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현
untitled Gesso up, Gold leaf on panel, 144cm, 2007
김택상
Breath_s hue-heat waves (아지랑이_숨 빛_) acrylic, matt Vanish on canvas, 70x79cm, 2009
노병열
winter mixed media(밀가루, 채색한 돌), 120x270cm, 2009
정은주
Red Acrylic on Wood, 360x123x6cm, 2009
차계남
untitled 5348-1 sisil hemp, 200x75x200cm, 2001
김인겸
Space-Less Urethane Acrylic Coating on Stainless Steel, 138.4x15x140cm, 2009
남춘모
beam Mixed Media, 160x120cm, 2008
홍승혜
증폭 (Volume-Up) each, C-Print mounted on Plexiglass, 30×60cm, 2009
장승택
Untitled-Trans painting mixed media, 60x120cm, 2010
박기원
Width paper on oil color, 215x150cm, 2008
박종규
Layers, dimensions canvas on seat, 90x65.1cm, 2009
이교준
Void Veneerboard, 45.4x45.4x17cm, 2009
중심에서 주변으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황인 (아트 액티비스트)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지역미술이 갖고 있는 고민은 중층적이다. 우선 세계미술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지역성의 문제, 그리고 서울과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지역성, 이 둘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구 역시 서울이 아닌 지역(local)이라는 물리적인 조건은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구는 다소 특이한 미술환경을 가진 도시이다. 그곳에는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역사와 환경 그리고 미술에 대한 의식이 있다.
우선 대구는 서울을 제외하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미술가를 배출시킨 지역이다. 서울은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룬 연합도시이므로 실제로 미술이라는 사태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을 꼽으라면 대구가 될 것이다. 작가의 숫자뿐만 아니라 미술대학, 화랑의 숫자와 미술마켓의 역량도 그렇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 갤러리스트 중에도 이 지역출신들이 유난히 많다. 이런 압도적인 밀도의 차이는 대구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들과 비교한 통계수치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대구가 미술 파트론 및 미술인이 배출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어느 지역보다도 일찍 체계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대구로 하여금 다른 지역과 극적인 차별성을 갖게 하였던 사건은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인, 삼십 몇 년 전에 있었던 대구현대미술제(1974-79년)가 아닌가 한다. 물론 지금처럼 서울이 문화를 비롯한 정치, 경제 등 모든 부문을 일방적으로 독주하는 환경은 아닌 시대적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당시에 대구에 국내 최첨단의, 그리고 국제적인 교류를 통한 대규모적인 현대미술 전시가 열렸다고 하는 건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해외미술의 새로운 경향들이 서울을 제치고 대구에 먼저 소개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일이다.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현대미술의 서울과 대구라는 지역이 현대미술운동의 중심과 주변의 위치좌표에 있어 역전에 가까운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구현대미술제가 일구어 놓은 현대미술의 중심의 위치좌표에 대한 역전의 자부심은 이 지역 작가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점이 현대미술에 있어 대구의 정체성을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게 하고 나아가 이 지역 작가와 화랑들이 현대미술을 대하는 입장과 태도에 있어 다른 지역과 차별짓게 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번 ‘inside out전’에 참여하는 작가들 중 이교준, 차계남, 남춘모, 박종규, 정은주, 노병렬 등은 대구지역 출신이면서 동시에 대구를 베이스로, 김인겸, 구자현, 천광엽, 김택상, 장승택, 홍승혜, 박기원 등은 출신이 전국을 망라하면서 서울을 베이스로 하는 작가들이다.
섬세하게 분류하면 이들 작가들의 작업경향은 하나의 키워드로 묶이기에는 너무 다양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전시참여의 소박한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대구에서 전시를 한 경험이 있거나 적어도 대구적인 미술의 흐름을 지지하는 서울을 베이스로 하는 작가군, 그리고 서울의 작가들과 결을 같이 하는 대구 작가군이 되겠다. 이는 다소 거친 판단이긴 하지만, 하나의 특징적인 묶음으로 엮을 수 있는 대구적인 현대미술의 현상과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증명에 다름 아니다.
이번 전시 역시 이런 흐름에서 기획된 것이다. 그 흐름과 경향을 대범하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미니멀이 아니라면 적어도 미니멀리스틱한 작업의 경향들이다. 미니멀리즘에 가깝다고 한 까닭은 이들의 작업이 대체로 자신의 작품을 작가 자신의 1인칭적인 내면의 표현과 동일화하는 입장을 약화, 희석시키는 대신 작가 자신을 3인칭의 입장에 놓고 조형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프레임을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은 조형의 구조에 숨어있는 반복적이고 절대적인 질서를 명확하게 밝혀내고 이를 거두절미 단호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최소한의 질서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최대한의 세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기하학의 원리와 비슷하다. 공간적인 질서(order)를 위해 공간의 최소단위인 유니트(unit)를 동원하거나(김인겸, 이교준, 구자현, 차계남, 남춘모, 정은주), 시간적인 순서(order)에 따라 재료와 사유의 층위(layer)를 동반하게 되며(김택상, 장승택, 노병렬), 이 둘이 결합하기도 한다(천광엽, 홍승혜, 박종규, 박기원).
미니멀리즘은 최소의 공간과 질서에 기거하면서 최대한의 세계를 지향, 지배한다는 점에서 제국이 멀고 넓은 주변부와 노이즈가 가득 찬 변방을 통괄하려는 중심의 통치프레임이었던 공법(公法)으로서의 율령제(律令制)를 많이 닮아 있다. 미니멀리즘은 생명력이 가득찬, 그러나 정체불명의 에너지인 노이즈로 충만된 주변부에 외롭게 머물고자 하는 조형의지가 아니라 이 모든 노이즈들을 관통하며, 강력한 질서의 재배치에 의해 이 노이즈들을 무화(無化)시키려고 하는 기하학적인 사유와 의지를 지지한다.
70년대 후반에 있었던 대구현대미술제는 당시 아직 글로벌리즘을 맞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중심은 중심이되 ‘국지적인 중심’(center of localism)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한국현대미술의 수준이 로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70년대의 일본현대미술의 사유의 능력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역시 로컬의 영역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가 있다. 서울과 지역,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긴 해도 이들 로컬리즘들을 통합하고 초월할 만한 강력한 질서, 기하학적인 역량이 당시에는 없었다. 대구가 한때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에 섰다고는 하나, 당대의 현실적 여건이 율령제를 확보한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보다 본질적으로 강력한 중심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셈이다. 여기다 이 미술운동이 장기적인 지속성을 띄면서 중심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해 나간 것도 아니다.
당시 대구현대미술제에서 행해졌던 다양한 미술장르의 전위적인 실험들 중, 많은 가능성들이 멸실되고 이후 대구지역에서 연속성을 갖고 진행되어온 미술의 한 흐름이 미니멀 혹은 미니멀리스틱의 경향성을 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대구현대미술의 ‘중심’에 대한 각별한 미련과 열망을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후 이들 경향성을 지닌 작업들의 사유공간이 무한대를 향한 균질공간을 향하기보다는 미술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여러 환경들의 역진화(逆進化), 지역적인 순혈주의와 연계되면서 국지성을 띄는 개별적 토포스(topos) 공간적 개념의 사유, 로컬의 중심이라는 좁은 틀 속에 처하게 됨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원래 미니멀리즘이 지향하는 중심에의 의지는, 1인칭 혹은 1인칭 복수로 구성된 순혈주의의 로컬리즘이 가지는 커뮤니티(共, community)의 중심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여 3인칭의 세계가 공(公, public)이라는 초월적인 무한대 공간을 향한 증식이 담보되는 ‘확장중심’(center of dilatation)을 목표로 삼으려 한다. 조형의 본질적인 중심, 확장중심에 섰을 때만 미니멀리스트가 발견한 조형의 반복적인 질서가 형태를 바꾸지 않고 영역을 무한대로 확대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대구의 현대미술이 한 세대 전에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다소 주춤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은 대구현대미술이 보여주었던 도전정신과 열정 그리고 그 성과들의 지점이 보다 넓은 공간을 향한 ‘확장중심’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국지적 중심으로 머물러버린 데에 그 까닭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대구현대미술제의 미술사적 가치와 이 지역 현대미술작가들의 역량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대구라는 공간이 더욱 개방, 소통되는 가시적 성과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 서울을 베이스로 한 작가들과 한 전시장에서 전시를 함으로써 그동안 막연하게 산발적으로 보여 온 이들의 역량과 '내부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inside out) 집단적 발언의 양상을 보여줄 것이다. 이 발언의 궁극적 목표는 한 세대 전에 있었던 로컬리즘의 실험과 충돌을 넘어서서,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무한대 공간을 향해 펼쳐지려는 새로운 ‘중심’을 담보하기 위한 사유의 실험, 행위의 열림으로 향하고자 한다.
미술의 상품성이 작품성을 압도하며 왜곡하는 금일의 미술계 상황을 감안한다면, 흥행성과 쇼맨십이라는 경박한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이라는 키워드를 의식하며 조형의 본질과 진정성을 추구하려는 대구현대미술의 고집스런 한 흐름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존중하는 일군의 서울의 작가들이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중심에 대한 강박관념은 상대적으로 중심에 가까이 접근했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활동하는 서울 작가들 쪽이 다소간 더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런 점에서 서울과 대구는 비슷한 미술행위를 두고도 언제나 적정거리의 스탠스를 유지해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대구와 서울이 함께 하는 이번 전시에서 그 스탠스는 무너지기도 하고 또 새삼스레 확인되기도 할 것이다. 대구와 서울,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주변인지, 또 어디가 호모(homo)이고 어디가 헤테로(hetero)가 되는지 모두 좋은 일이다. 어차피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을 '뒤집어보고자 하는'(inside out) 전시이므로.
1) 20년 전 일본 오사카 야마구치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의 타이틀 ‘minimal/minimalistic’에서 차용. 도널드 져드 등 미국 작가들은 미니멀, 이우환 등 일본작가들은 미니멀리스틱 작가로 대별하였다.
2) 확장중심: 기하학의 용어로, 어떤 도형을 형태는 바꾸지 않고 크기만 바꿀 때 그 중심이 되는 점.
1955년 출생
1945년 출생
1959년 출생
1961년 출생
1966년 출생
1964년 출생
1966년 대구출생
1955년 대구출생
1959년 출생
1964년 출생
1953년 대구출생
1959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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