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문 개인전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
2016.05.06 ▶ 2016.05.21
2016.05.06 ▶ 2016.05.21
박병문
삼방동 잉크젯 프린트, 2014
박병문
삼방동 잉크젯 프린트, 2014
박병문
철거중인 철암시장 잉크젯 프린트, 2014
박병문
철거중인 철암시장 잉크젯 프린트, 2014
박병문
관광 잉크젯 프린트, 연도미상
박병문
막장 잉크젯 프린트, 2013
기록으로 불러들이는 기억, 그 기억으로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9년이 되었다. 한둘이겠는 가만은 가슴이 저린 게 하나 있다. 생을 마감하는 시간 언저리에 와 계셨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고향 ‘간리’를 차로라도 한 번 둘러보고 싶다고 하셨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빨리 일어나서 손잡고 같이 가시자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고향 산천을 둘러보지 못하고 홀로 먼 길을 떠나버렸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다. 아버지께서는 혼백으로 당신의 고향을 둘러보셨을까 ...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사진가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은 사진가에게는 당신의 아버지를 과거 시간으로 여행 보내드리는 기억의 터겠지만, 그것을 읽는 나에게는 불효막심을 다시 한 번 또 끄집어내는 기억의 터다.
사진을 읽고 느끼는 감성은 찍는 이의 소유도, 보는 이의 소유도, 읽는 이의 소유도 아니다. 사진은 지난 시간을 슬픔으로 머금고, 그 슬픈 시간은 각 사람에게 각기 달리 전달된다. 사진의 시간은 과거이고, 모든 사진은 슬프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데서 나오는 말이다. 사진가가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어 포착해낸 살아 있는 심상(心想)은 카메라라는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죽은 과거의 이미지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이제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그 기억은 나의 기억을 넘은 다른 이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경우 사진가 박병문이 기록한 대상들의 이미지는 그의 아버지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기억의 터가 된 그 이미지들은 사진가가 지닌 심상을 곧이곧대로 전하지만은 않는다. 그 이미지는 살아 있는 사진가의 눈에서 출발하지만 맥락이 배제된 채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단면의 상(像)이 되어 보는 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기계로 만들어진 일반화 된 이미지에 익숙해 있고, 그에 관해 학습된 감성에 쉽게 젖어 있어서, 감성을 ‘일반적으로’ 소비하곤 한다. 그러니 그 이미지로부터 특별히 자신만의 돌출 된 아픔을 갖는 일이 그리 잦지는 않다. 그런데, 사진이 사람을 울리는 건 참, 느닷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값싼 감성 속에서, 사진을 읽는 이의 기억이 느닷없이, 정말이지 아무런 징후도 없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생긴다. 사진가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사진은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불규칙적으로 느껴지고, 개인적으로 이해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진가 박병문은 사진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을 불러드리려 하였지만,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하나하나의 이미지와도 아무런 관계없이, 그 사진을 읽는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고향을, 슬픈 시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은 크게 두 개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출발은 혼백의 시선이 맡는다. 혼백이 있다면, 이 땅을 떠나기가 그렇게 싫어서 한 번만 더, 딱 한 번 만 더 보고 또 보고 하였을 어떤 혼백이 있다면, 그 혼백이 떠나가는 그 땅을 보는 그런 시선이다. 이곳저곳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혼백이 흠향하듯, 아버지가 지난 그 시간 속으로 기억의 여행을 떠나시도록 죄다 보여주고 싶은 존(尊)과 효(孝)의 시선이다.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로 올라갔다가, 핑 하니 한 바퀴 둘러보고 동네로 내려와 골목길을 훑고, 연탄재도 맡아보고, 그 소주 집에도 가 앉아보고, 철책 담에 기대어 한 숨 한 번 쉬다가, 평상 비닐 장판은 여전한지 만져보기도 하고, 그러다 먼저 떠난 이들을 만나러 간다, 저 세상에서라도 복을 많이 받으시라 해서 흥복사(興福寺)로. 그러다가 어느덧 사진가의 시선이 바뀐다. 사진가는 이제 광부가 되어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 아닌 아버지들과 함께, 사진가 스스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인차를 타고 갱도로, 막장으로 들어간다. 갱목 작업 후 탄을 캐고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쉰다. 다시 인차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마을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시장에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집도 무너지고. 다들 어디 갔을까? 사진가는 관찰자로 출발했는데 어느덧 참여자로 바뀌더니 이내 다시 관찰자가 된다. 시선이 바뀌면서 읽는 이의 감정이 바뀐다. 아들이 바치는 사진을 읽는 사진가의 아버지는 어떠했을까?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은 1930년대 미국에서 정립된 다큐멘터리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는 작가노트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이 작업은 2009년부터 2015년까지의 기록물이다.” 사진가의 감정이 과하게 들어갔거나, 부자연스럽게 대상을 은닉하거나, 구도를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한다거나 한 사진이 없다. 비유, 수사, 상징 혹은 상상과 돌발이 만들어낸 창조적 표현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사진 이미지 하나하나도 그렇지만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내러티브가 최대한 객관적이고 기록적이어야 한다는 정신을 충실히 지킨다. 전형적인 거리두기 방식으로 이끌어낸 주류로 자리 잡은 다큐멘터리 양식에 충실하다. 그런데 뭔가 또 다른 사실 하나가 있다. 카메라로 만든 기록이지만, 이것은 기계로 뽑아낸 냉정하고, 객관적인 실재를 보여주고자 한 기록이 아니다. 사실을 담되, 사진가만이 갖는 연기(緣起) 속에서 아버지의 빛바랜 기억을 위해 대상을 해석한 기록이다. 대상은 객관적으로 재현되었지만, 그 안에 불안정하고 돌발적인 기억의 터를 자리 잡아 앉혔다. 사진가가 그 객관적인 실재를 통해 불러들이려는 기억은 일정하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도 그렇게 재현할 수도 없다. 그래서 겉으로 보는 이미지는 대상을 냉정하게 보여주는 실재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실재 뒤에 도사린 기억이다. 그 붙들 수밖에 없는, 아니 붙들어야 하는 그 돌발적이고 잡스러운 기억을 재현하고자 사진가는 7년의 시간 동안 대상의 무미건조함 앞에 서 왔다. 그 앞에서 아버지의 지나간 시간이 자아내는 아픔과 슬픔의 기억을 길어 올린다.
객관적 대상 안에 기억을 집어넣으려니, 나만의 해석이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사진 이미지들의 색이 검어지고 톤이 흐릿해진다. 석탄이 검어서가 아니다. 흘러가버린, 사라져버린, 자취를 감춰버린 시간에 대상들이 검게 다가와서 검고 흐릿하게 된 것이다. 그 많은 광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 아버지가 보낸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막장으로 들어간 그들을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빌고 또 빈 기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진가가 객관적 기록을 넘어 예술을 차용해 창조한 기록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이 즈음에서부터다. 기록하되 예술의 형식을 빌려 기록한 것, 그래서 단순한 다큐멘트가 아닌 사진가의 기억과 얽힌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된 것이다. 기록이되 예술이고, 예술이되 기록이다. 그래서 1930년대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스트 사진가들이 해온 맥락으로 이 작업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두골산 능선 끝에 자리 잡은 육칠십 년대 강남처럼 번쩍번쩍 했던 그 사라진 과거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진폐의 고통에 괴롭게 살아가는 그 산업 전사들을 기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국가에 그 책임을 묻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기록하고자 한 것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그 아버지에게 그 때 그 시절, 그 삶터를 보여주어 그만의 기억의 세계로 떠나게 해 드리고 싶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린 것을 기록하되, 거시적이고 구조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미시적 세계로 기록한 기억에 관한 것이 된다. 그의 이미지 하나하나가 다른 여러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보여준 것들과 겉으로 보일 땐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기록과 기억의 이중적 구조 때문이다. 사진가 박병문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라져 가는 탄광 마을의 풍경이 아니고, 아버지가 헤쳐 지나왔을 그 힘들고 안타까운 시간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대상을 가지고 재현하는 것이다. 난, 이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 사진이 앞으로 봐야 할 새 지평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 똑같은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 구조가 이질적인 것으로 중첩되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의도한 바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지며 그에 따라 그 작품의 위치와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 다큐멘터리. 박병문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전통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범주에 들어가 있지만, 새로운 지평을 향하는 것으로 내가 위치지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진가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에 그의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숱하게 많은 아버지들이 나온다. 사진가는 아버지가 아닌 그 많은 아버지들을 통해, 그 많은 아버지들의 거친 숨과 눈물이 쏟아진 그 장소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 사진집을 바친다. 사실 안에 사실 아닌 것을 숨겨 넣어 두는 것, 사실 아닌 것으로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사진이 갖는 매력이다. 그 아버지 아닌 아버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곳, 그 곳곳을 찾아 한 컷 한 컷 모아둔 그 우물 속에서, 그의 아버지가 신 새벽 두레박 던져 물 긷듯, 당신의 기억을 길어 올리길 바란다. 영롱한 듯 흐릿하고, 무거운 듯 경쾌한 그 기억들 말이다. 그 안에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_탄광촌 철암의 오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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