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이륙하다 oil on linen, 228x182cm, 2011
김지원
그림보초 Ballpen, Gouache on Paper, 45x45cm, 2008
김지원
무제 oil on linen, 90x160cm, 2009
김지원
무제 oil on linen, 228x228cm, 2009
김지원
맨드라미 oil on linen, 227x182cm, 2006
김지원
맨드라미 oil on linen, 100x100cm, 2011
묘사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맨드라미. 스프링클러, 공항, 구축함이라는 소재를 한 전시에서 동시에 보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보다 어딘가 어긋한 만남들 같다. 정착과 이동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소재라는 이해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 작가를 이해할만한 일관성이나 동질성을 기대하는 것에서 멀리 있는 인상이다. 작가를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민물이다. 잔디밭으로 흘러드는 물은 네바다 주의 사막지대의 풍경에 어긋나면서 자신의 풍경을 만든다. 맨드라미는 한국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보는 꽃이다. 지금은 흔하지 않지만 어디서든 잘 자라는 꽃이다. 붉은 색상과 고개를 쳐든 기세나 서리 내린 후의 표정이 이런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구축함은 바다, 바닷물, 전쟁을 보여준다. 바닷물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자 폭력이다. 그 거대한 힘을 하나의 권력으로 전치시킨 것이 구축함이자 대공포이며, 초계기나 전투기들이다. 그 옆으로 민간항공기가 뜨고 앉는 공항이 있다. 공항, 어딘가로 떠나야 하기에 언제나 번잡하고 가득 찬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비어 있는 곳이어야 한다. 화물과 승객들이 이용하는 트랙이 공항의 비고 차는 순환을 자신의 구조적 특징을 통해 드러낸다.
1.맨드라미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붉은 색은 당분간 그의 트렌드마크 역할을 할 것 같다. 그동안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흔한 것 같으나 시골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꽃이다. 그저 장독대에 핀 작은 꽃술로 물김치에 색을 내는 정도로 알고 있던 꽃이다. 그러나 야생상태로 드러나는 맨드라미의 군집은 다른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즈음 그의 맨드라미는 변화를 보인다. 꽃보다 풀이 많아지고 있다. 풀의 생성과 맨드라미의 쇠락은 그의 화면 자체를 비구상적 면모로 돋보이게 한다. 서리를 맞은 풀의 무채색과 시든 맨드라미의 붉은 색상은 의도된 색상배치이지만 앞서 제작된 맨드라미의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붉은 색상더미와 다르다. 그리고 집요한 맨드라미 꽃대궁의 거친 터치나 붓과 화면을 긁어내는 자국은 해제된 형태와 묘사된 형태 사이에서 새로운 질감을 만나게 한다. 꽃의 형상이 아니라 물질로 만나게 한다. 스쳐지나가는 터치, 붓, 나이프, 색상들은 꽃과 풀, 그 외의 사물들의 경계와 고유성을 침범하고 주변의 꽃과 풀을 구별하기 힘들게 한다. 최근 작품은 이런 경향이 강하다.
그의 꽃은 거리를 두고 완상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서게 유도하고 가까이 다가섰을 때, 질감, 실재감, 촉감을 만나게 하고 그 속으로 몰입하게 한다. 그것은 재현이나 묘사의 효과가 아니라 촉감에서 오는 효과이다. 촉감은 어떤 사실적 묘사보다 현실감을 준다. 맨드라미는 초기부터 이런 인상이나 특징이 강하다. 꽃의 묘사보다 다른 어떤 의미들이나 시선이 닿는 색상들의 강력함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징그럽기도 하고 장식적이기도 한 이중성은 아마 이런 특징의 한편에서 생긴 부가가치일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완상적 거리를 무화시킴으로 묘사대상을 묘사를 넘어서는 효과로 제시하는 것이다.
꽃이 사람보다 크게 그려지면 완상의 한 장면이 아니라 전치된 상황, 거대한 힘으로서 꽃으로, 상대적으로 인간의 왜소함을 보는 일이 될 것이다. 작품과 보는 이의 적당한 거리는 이 충격을 줄인다. 거리는 시선의 거리이자 각도이다. 시선은 보고 싶은 거리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드러나는 거리에서 보게 한다. 시선의 독선이다. 그 거리를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당겼다 밀었다 한다. 시든 꽃밭이 주는 장엄함, 그 색, 형태는 시선의 독선에 바투서게 유혹한다.
2.「스프링클러」는 묘사이기보다 삽화 같다. 네바다 주의 사막에 어울리지 않게 조성된 잔디밭이라는 설명이 없어도 어딘가 어색한 구석을 보여준다. 그 어색함. 도식적인 시선이 어쩌면 그런 어색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다. 사방으로 방사되지만 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정교한 계산이지만 물길은 때로 그 계산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것은 물줄기가 아니라 꽃 같다. 작가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저 푸른 색상 위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스프링클러는 골고루 물주기, 적절한 시간에 물대기, 사람의 힘을 빌리기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기능을 가진 설치물이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스프링클러는 대단지 화훼농장이나 골프장에서 만나게 된다. 잔디만 살아나도록 약재가 든 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선택적 키우기의 전형과 연결된다, 선택기능, 선택은 권력이다. 잔디 외 어떤 식물도 용납하지 않는 물주기인 셈이다. 선택적 관리로서 물주기, 관리되는 자연의 모습이다.
네바다 주의 사막과 대조를 이룬 이 풍경은 인간의 관리라는 선택과 힘을 보여준다. 관리되는 것과 관리되지 않은 것의 대조, 그것은 재현 불가능한 어떤 일이다. 현실의 비정합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미끄러져 가면서 외면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형국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보이는 특이점이지만 캔버스 가장자리를 일정부분 그리지 않고 하얗게 비워둔 공간이 있는데 그 어색함이나 의도된 여지가 완성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배려 같다. 「스프링클러」에서 이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여지 혹은 묘사 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진술로 읽힌다. .
3.「이륙하다」는 공항풍경을 그린 것이다. 구조물이 있지만 완강한 입체물이 아니라 선조로 이루어진 트랙을 주목한 것이다. 자신의 뼈대로 면을 대신하는 구조물이 트랙이다. 그 트랙을 주소재로 삼아 그려진 작품이다. 텅 빈 비행장 안의 트랙이라는 구조물은 참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언제나 비어 있어야 하는 공항의 특성을 자신의 몸을 투과해서 시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공항의 특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구조를 지탱하고 제 역할을 한다. 그는 항공기의 이착륙 자국과 트랙이 움직이는 자국들, 트랙의 선적 구조를 형상화하면서 이 상황을 보여준다. 넓은 공항의 공간에 선구조물의 선과 그림자가 빈 곳과 대조를 이루면 형상화된다. 공간을 가지면서 자신에게만 한정된 공간을 부정하는 구조물이 트랙 아닌가. 트랙의 흔적은 있으면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비어있음이다. 항상 비어 있어야만 공항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장소성의 맥락이 거기서 다시 반복된다.
눈 덮인 공항, 활주로 위의 트랙, 바닥의 유도 구조물과 금지구조물, 크고 작은 트랙 자국들과 자신의 그림자로 덮인 풍경의 질감이 전개된다. 그러나 그 난삽한 선들의 얽힘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언제나 평면으로 질감이 없는 공간으로 드러난다. 이륙시간이 남은 비행기 한 대의 한가한 모습도 보인다. 이륙전의 심정이 미끄러운 길 내기의 환상에 젖게 한다면, 그것은 정감, 회억, 잠시 동안의 심정적 공황상태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륙하기」는 시간에 놓여 있는 공간의 현상, 규정된 것으로 공간이 아니라 장소로서 내놓인 곳을 표현하고자 한다. 시간의 연속성으로 주어져 어떤 행위도 가능한 빈 곳으로서 장소성을 잡아내고 있다. 공항은 길이 보이지 않지만 길 대신 드러나는 트랙의 흔적들로 이를 대신한다. 트랙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점유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비워 시선을 투과시키기 때문이다. 빈 것으로서 있어야 하는 공항은 시간적 존재로서 세계의 모습에 다르지 않다. 지속과 변화로서 시간이 묘사 불가능한 개념이라면 그의 「이륙하기」는 절묘한 착안 아닌가.
4.구축함을 그렸다. 참 어색하고 이해하기 힘든 소재이다. 마치 전쟁영화 포스터나 관계기관의 홍보전단물 같다. 그리고 어떤 서사적 상황도 없다. 그저 바다에 떠 있는 항공모함, 구축함, 혹은 민간인인 필자로서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전함들이다. 거대한 배는 전쟁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그 배 위에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정도라면 거대한 권력이자 정당화된 폭력의 상징이다. 그 배들이 바다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위에 포말을 일으키면서. 바다는 그런 만남 외 표현할 길이 없다. 묘사 불가능한 힘으로 바다가 있다면, 배와 비행기는 묘사 가능한 것으로 있다. 그러나 묘사 대상인 배의 기능은 묘사 불가능한 것이다. 묘사를 초월한다.
그의 구축함은 전체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제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구조는 보이지만 막상 세부를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분명하고 온전한 묘사가 없다. 구체적 묘사를 피하고 있다. 그것은 재현을 통한 상황묘사가 아니다. 상황 자체, 폭력, 권력, 불가항력의 힘, 그 속에 관계 맺고 있는 세계, 그것을 드러냄이다. 그러나 맨드라미나 스프링클러, 공항트랙이 보여주는 우회적 읽기의 섬세함은 없다. 노골적이다. 권력은 노골적이다. 그러나 그런 노골적 표현은 그 이상을 읽게 하지 않는다. 삽화가 아니라면 그것을 제시하는 새로운 기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언뜻 그의 구축함과 비례가 맞지 않은 인물이 선두에 유령처럼 앉아 있는 작품이 있다. 의외의 느닷없음은 상투적인 읽기의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전함의 폭력성을 무색하게 한다. 인물의 돌연한 등장은 그의 전함들마저 돌연하게 우리 앞에 제시되도록 한다. 그는 누구이며 왜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전함들에도 같이 적용된다. 바라볼수록 이 물음은 가중된다. 그의 전함들은 이런 물음 앞에서 폭력이나 전쟁이라는 노골성이 무색해진다. 우리는 무얼 보는 것이며, 왜 그것들이 눈앞에 있는지, 물음 자체가 되어버린다. 물음이 전체를 이끌고 있다면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우리의 언어와 어긋나 있는 언어이다.
그의 소재는 묘사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가 내보이고자 하는 것은 묘사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읽기, 해석하기, 이해하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재현을 전제한 언어적 구축으로서 작품이 아니라 재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언어적 통로를 보이는 것이다.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만남은 읽기가 아니라 사유하기를 요구한다. ■ 강선학
1961년 경기도 과천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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