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섭
re-play 혼합재료, 사운드설치, 2013
김영섭
노랑풍선 혼합재료, 사운드설치, 2013
김영섭
ruhe bitte ! 혼합재료, 사운드설치, 2013
세상 도처에 소리가 자리한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소리가 들릴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종종 그 소리들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다. 언어나 음악과 같이 별다른 소리들은 제외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기엔 그 소리들이 너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일상의 작은 소리라도 세심한 경청의 노력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아직 의미로 발화되지 못한 많은 소리들이 있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잊고 살아가는 소리 혹은 그 온전한 의미로 작동하지 못한 소리를 향해 김영섭 작가는 꾸준한 작업을 이어왔다. 개인사적인 여러 이유로 소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키워왔던 것인데 작가는 그동안 소리를 매개로 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그 특정한 소리를 듣도록 함은 물론 소리를 통해 어떤 특정한 (비)의미들을 전해왔다. 혹은 보이도록 했다고 해야 할까. 이른바 사운드 아트라 불리는 영역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세상에 없는 소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세상에 자리하는 수많은 소리들을 채집하고 이를 재배치, 배열하는데 무게 중심을 두어 왔음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일상의 삶에 자리하고 있는 평범하지만 미처 그 의미를 생각하지 못했던 소리들로 작가의 (눈과) 귀가 향해 있는 것이다. 이들 감각에 더해 어떤 사유가 덧붙여짐은 물론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소리가 작업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전부나 최종은 아니라는 생각인데 소리 이상의 무엇을 소리로 전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소리를 물체의 진동이나 기체의 흐름에 의해 발생하는 파동의 일종으로 본다면 변화하는 세상 속에는 혹은 그 관계와 움직임 속에는 작던 크던 간에 많은 소리들이 자리한다. 만물은 유전하는 법이니 우리는 소리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곳곳의 수많은 움직임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관계들이 얽혀지는 사회 속에서 온갖 인위적인 소리들이 생겨나고 서로 충돌하고 혹은 사라진다. 그래서 마치 제 각각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저마다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변하는 세월만큼이나 늘 새로운 소리들이 발생한다. 항상 무언가가 생겨나고 또 그렇게 새로운 소리들을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리를 둘러싼 학문들도 한몫했을 터, 소리에 관한 많은 비밀들이 도해되고 있고 그에 따른 인위적인 소리를 만들어내고 저장하고 전달하는 많은 장치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리의 발생에는 (스스로의 움직임조차도) 늘 타자라 할 수 있는 다른 것들과의 부딪힘이 있어야 하니 ‘관계함’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소리란 누군가 이를 들어야 어떤 의미로 작동한다. 발신(발음)과 수신(청취) 사이의 관계를 통한 특정한 소통 코드가 중요한 것이다. 소리를 둘러싼 것들에 사회문화적인 맥락이 한 몫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것들도 있다. 웅얼거림이나 노이즈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일 것이다. 잡음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날 것의 것들, 비의미와 무의미로 잠재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미처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 자리하는 소리들이게 관심 여하에 따라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작가의 관심도 이런 방향으로 향해 있다. 특정한 소리 혹은 소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소리들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인 차원들로 향한다. 그렇기에 그것이 비의미와 무의미처럼 들리는 소리들도 관심과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작가가 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리를 선택적으로 채집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소리를 채집하여 이를 재구성한다는 사실은 작가의 소리 작업이 갖고 있는 남다른 지향성을 설명하도록 한다. 어떤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소리, 사회적인 맥락으로 감각 작용하는 소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해석된 소리는 물론 아직 그 의미를 발화하지 못한 소리들이 담고 있는 세상의 또 다른 틈과 이면 혹은 잉여의 존재론이라 할 만한 것들을 펼쳐내려 한다. 이런 면에서 소리는 작가가 세상을 파악하는 혹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전언들을 위한 매개로 기능한다. 미디어라 할 수도 있겠다. 확성기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서 다시 그 소리를 통해 무언가를 전하려 하는 것이다. 소리를 통해 세상과 접하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과 감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소리를 매개로 하지만 일종의 소리조각(sound sculpture), 소리설치(sound installation)의 계열을 따르고 있다. 오디오비주얼 작업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은데, 청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이 서로를 보완하는 식이다. 생각해보면 소리의 경우 특히나 시각화된 방식과 남다른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과학적인 원리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겠지만 소리를 증폭해서 전하는 장치인 확성기의 경우 뿔(Horn) 모양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시각에서 말하는 투시 원근법의 원뿔 구조와 유사한 동형성을 지닌다. 이러한 원뿔 형태는 중심, 확장 권력의 논리를 작동하는데 제격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도 이를 착안한 오브제가 눈길을 끈다. 거리 곳곳에 임시 볼라드로 쓰이고 있는 플라스틱 재질의 라바콘이 그것이다. 일상 곳곳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라바콘의 주요 기능은 이동식 통제장치로 손쉽게 경계를 구분하고 구획시킨다는 점이다. 접근 금지 혹은 위험의 표지인 것이다. 불안과 위험 사회의 징표 혹은 늘 무언가를 새롭게 건설하고 있는 허름한 이 시대의 성장논리를 희화시키는 기제일 수도 있겠다. 이 라바콘을 소리를 확장, 증폭하는 장치로 활용함은 물론 이를 얼기설기 엮어 공간을 압도하는 기둥 구조물로 전환시키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소리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소리를 가시화(청취화)시키는 장치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설치에도 관심이 있어 이러한 시각적 요인들을 작업의 의미를 보완하고 강화시키는 요소로 삼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특히나 소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과 그 작동방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니 말이다. 거대한 기둥 구조물도 그렇지만 그 장치에서 나오는 소리 모두, 공간을 시각과 청각 양쪽에서 장악한다. 공간을 시청각적으로 압도하는 감각작용인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대량생산으로 값싸게 일상 곳곳에서 확인되는 라바콘은 삶을 압박하는 소리의 정치학, 소리가 갖고 있는 권력의 작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화려하지만 강한 컬러감도 이러한 논리를 더한다. 그간의 작업에서 선보였던 확성기나 화분, 도자기나 날 스피커와는 형태적으로 사뭇 다르지만 일상적으로 접하는 형상의 (소리) 장치라는 면에서는 일정한 궤를 같이 한다. 결국 특별한 장치일 필요는 없었던 것인데, 그 만큼 소리란 도처에서 자리하고 있는 일상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동안의 작업처럼 소리를 이어가는 전선들이 얼기설기 노출되고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공간 속에 유기적인 연결을 잇는 소리 설치라는 면도 같은 맥락이다. 나무뿌리처럼 소리 역시 여러 관계들로 서로 얼기설기 엮어있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존재함을 드러내려 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소리가 연결되는 선들의 노출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어 유기적인 ‘연결’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소리 그릇만큼이나 그 안에 담겨진 소리들도 연동된다. 그동안의 작업이 특정한 콘셉트에 맞는 집약적인 사운들을 선택했다면, 이번 작업은 사회 곳곳에서 채취된 소리들을 더 넓은 지반과 맥락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구별된다. 자동차 경고음을 비롯한 도심 번화가 곳곳에서 녹음한 갖가지 소리들, 거대 건물 환풍기에서 찌꺼기처럼 나오는 소리들, 매미소리, 파도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들이 랜덤하게 이어진다. 모두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듣기조차 힘든 도시의 속내와 이면에 기생적으로 자리하는 소리들이다. 그리고 이들 소리들은 서로 구별이 안갈 만큼 서로를 닮은 소리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주의 깊게 귀담아 듣지 않았던 세상 틈바구니와 그 사이에 자리하는 소리, 잉여 소리들이기도 한데 어쩌면 익숙하지 않은 낯선 소리들이기에 그 비슷함의 정도가 컸을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는 바람이나 폭포 소리 같기도 하고 매미소리는 인공적인 기계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인공화 된 자연의 소리나 자연처럼 들리는 인공소리나 서로 구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특별한 소리가 아니라 그저 일상 곳곳에 자리하는 소리들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 틈마다 기생하는 소리, 찌꺼기처럼 잉여하는 소리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지금 이곳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 틈바구니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인공으로 가득 찬 사회가 만들어내는, 또 자연으로 거듭난 소리를 선택적으로 담아 이를 전함으로써, 자연과 인공이 서로 이접되어 있는 세상의 작동을 주목하게 한다. 아니 청취하게 한다. 그동안 미처 듣지 못한 소리를 전함으로써 그 만큼 세상 곳곳의 소리에 무감한 우리들의 감각들을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한다. 자연의 소리조차 사회화된 감각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인공조차 자연인 혹은 자연조차 인공일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강한 전언인 셈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 공존하는 동시대 도시에 관한 또 다른 전체성을 소리를 통해 여지없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조용한 세상에 대한 갈망이나 고즈넉하고 유유자적한 자연의 소리에 대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중간 중간 이어지는 경고음도 이런 느낌들을 강화시킨다. 공간을 가득 메운 압도하는 강한 빛깔의 (소리) 장치들도 그저 흔한 일상의 라바콘인데다 그 거대한 장치들에서 흘러나오는 낯설 소리들 역시 도심 곳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임을 알게 된다면 이런 묘하고 이질적인 느낌들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전시 제목처럼 그저 세상의 소리들을 단지 다시 작동(Re-Play)시켰을 뿐인데도 말이다.
전시의 또 다른 공간인 2층 공간은 종종 사적인 공간으로 전용될 만큼 1층의 주요 전시 공간과는 다른 곳이다. 개인화된 공간, 사적인 공간을 채우는 작가의 이번 작업은 앞의 메인 작업과는 다르게 더 직접적인 의미 작용들로 향한다. 1층 작업이 전체적인 맥락을 구성하여 사회화된 소리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을 전한다면 2층 공간의 작업들은 소리의 직접적인 권력 작용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적인 전시 구성면에서 토대와 상부구조 같은 건축적인 공간 구성도 흥미롭지만 1층의 주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는 공공공간과 다르게 2층의 사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소리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감각작동을 가시화시킨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 점이다. 스피커 사이에 위태한 긴장감으로 설치되어 있는 풍선 작업이나 원뿔형의 추를 아래로 향하게 한 작업은소리라는 감각이 전하는 권력의 긴장이나 그 작용을 직접적으로 가시화시킨다. 앞선 작업이 사회적인 권력을 법정의 정의봉 소리와 함께 청각화, 가시화시킨다면 뒤의 작업은 소리 없는 그 진동만으로도 개인으로 향해 있는 권력의 긴장감을 감각적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 중에 파동을 일으키며 전해지는 소리는 크던 작던 예민한 김장감으로 우리의 감각을 압박하는 힘의 작동이다. 살갗에 부딪히는 직접적인 감각이기에 종종 권력과 착종된 소리의 정치학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저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과 호루라기 소리만으로도 온몸을 웅크려야 했던 그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달리했다해서 소리가 갖고 있는 정치, 사회적인 효과가 퇴색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 작동 방식이 달라졌을 뿐인데, 작가의 이번 작업도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리는 그만큼 개인에게 생생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진한 감각이고, 의식과 무의식, 사회의 전면이나 일상의 틈새 곳곳을 가리지 않고 작동하기에 그 파급력은 생각 이상이다. 작가처럼 우리도 소리로 세상을 세심하게 보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민병직(문화역서울 28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퍼블릭 큐레이터)
1971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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