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things
2011.08.24 ▶ 2011.08.29
2011.08.24 ▶ 2011.08.29
박지혜
Regard 1002 Oil on canvas, 162.2x112.1cm, 2010
박지혜
Regard 1101 Oil on canvas, 90.9x72.7cm, 2011
박지혜
Gesture 1001 Oil on canvas, 97.0x145.5cm, 2010
박지혜
Regard 0904 Oil on canvas, 145.5x112.1cm, 2009
박지혜
Regard 1001 Oil on canvas, 116.8x91.0cm, 2010
박지혜
Regard 0907 Oil on canvas, 130.3x193.9cm, 2009
시선을, 빼앗기다.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들이 있다. 걸음을 멈추게 하고, 시선을 붙들어 매버리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박지혜는 그런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선의 작용을 이끌었던 모티브들은 나아가 본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떠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녀의 그림들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선을 앗아간 장면들이다. 그래서 Regard.
시선을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하필이면 Regard. 그저 ‘바라보기’를 뜻하던 불어 regard는 메를로-퐁티와 라캉을 거쳐 색다른 의미를 덧입었다. 통상 영어로는 gaze, 우리말로는 응시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주체가 보여지는 시선, 주체를 사로잡는 세계의 시선을 뜻한다. “그들은 단지 본인에 의해 보여지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닌, 마치 자신을 보라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하며 시선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원동이자 주체로 존재하는 듯 했다. ‘~을 보았다’라는 표현보다는 ‘~에 시선을 빼앗겼다’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당시의 경험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가 서로 뒤엉켜 있는 시각장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본다. 우리의 망막에 자신의 인상을 스치듯 남기는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는다. 오직 특정 장면들만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함께 사로잡아버리는 것이다. 박지혜의 그 장면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누군가의 유난스러울 것 없는, 어디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하루의 한 순간.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독특한 특성들이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의 면면은 주로 누군지 알 수 없을 익명의 여인들의 ‘뒷모습’인데,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조금 마른 듯한 몸매에 고개를 살짝 비트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왜 하필 이런 장면들에 시선을 빼앗겼을까? 박지혜는 본인의 시선이 여성들의 뼈와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에 유독 민감하게 가 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째서 늘 뒷모습인가? 박지혜의 그림에는 언제나 여인이 중심 모티브로 등장한다. 인물이 등장할 경우, 보는 이는 으레 인물의 얼굴생김부터 훑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가 포착하는 장면이 언제나 뒷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통상적인 그림보기 절차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작가의 시선을 빼앗았던 작고 섬세한 것들―몸의 움직임에 따른 근육과 뼈의 모양새, 옷의 꽃무늬, 레이스 문양 등―이 그림의 중심이 되어 오롯이 솟아오른다.
작가가 굳이 늘 뒷모습을 그리는 것은 얼굴보다는 몸, 엄밀히 말하면 섬세한 근육과 뼈의 미세한 움직임이 담고 있는 표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감성에 더 사로잡혔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니 여윈 몸을 그리는 것이 마땅했을 터. 그녀 그림에 등장하는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목과 등의 뼈, 그리고 근육이 만들어낸 선은 다름 아닌 감정선이다.
이렇게 박지혜의 Regard에는 주체의 관심과 대상의 감성이 연루되어 있다. 그리하여 본다고 생각하는 보여지는 주체와 보인다고 생각되는 보여주는 대상 사이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선의 정지된 순간이 아닌, 시선의 작용들이 횡행하는 운동의 장이다.” 그녀의 그림은 주체를 사로잡은 응시와 주체의 능동적 시선의 교차점인 것이다.
이러한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시선의 교차를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기 위해 박지혜는 많은 경우 모티브가 되는 장면을 찍고, 그 사진과 당시에 느꼈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글레이징 기법을 사용하여 유화를 그린다. 이처럼 사진을 바탕으로 하니, 그녀의 작업이 사진과 닮은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흔히 극사실주의, 혹은 포토리얼리즘이라고 분류되는 그녀의 작품 앞에서 보는 이는 그 탁월한 사실적 묘사에 첫눈을 빼앗긴다. 감탄한다. 확실히 글레이징 기법은 고광택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사진 같다’는 말이 화가에게 칭찬이 아니게 되는 지점은 그림의 의미가 정말 실물 같다는 인상에서, 다시 말해 작가의 테크닉의 집대성이라는 인상에서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사진과 비견하는 가운데 작품의 의미가 소진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 박지혜의 작품은 쉽사리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시선을 붙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만 작가의 시선을 빼앗았던 그 장면들을 정말로 사실적으로, 사진 같이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해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테크닉은 잠시 우리의 시선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붙들어놓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우리의 눈앞에 내미는 이런 소소한 장면에 붙들려 서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가?
혹시 ‘뒷모습’ 때문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낯설지만 낯익은 이 뒷모습들.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어디서 보았을까? 흥미롭게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뒷모습들은 응시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뒷모습이기 때문에 그 응시를 익명성 속에 감추고 시선의 주체성을 보는 이에게 돌려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시선을 빼앗아간 그 장면을 이제 시선의 주체가 되어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찬찬히, 구석구석.
아무리 뜯어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 뒷모습, 그럼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이 낯설고도 친숙한 느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 어딘가 켜켜이 묻어두었던 심적 이미지를 퍼 올리도록 한다. 이러한 길어 올림에는 필경 묘한 감정적 울림과 향수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때 거기가 그림을 통해 지금 여기로 이어질 때 생겨나는 그 울림을 누군가는 아우라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제 그림의 시선, 응시는 보는 이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한다. 어떤 이미지를 길어 올렸건, 그것은 다만 보는 이 자신의 경험의 투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예술 경험은 작품에 자신을 되비추는 반조적(reflexive) 경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처럼, 우리는 아마도 이미지가 자신을 되비출 때 그 이미지에 가장 강하게 붙들리는 것 같다. 그리하여 보는 이가 한동안 그림의 응시에 붙들리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무엇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지. 그러나 바로 그래서 눈길을 빼앗긴 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박지혜의 작품처럼.- 정수경 (미학, 미술이론)
198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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