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창
침묵-어머니 캔버스에 유화, 145.5x112.1cm, 2010
송 창
침묵-검버섯 캔버스에 유화, 182x91cm, 2010
송 창
침묵-박제된 침묵 캔버스에 유화, 182x91cm, 2010
송 창
마모된 침묵 캔버스에 유화, 100x72.7cm, 2010
침묵으로 찌르기
김진하 / 나무 Artist's Space 대표, 우리미술연구소 품 소장
송창의 근작은 인물화다.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이르는 미술용어다. 기록이나 기원을 위한 암각화에 등장한 사람으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일 게다. 신을 인간의 몸과 얼굴로 그린 중세 회화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근·현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물화는 인간의 모습과 거기에 깃든 정신을 포착해왔다. 특히 현대미술에서는 인물의 감정이나 정서에 좀 더 치밀하고 섬세하게 접근하면서 화가의 내러티브를 반영해왔다. 일테면 등장인물의 성격을 간단하게 단편화시키거나,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그 형상의 왜곡·생략·과장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정신 상태를 복합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미술에서의 인물화는 사람의 외양을 그린 단순한 초상그림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작가의 의식·무의식이나, 그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황 표현으로 심리적 징후나 사회성까지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빠져드는 인물화의 매력이자 매혹은 이 것 때문이다. 그동안 인물은 별로 그리지 않았던 송창이 근작에서 인물화란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가 진술하고자 하는 내용이 거기에 적합하다 판단해서일 것이다. 점점 더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분단현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과연 분단극복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화두를 우울하게 던지는 것으로 말이다.
송창의 그림의 인물은 바위를 연상시키는 간단한 형태의 두상이다. 디테일을 생략하고 임패스토 효과로 거칠게 그 골격과 표정만 드러냈다. 무표정한 얼굴엔 눈만 덩그러니 겨우 보이는데, 그 시선은 무심하면서도 묵시적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청회색조 안료의 거친 구사로 인한 나이브한 질감은 바위의 표면처럼 껄끄럽고 까칠하다. 오래된 풍화와 시간의 퇴적, 침묵, 비극적 상황에의 암시, 심각성, 상처, 고통, 기다림, 시간성, 체념과 인내, 의지… 등이 그 꺼칠한 화면 아래에 숨어 있다. 화면에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인물이 아닌 익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의 회화적 표현을 통해서 작가는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상처를 말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작가의 상처일수도,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처일수도 있다. 그러나 넓게 보아 우리라는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익명의 인물을 그린 이유는 바로 그 인물이 송창이 이야기하려는 주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상처는 아픔을 의미한다. 생채기가 몸이나 마음에 남는다.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치유를 전제로 한다.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역사의 상처든 모두 치유를 해야 한다. 작품에서 상처를 제시하는 것은 치유에의 의지를 상정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작품에서의 음울한 표정의 상흔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송창이 인물을 통해서 주목하는 상처는 무엇일까. 송창이나 익명의 우리들 모두 공동으로 갖고 있는 상처를 생각해보자. 자연스럽게 송창의 이전 작품들이 연상된다. 분단이다. 인물화의 내용이 서술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분단과 연관되어 진다. 작가는 지난 30년간 분단이란 작업소재에 천착해 왔다. 분단의 현장풍경, 분단 상황이 빚은 내면적 정서, 그 갈라지고 터진 아픔들…. 그랬다. 그는 집요하게 그 갈라짐의 현장을 서성이고 배회하며 갈라진 핏줄에 대해, 그리고 우리 모두의 육신인 국토에 대해 이야기 해온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치유는 아픈 신체의 회복 뿐 아니라 분단의 극복, 즉 통일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누구나가 마음으로부터 화합하는 장엄한 화엄을 의미하는 거다.
한국전쟁 이후, 아니 해방공간에서부터 한반도와 우리들을 가른 이념과 권력은, 칡(葛)과 등나무(藤)의 관계처럼 서로 얽히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남과 북을 긴장된 평행으로 만들어 왔다. 최근에 통일을 위한 남북의 협력은 점점 더 멀어지며 분단극복은 요원해지고 있는데, 우리들은 분단현실을 망각해가고 있다. 보수진영이야 안보를 주장하며 분단극복의 의지가 별로 없었지만, 정작 진보진영조차도 분단에 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국민의 정부와 문민정부에서 진행시켰던 긴장완화의 대북정책들이 현 정권 들어 모조리 폐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더욱 분단의 논의가 움츠러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송창은 자신의 분단에 대한 작가적 입장을 반성하고자, 또 분단이란 주제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넓히면서 형상화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인물화라는 장르를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동안 송창의 회화는 통일의 논의가 정지된 이 지점처럼 풍경에 매여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내용전개나 형식의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작품 주제인 분단극복에 대한 어떤 사회적 합의도 전개되지 않는 현실에서 작가 스스로가 그런 정체(停滯)에서 벗어나고자 이런 기획을 시도한 것 일게다. 각질을 떨어뜨리며 화석화되어 가고 있는 분단에 대해 침묵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스스로 각성하기 위해 좀 더 깊은 상징으로 그의 회화를 이끌어가려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화면의 분위기와 인물들의 표정은 관객과의 귀중한 선물이라 무겁고 우울하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고 화면 중앙에 배치시킨 인물표정과 색채, 터치, 붙여진 생생한 질료감이 어우러지는 구조는 간단하다. 등장인물의 깊은 응시를 통해서, 그리고 긴 침묵을 통해서, 작가는 화면 밖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와 어떤 대화를 시도한다. 지금 당신의 삶, 당신에게만, 당신의 가족에만 해당되는 풍요롭고 안락한 존재에의 욕망에 약간의 불편함을 들이밀면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외면할 것 같다. 당장 자신에게 절박한 일이 아니기에. 그럼에도 송창은 이런 내용을 던졌다.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어서다. 사실, 송창이 제시한 이 그로데스크한 화면은 대화용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일방적인 제시다. 그러나 관객이 보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이런 말 걸기를 시도하는 것은, 그만큼 송창의 분단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고 절박해서 그럴 거다. 사람은 절박할수록 설명을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말한다. 그래서 화면엔 표현만 남고 서술적인 드라마는 생략된다. 압축되어 버린 것이다. 소통은 더 어려워졌다. 작가의 의도가 질료와 행위로만 남아 있을 뿐, 사실 그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제시된 회화의 상징적 형상성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릴밖에. 송창의 근작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현란하고 부박하고 대중적이고 장식적인 회화미술의 상업적 시대에 원론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이 화가의 언어는 이제 방언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문법으로 회화를 다루는 작가의 한계와 비애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시대를 온전히 살면서, 자신의 개인적 인생과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작가적 입장을 그림으로 증명해온 궤적은 그런 한계와 비애를 넘어서는 가치다. 그는 끈덕지게 그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인가, 송창을 보면 그는 참으로 집요한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의식 켜켜이 쌓여있는 겹들을 벗기고 들어가 보면, 원형적 정서는 결국 분단에 관한 것 일 게다. 오래 전에 그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1952년생인 송창이 어렸을 때 동네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란다. 빨치산 이야기다. 호남이 고향인 송창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해방공간에서 밤에 불시에 들이닥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어떤 때는 지리산 손님이, 어떨 때는 토벌대가 와서 자는 사람얼굴에 손전등을 비추면 잠에서 깜짝 깬 사람은 머리를 좌나 우 어느 쪽이든 돌려야 했다. 즉 우로 돌리면 자신은 우파라는 표현이고, 좌로 돌리면 좌파라는 뜻이었다. 잠에서 깬 사람은 손전등 뒤 손님의 얼굴이 보일 리 없으니 밤손님이 토벌대인지 남부군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판단을 해야 했다. 목숨이 걸린 일을 머리를 좌우로 돌려서 결정해야 했으니 그 곤혹함은 둘째로 치더라도, 우선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는 사람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송창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것이다. 분단을 보는 그의 사유에 이런 실존적 갈등이 깊이 자리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그의 내밀한 정서가 이번 인물 그림에서는 좀 더 비극적으로 숭고하게 등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분단을 망각해 가고 있는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당신들의 태도는 무언가?” 라고 침묵하는 우리에게 묻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방언은 바위처럼 화석화 되어가는 우리들의 의식에 가장 원론적인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아닌가. 깨어 있고 실천하자는 간단명료한 잠언과 고요한 묵언. 누구나 알면서도,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한 강요로 침묵했던 지점을 찌르는 회화의 바늘. 그 통증에 이번 작은 전시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952년 전남 장성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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