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1940년 영국왕립미술학교 미술 전공 석사
1936년 세인트 마틴 예술 대학 미술 전공 학사
수상경력
1960년 윌리엄 노머 코플리 재단상(William and Norma Copley Foundation Prize)
개인전
2017 리처드 해밀턴: 연속적 강박 Richard Hamilton: Serial Obsessions,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추가정보
1922
런던 출생.
1936
런던 웨스트민스터미술대학과 세인트마틴스예술대학에서 야간 미술 강좌를 수강했다.
1938-40
런던 왕립학교 회화과에 등록하였고, 센트럴예술대학에서 에칭 및 석판화 야간 수업을 들었다. 9개월 동안 정부직업훈련센터에서 공업제도를 배웠다.
1942-45
웨스트 런던의 EMI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하이파이 장비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부품들을 모아 집에서 스테레오 기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47-49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Ulysses)』의 삽화 습작 연구를 진행했다.
1948
런던에서 나이젤 헨더슨(Nigel Henderson),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 윌리엄 턴불(William Turnbull) 등의 미술가들을 만났다. 헨더슨을 통해 마르셀 뒤샹의 <그린 박스(Green Box)>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1950
최초의 개인전 «수확기 변주(Variations on the theme of a Reaper)»가 런던 김펠 필스에서 열렸다.
1951
영국축제(Festival of Britain)의 일환으로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열린 전시회 «성장과 형태 (Growth and Form)»를 구상하고 디자인하였다.
1952
ICA의 인디펜던트 그룹(Independent Group)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다른 멤버로는 레이너 밴햄(Reyner Banham), 존 맥헤일(John McHale),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윌리엄 턴불, 나이절 헨더슨, 콜린 세인트 존 윌슨(Colin St John Wilson),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 테오 크로즈비(Theo Crosby), 앨리슨과 피터 스미스슨(Alison and Peter Smithson), 매그다와 프랭크 코델(Magda and Frank Cordell)이 있다.
1953
파올로치, 헨더슨, 스미스슨 부부와 함께 런던 ICA에서 «평행하는 삶과 예술(Parallel of Life and Art)» 전시를 열었다.
1955
런던 하노버 갤러리에서 단독전 «그림들 1951-55(Paintings 1951-55)»을 가졌다. 그가 구상, 디자인한 설치작품 전시회 «인간, 기계 그리고 움직임(Man, Machine and Motion)»이 뉴캐슬어폰타인의 해튼 갤러리와 런던 ICA에서 열렸다.
1956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이것이 내일이다(This is Tomorrow)»에서 미술가 존 맥헤일과 건축가 존 뵐커(John Voelcker)와 함께 <펀 하우스(The Fun House)>를 선보였다.
1957
스미스슨 부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새로이 정리한 “팝 아트” 신조의 원칙들에 근거한 전시를 제안했다. <크라이슬러사에 보내는 경의(Hommage à Chrysler Corp)>, <그녀의 상황은 싱그럽다(Hers is a Lush Situation)> 등 현대적인 소비자 제품 광고를 활용한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로런스 앨러웨이(Lawrence Alloway)와 빅터 파스모어(Victor Pasmore)가 함께 구상하고 디자인한 설치 전시회 «전시(An Exhibit)»가 뉴캐슬어폰타인의 해튼 갤러리에서 열렸다.
1958
<그린 박스>와 관련하여 마르셀 뒤샹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런던에서 열린 «이상적인 집 전시(Ideal Home Exhibition)»를 위해 <브루탈리즘과 타시즘의 수집가를 위한 갤러리(Gallery for a Collector of Brutalist and Tachiste Art)>를 디자인했다. 회화 <그녀($he)> 작업에 착수, 1961년에 완성하였다.
1960
3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인 뒤샹의 <그린 박스> “프린트” 버전의 출판을 가능케 한 윌리엄 앤드 노마 코플리(William and Noma Copley) 상을 수상했다. 디터 로스와 친구가 되어 평생 우정을 쌓았다.
1963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앤디 워홀과 리처드 아트슈와거클래스 올덴버그 등 여러 미술가들을 만났다.
1964
런던 하노버 갤러리에서 «그림들 외 ’56-64(Paintings etc. ‘56-64’)» 전시회를 가졌다.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 구입, 소장했다.
1965-66
마르셀 뒤샹의 <큰 유리(Large Glass)>와 1912년부터 1915년 사이의 연구작들을 복원했다.
1966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린 뒤샹 회고전의 큐레이팅을 맡았다. 브라운사의 토스터 이미지를 등장시킨 연작 작업에 착수했다.
1968
비틀즈의 <화이트(The White)> 커버를 디자인했다. <스윈징 런던 67(Swingeing London 67)> 작업에 착수했다. 일련의 회화와 프린트로 이뤄진 작품으로 롤링 스톤스의 리더 믹 재거가 해밀턴의 작품 딜러인 로버트 프레이저(Robert Fraser)와 함께 수갑을 찬 모습이 담긴 신문 보도 사진에 바탕을 두었다.
1970
미국 켄트주립대학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대를 상대로 한 총격 사건에 응답하는 스크린프린트 연작을 내놓았다. 1949년부터 1970년 사이의 작품을 다룬 대규모 회고전이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렸다.
1971
<꽃 그림(Flower-piece)>과 <엷은 핑크빛 풍경(Soft pink landscape)> 연작 작업에 착수했다.
1973-74
파리에서 알도 크롬랭크(Aldo Crommelynck)와 함께 핸드에칭 인쇄판을 이용한 색분리 프린팅 실험으로 <삼색 꽃그림(Trichromatic flower-piece)> 작업을 진행했다.
1974
럭스사의 의뢰작, <럭스 50–실작동 프로토타입(Lux 50 – functioning prototype)>을 논의하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1977
<릴리즈(Release)>의 단계별 인쇄판과 관련 작업을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런던에서 옥스퍼드셔의 주택으로 이사했다.
1979
전시회 «꽃(Shit and Flowers)»이 스페인 카다쿠에스 갤러리에서 열렸다.
1981
사진 자화상 연작 작업을 시작했다. 촬영은 유성 물감 자국을 남긴 판유리를 사이에 두고 이뤄졌다.
1982
『글 모음(Collected Words)』을 디자인하고 출간하였다. 글과 강의록 전체를 도판과 함께 한 권의 책에 수록했다.
1983
북아일랜드 메이즈 교도소에서 ‘불결 투쟁’에 나선 어느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죄수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회화 작품, <시민>이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럽 전후 회화의 양상들(Aspects of Postwar Paintings in Europe)»에서 전시되었고, 이후 데리의 오처드 갤러리에서 열린 리타 도나의 전시회 «셀룰러 메이즈(A Cellular Maze)»에서도 선보였다.
1984
알토스 586 컴퓨터를 구입하여 프로그래밍 언어인 유닉스를 배웠다. 마거렛 대처의 공공지원 삭감에 대한 날선 비판인, <처치실(Treatment room)>을 런던 리버티 백화점에 설치하였다.
1987
BBC 방송국의 시리즈 ‘빛으로 그리다(Painting with Light)’에 참여하였다. 6인의 미술가를 초청하여 퀀텔 페인트박스 컴퓨터로 숙련된 컴퓨터 기사와 함께 작품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국민(The subject)> 작업에 착수하였다. 북아일랜드 오렌지당의 행진을 그린 작품으로 <시민(The citizen)>의 자매작에 해당한다.
1988
에딘버러 프루트마켓 갤러리에서 열린 «리처드 해밀턴: 설치 작품들(Richard Hamilton: Installations)»에서 <처치실>을 각각 “사무실”, “호텔”, “감옥”을 대표하는 세 개의 공간에 설치 전시하였다.
1990
런던 ICA과 로스엔젤레스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인디펜던트 그룹: 전후 영국 그리고 풍요의 미학(The Independent Group: Postwar Britain and the Aesthetics of Plenty)» 전시를 위해 <인간, 기계 그리고 움직임>, <펀 하우스>, <전시>를 복원하였다.
1991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윌리엄 타운센드 기념 강연을 하였다. 강연에서 그는 “인쇄 출력의 문제”를 주제로 빠르게 확산되는 컴퓨터 기술과 그것이 미술가에게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리타 도나와 7월에 결혼하였다.
1992
테이트 미술관과 더블린 아일랜드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1993
베니스 비엔날레의 영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하여, 회화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95
디지털 방식의 회화 일곱 점으로 구성된 연작 <일곱 개의 방(Seven rooms)>을 런던 앤서니 도페 갤러리의 단체 전시회 «다섯 개의 방(Five Rooms)»에서 선보였다.
1997
독일 카셀 ‘도큐멘타 10’에서 에케 봉크(Ecke Bonk)와 함께 만든 “타이포소픽 파빌리온(typosophic pavilion)”을 따라 장소특정적 설치작품 <일곱 개의 방>을 다시 제작하였다.
1998
런던 앨런 크리스티 갤러리의 «판화에서의 신기술(New Technology in Print)» 전시는 디지털 매체로 나아간 해밀턴의 작업을 처음으로 조명한 자리였다.
2002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상상하며(Imaging James Joyce’s Ulysses)» 전시가 런던 영국박물관에서 열렸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계속 작업해온 1백 점 이상의 드로잉과 에칭, 판화를 선보였다.
2003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ACBA)과 쾰른 루드비히박물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2007
제52회 베니스비엔날레 참가작으로, 베니스 팔라체토 티토에서 «천사들(A Host of Angels)» 전시를 가졌다.
2008
일본 왕실이 수여하는 세계문화상(Praemium Imperiale) 회화 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정치적 작품들을 선보인 전시회 «저항의 그림들(Protest Pictures)»이 에딘버러 인버레이스 하우스에서 열렸다.
2009
14점의 디지털 및 릴리프 프린트로 이뤄진 <토스터 딜럭스(Toaster deluxe)> 연작을 런던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전시했다.
2010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열린 «현대의 도덕 문제(Modern Moral Matters)»에서 신작 <용의자 특별 인도(Unorthodox rendition)>를 선보였다. 이스라엘의 핵 연구원으로, 이스라엘 핵무기 프로그램의 존재를 세상에 폭로한 후 1986년 납치된 모르데차이 바누누(Mordechai Vanunu)의 초상화이다.
2011
더블린 휴 레인 갤러리에서 «시민권 외(Civil Rights etc.)» 전시를 열었다. 해밀턴이 «현대의 도덕 문제»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과 리타 도나의 그림들이 나란히 전시되었다.
9월 13일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