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2010-1 캔버스에 아크릴릭, 72.7x116.8cm, 2010
김영순
2009-2 캔버스에 아크릴릭, 45.5x53cm, 2009
김영순
2008-12 캔버스에 아크릴릭, 50x60.6cm, 2008
김영순
2008-10 캔버스에 아크릴릭, 45.5x53cm, 2008
김영순
2009-3 캔버스에 아크릴릭, 40.9x53cm, 2009
최소한의 그리기의 그늘에서
느닷없이 다가온다. 사람의 온전한 몸에 표정이 있는 얼굴이 아니라 그냥 얼굴 하나가 덜렁 나타난다. 표정도, 정교한 묘사도, 기량을 확인할만한 표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피할 수 없다. 내 시선을 그곳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어디에서 시작한 것이며,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 황망한 경험이다.
작품<2009-2>는 화면 왼쪽 상단 끝에 구름 같은 형상이 있다. 가만히 들이다보니 여자의 얼굴이다. 그러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기둥 혹은 바위 같은 형상이 불쑥 올라와 있다. 그 뒤로 숨은 듯 남자의 얼굴이 새겨진 작은 곡옥 형상을 목격하게 된다. 곡옥이 아니라 물방울이라 해도 무관할 듯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수평선이 걸려 있다. 붉은 색조와 푸른 색조가 대비를 이루지만 색채는 화면에 밀착 되지 못하고 푸석하니 채도가 낮고, 구성도 어딘가 모자라는 듯 무심하기만 하다. 바다, 수평선, 구름, 물방울 혹은 곡옥, 바위기둥이 전부이다. 바위기둥 뒤로 숨은 듯 한 물방울은 남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고, 수평선 위 구름 같은 형상은 여자로 대칭을 이룬다. 애틋하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려진 형상은 너무 직정적이라 차분하게 묘사되어 나타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딜 더 손대야 할지 말하기도, 지적하기도 난처하다. 참 대책 없는 구성이자 묘사이다.
몇 몇 작품에는 여자신발이 분명한 형태로 보이고, 그 안에서 혹은 그 위에서 얼굴은 마치 신발 속으로 스며들거나 나오기 위해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가변체로서 등장한다. 그것은 얼굴이 아니라 무엇이든 되기 위한 어떤 생성물 같다. 역동적인 힘으로서 어떤 것이 되기 전의 형상, 화면의 밑그림으로서 형상, 미분화 상태로서 색의 덩어리나 형태의 덩어리로 등장한다. 다분히 성적 심리상태를 보이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도 쉽지 않다.
바위나 기둥으로 연상되는 육면체의 구조물 위에 머리가 뉘인 채 있고, 한쪽 신발만 신은 대퇴부 위에 얼굴이 가로로 놓여 있다. 돌부처의 얼굴이 전면에 나오고, 그 뒤 산기슭 암굴에 얼굴이, 산 위로 환영처럼 몸 전체가 드러난다. 또 다른 작품, 화면의 반을 넘게 차지한 커다랗고 희미한 얼굴의 귀 속에 사람이 서 있다. 그녀의 인물들은 대부분 얼굴 그 자체로 제시되는데 전신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이채롭다. 얼굴은 그 자체로 화면의 주제로 등장하지만 전신상의 몸은 산이나 귀 속에 드러난다. 숨겨진 것은 온전하고, 드러나는 것은 온전하기 못한 얼굴뿐이다. 억압과 욕망, 슬픔, 과도한 자기검열 탓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그 연유는 추측이 쉽지 않다. 물론 작가의 고백이나 작품 제작 계기 따위를 물어 알 수 있지만, 사실 그림을 보는 입장과는 무관한 관심이다. 그리고 몇 작품에서 서사적 장면에 인물을 등장시키는 다른 관심을 보이지만 작품 전체의 흐름에 부합되지 못하고 간간이 시도된 또 다른 서술적 관심으로 여겨진다.
그러고 보면 김영순의 작품에서 모호한 얼굴로 여겨지는 것은 남자들이다. 간혹 여자의 형상도 없지 않지만, 여자의 경우는 표정이랄까,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형상을 보여준다. 남자로 여겨지는 얼굴은 뭉개진 것은 아니지만 형성중인 형태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의 흐름이나 논리와 무관하게 느닷없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 모습에 눈을 뗄 수 없다.
이런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 풍선 같은 형상을 한 선명한 색상의 얼굴이 화면 중앙에 덜렁 배치되어 있는 작품 <2010-1>이다. 채도가 낮고 희미한 형태에, 붓 자국마저 불명료한 그의 작품에서 이 작품만 선명하고 밝은 색상이다, 게다가 눈동자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어디에도 자신의 시선을 주지 않는다. 보는 이가 그에게 시선을 주고, 그 시선을 떼지 못한다. 보는 이의 내면으로 시선이 전환된 셈이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공간, 알 수 없는 형태들은 더 이상 어떻게 그려볼 수 없는 형상들이다. 표현의 서툶으로 드러나는 삶의 그늘에 가닿는 어떤 시선이다.
이런 읽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과 형상들은 그리기에 서툰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작가 자신이 그런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과감하고 결기 있게 작품화 시키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암튼 그의 얼굴은 몸에 부착된, 유기적인 얼굴이 아니라 몸에서 자유로운 얼굴이다. 몸을 떠나 자유로운 얼굴이라! 그리고 어디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얼굴 아닌 것들에 대한 보기, 알기, 감각하기, 생각하기, 다른 것 되기가 아니겠는가. 그의 얼굴은 그런 역할을 한다. 희미한 색상과 형태, 구성, 배려 없는 배치 등은 그저 솟아나는 형상만이 가능하게 할 뿐, 기존하는 미술어법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아니 미술문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어떻게 더 잘 그릴 수도 없는, 어설프고 경험 없는 그리기, 생성되려는 욕망의 대책 없는 드러남에 다르지 않다. 충분한 표현 학습이 안 된, 자신의 내적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딸려가는 순간, 생각과 느낌을 갈무리하고 온전하게 표현하려는 경계에서 무어라 판단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 버린, 피할 수도 안을 수도 없는 그리기의 최소한을 보이는 서툶이다. 세계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그 욕망을 통제하기 전에 생성력이 먼저 달려 나온 것이다. 때로는 세상에 대한 억제하지 못하는 표현, 슬픔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보는 이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어설픔과 어색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아는 것, 잘 그리기보다 못 그리기를 통해 피할 수 없이 미어져 나오는 삶의 그늘을 지켜보는 것이 앞으로 몫이 아닐까.
강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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