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호
미래를 통하는 문 2010
죽음, 그 이미지의 진화
(글.홍순환)
권정호의 새로운 시도인 ‘미래를 통하는 문’은 집적시켜 쌓아 올린 해골기둥들을 기념비로 혹은 묵시적 분묘를 자처하는 현대인의 보편적 삶을 조형적으로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도적인 매개체로 사용된 해골들은 현존하는 실재이자 개념적 실체가 불명확한 부분적 부재를 드러내는 기표이기도 하다. 존재의 항상적인 차원이기도 하지만 물질성으로 치환된 그래서 영적인 존재가 분리된 상태, 즉 하나의 기표로 멈춘 것. 선택의 여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막다른 벽 앞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적 경계를 각성하게 하는 요소이며 죽음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비로소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
또한 보이지 않는 것과 확고한 것 사이를 배회하는 세계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소멸과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된다. 이미지를 만들어 무언가를 재현하고 대체한다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속이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형용해 스스로를 위무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또한 인간은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논리 앞에서 당연하게 종교적인 충동과 조형적인 욕망을 가지게 된다. 즉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은 삶의 역동성을 진작케 하는 역설적인 요인이 된다. 만약 인간이 죽음을 대면하지 못했더라면 삶은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영역 안에서만 맴돌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자성도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비전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의 중심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발현케 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요소들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즉 종교적인 충동도, 예술전반에 대한 숭고한 조형의식도 모든 인과와 존재의 근원을 묻는 철학적 인식도 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현실의 모든 변증법들을 가능케 하는 고리인 것이다.
죽음은 현실을 지탱하는 갖가지 요소들의 총합에 우선해 근원적인 세계의 질서를 직시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범주를 구축해 예측 가능한 가시적 주체들을 통합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태도도 비가시적인 세계의 대척점인 이미지화 된 가시적 세계에서 해석하고 대응한다. 따라서 세계를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인간의 죽음을 통해 현시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는 그 증명이기도 하다. 고대인의 믿음 속의 미이라는 삶과 죽음의 접점에서 양쪽을 잇는 역할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권정호의 ‘미래를 통하는 문’ 역시 이런 논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는 보다 더 전향적이고 결연한 관점이 숨어 있다. 죽음에 대한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빌어 또 다른 범주의 규정을 도출시킨다면 그 결과는 연쇄적인 삶의 이론과 맞닿게 되고 죽음이 죽음으로써 떠나지 못하는 경솔한 자승자박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권정호의 이런 태도는 개인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비롯된 것이겠지만 시각미술의 태생적 근원과도 맞닿아 있다. 즉 미술은 공간과 시간과 신체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충만해 있을 때 비롯되며 그 때 모든 초월성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권정호가 그 조형논리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특정한 죽음이 아닌 보편적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하나의 현상으로써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개별성을 드러내며 삶의 인과에 포박된 나약한 죽음이 아니라 불가의 연기(因緣生起)처럼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암시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의 죽음과 주변의 죽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주변의 죽음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이 모순은 나아가 죽음은 피해야 하는 것, 오욕의 늪, 부정적인 것의 총화, 어둠의 본질 등과 같은 이기적인 대유(代喩)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현실에서 타자의 죽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재 분류된다. 그 논점의 근거는 죽음의 원인과 관계되는 것이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비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의 해골탑은 항거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내몰렸던 죽음에 대한 일종의 추념비다. 여기에는 학살, 공포, 광기 등의 양면적인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반성이 지배한다.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가에 대한 헌신, 공로, 희생 등의 긍정적인 모습을 기념한다. 우리는 이런 분류에 익숙해 있지만 엄정하게 살펴보면 이런 분류는 죽음의 주체가 도외시 된 방식의 오류다. 만약 죽음의 내부에 이런 함수관계가 전제된다면 죽음은 죽음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삶의 편린이 되는 자가당착에 봉착한다. 죽음이 현실적인 삶의 잣대를 준거하는 형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대상화되는 이런 모순이야말로 어쩌면 산 자의 오만일 수 있다. 죽음을 산 자의 입장에서 재단하는 이러한 경향은 인류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풍속을 곧추 세우고 질서를 가다듬는 역할을 할지라도 장렬한, 희생적인, 오욕에 물 든, 값어치 없는 따위의 수식을 가한다는 것은 산 자의 규범이 죽음의 영역에 적용되는, 그래서 죽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반자연적인 행위가 된다. 더구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 종교적 배경과 세계관에 의해서도 바뀐다. 권정호에게 이런 죽음에 대한 관행은 견디기 힘든 상념을 제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죽음은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균일한 숙명이며 세계를 순차적으로 연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곳에서는 현실적인 가치규준이 무의미하다. 또한 권정호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죽음은 파국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비전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해골을 이용한 일련의 오브제 작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그에게 있어 해골 오브제는 부재와 소멸에 대한 증빙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또 다른 차원을 지시하는 상징인 것이다.
권정호는 이런 각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무려 2000개가 넘는 닥종이 해골을 만든다. 여기서 이 수공에 의지한 반복 조형은 죽음의 과정과 그 순환을 환기시킨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 자체는 세계와 연관된 죽음의 방식을 이미지로 기술할 뿐 죽음 자체를 해명하거나 주체의 결손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는 아니다. 일종의 존재론적 질문을 거듭하고 또 거듭할 뿐이다. 따라서 까다로운 공정을 따라 쉼 없이 반복되는 이 제작과정은 결과적으로 해골이라는 죽음의 이미지를 낳지만 그 이미지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실존에 대한 고찰의 이행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관념적인 관점이 탈각된 상태의 이미지가 성립되고 죽음도 삶도 아닌 독립적인 지평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가 드러내려는 것은 주관적인 관점을 포기하고 자연율, 혹은 우주의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궁구(窮究)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나 죽음의 시간을 맞는다.
그 생전의 모습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종국은 온다. 그 종국을 모면하는 방법은 현실적인 욕망의 논리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물질세계에 천착하는 한 종말은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따라서 권정호는 욕망과 물질이 제거된 신체로서의 오브제를 강구한다. 이 기획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영원성에 대한 집념을 버려야 한다. 구 소련의 우주 비행사였던 블라디미르 치토프는 일 년 동안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는 사이에 지구가 섬약한 존재로 비쳐졌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말은 우상의 정지, 혹은 존재의 원형적인 트라우마를 벗어난 경험에 대한 소회이기도 하다. 권정호에게 있어서 닥종이 해골은 삶과 죽음이 연루된 영속적인 덧없음을 가시화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 덧없음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또 다른 덧없음이기도 하다. 이 관점은 우주와 자연의 외연을 구성하고 있는 이치를 파악하고 그 함정에서 자유롭기 위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권정호는 두개골 모형 위로 풀 먹인 상태의 젖은 닥을 도포해 형상을 만든다. 마르기를 기다려 모형에서 굳은 닥의 형태만 걷어내는 방식인데 그 결과는 원본에서 사본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본의 근처에서 맴돌던 원본을 채집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권정호가 선택한 닥의 고유한 텍스츄어, 색감 등에서 연유한 바 있다. 또한 권정호는 의도적으로 최소한의 형태만 확인될 정도로 오브제를 성기게 만든다. 이는 확정적인 형태가 보다 수구적이라는 조형원리를 비켜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물질성을 약화시켜 형식의 이면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다. 결과는 매우 효율적이다. 내부와 밖이 뚫린 해골의 형태는 주변의 조명, 사물, 공간 등에 반응해 시시각각 그 면모가 바뀐다. 각각의 해골들은 아크릴로 제작된 케이스에 3열, 4횡의 군집배열로 쌓여지는데 전열과 후열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그 이미지가 뒤섞이는 듯한 착시가 생긴다.
따라서 바라보는 상태에 따라 각각의 형상들이 이동하고 합쳐지며 또 다른 층위의 일루전을 만들어 낸다. 이 일루전의 파동은 매우 감각적이며 유동적이다. 관념적인 논리가 섞여들 여지없이 그 자체로 중층적인 조형구조가 성립한다. 권정호는 이 3열 4횡 5단의 아크릴 케이스에 총 60개의 오브제가 배열되고 그것이 하나의 집적단위가 되는 대규모 설치를 구상한다. 각각의 단위는 그 배열의 설계에 따라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압도적인 기념비로 구성될 수도 있다. 고대 기념비의 시초는 분묘(墳墓)다. 최초의 박물관 역시 분묘에 그 기원을 둔다. 기원전 200여년 전에 건축된 병마용갱(兵馬俑坑)과 이집트 왕국의 피라미드, 중세 교회의 지하 분묘 등은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권정호의 구상은 죽음과 연관된 모든 기원을 아우르며 그 접점에서 상반된 가치들의 이항대립을 불식시키고 독립적인 죽음의 제단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
“나는 개인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형식주의자는 아니다. 정신 속에 형식을 만들고 형식 속에 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사고요, 나의 신앙이고 나의 확신이다.” 이 말은 권정호의 고백이자 그의 사상, 소양을 함축한다. 기술된 것처럼 그의 미학적 유연성은 그가 지금까지 거쳐 왔던 다양한 조형실험에서 파악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줄곧 견지해 온 원칙 중 하나는 삶의 존재론적 방식에 대한 의문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삶은 객관적 지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실체는 반영의 피드백을 통해 추론될 뿐이다. 또한 그렇게 추론된 실체도 죽음이라는 허구적 반영의 거울에 투사된 것이라면 그 증명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삶도 죽음도 모두 비껴나 있는 상태의 지점이 필요하다. 권정호는 자신의 오브제를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소통의 이미지라고 상정하며 “삶과 죽음의 순환과 그 축적의 토대 위에서 세계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라고 표현한다.
1944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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