조된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화면을 활력적으로 부각시킨 형상의 구체성, 생생한 빛깔의 과일들은 머지않아 시들거나 말라비틀어져 그 상품적 가치도 소멸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예정된 일이다. 육류나 해산물에서와 같이 과일들은 열렬한 욕망과 도살, 그리고 부패와 소멸에 이르는 허무한 욕망에의 여정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렇게 그의 과일들은 달콤하지만 곧 사라질 운명의 비극적 유혹의 제스처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과일은 모든 정물화에 나오는 주요한 모티프로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한편 관능적이고 곡선적인 형태와 쉽사리 부패하는 성질 때문에 부정적인 뜻을 지시할 때도 있다. 과일은 바로크시대 언어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의미의 양가성을 갖는다. … 쉽게 썩는 성질은 바니타스와 관련되며, 과일에 나타난 시간의 경과는 죽음과 부패를 환기시킨다.”(최정은,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한길아트, 1998, 235-236면)
2010.10. 박남희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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