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빨강-피2
2017.01.20 ▶ 2017.02.25
2017.01.20 ▶ 2017.02.25
이보람
시체들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140×140cm, 2014
이보람
시체들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140×140cm, 2014
이보람
시체들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182×227cm, 2016
이보람
시체들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182×227cm, 2016
이보람
1100_리넨에 피그먼트, 홍화씨유, 테레핀과 기타 보조제를 섞어 만든 총 1100ml의 물감 112×145cm, 2016
희생의 이미지 - 하얀 망각과 붉은 기억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붉은 피는 이보람의 화두이다. 그 피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와 살육의 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의 현장에서 목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수한 전쟁과 재난을 당면한 이에게는 일상처럼 보이는 이미지인 붉은 피! 그것은 이보람에게 있어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읽는 키워드가 된다.
탈색의 거리 두기와 중성성 - 소비되는 희생자 이미지
테러와 재난으로부터 발생되는 붉은 피의 주체, 그들은 희생자이다. 그들의 희생은 권력자들의 헤게모니 담론으로부터 소비된다. 그들을 정치 담론화하고 이슈화하며 심지어 상업화하는 권력자들뿐 아니라 권력자로부터 이격되었으나 그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매스미디어에 의해 공모의 그물에 걸려든 모든 타자들에 의해서 소비된다. 날마다의 경쟁에 지쳐 핍진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타자들의 일상의 그늘에서, 희생자들은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이웃의 이야기’로 일상처럼 우리에게 소비된다.
그렇다, 우리의 눈에 쉬이 보이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서 그리고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희생자를 일상처럼 소비하는 우리는 아무런 개혁과 개선의 의지를 재기하지 못하는 방관자이다. 동시에 거대한 권력의 지형도 속에서 자행되는 재난과 테러의 희생자들을 무관심 속에서 함께 소비하는 공모자이기도 하다.
작가 이보람은 자신의 회화 속에,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와 재난으로부터 발생하는 희생자의 이미지를 전면에 대두시키면서 이러한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에 경종을 울린다. 당신들에게 소비되는 희생자의 이미지들이 어느 날 당신들 스스로가 될 수 있다는 비판적 메시지를 함께 전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판적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보람은 자신의 회화 속 희생자의 이미지와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방관적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방관적 관찰자’는 형식적으로는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방식과 내용적으로는 심적인 거리를 좁히는 방식을 모두 취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러한 입장은 작가 이보람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전쟁, 테러, 재난 속 희생자의 이미지들을 인터넷을 검색해서 취하면서도 그것의 통시적(通時的)인 역사적 맥락과, 공시적(共時的)인 사회적 맥락을 탈각시키고 익명화, 불특정화시키면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사실’로부터 떼어 온 이미지를 담고 있는 작가의 <희생자>, <시체들> 연작에서 희생자나 시체처럼 보이는 명확한 ‘사진적 진술(photographic statement)’은 국적, 상황 모두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 장치를 통해서 특수성, 구체성이 제거되면서 익명화, 불특정화된다. 그것은 클로즈업된 희생자의 이미지만을 배경으로부터 캡쳐해 온 까닭도 있지만, 하얀 석고상처럼 인물을 탈색하여 표현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얀색은 모든 사건들을 중성화(neutralization)시킴으로써 사건의 특수성을 탈각하고 불특정시키면서 희생자를 익명화시킨다. 더러는 히잡(Hijab)을 두르고 있는 여성을 통해서 민족과 인종을 가늠해볼 수 있기도 하나, 흰색의 천으로 싸여 있는 흰색의 주검들에게서, 또한 얼굴과 의복이 모두 흰색으로 탈색된 군상의 모습에서, 더 이상의 정보들은 사라져 있다. 이미지 옆에 띠처럼 자리한 ‘아. 어’와 같은 외마디 비명의 텍스트들이 비극의 참사를 유추하게 할 따름이다.
이처럼, 작가 이보람이 언급하는 “탈색된 화면을 이루는 이미지의 논리”는 우리가 희생의 방관자로서 혹은 공모자로서 느끼는 “연민과 죄책감, 관음증과 호기심”을 한 덩어리로 설명하기에 족하다. 즉 탈색의 화면 속에서 정초시키는 ‘이중의 거리 두기’가 우리로 하여금 한꺼번에 “경악과 슬픔, 연민, 무기력함을 느끼고 손상된 육체에 대한 관음증과 비극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끌리며, 인과가 애매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보람이 만드는 희생자 이미지는 방관과 공모를 은닉한 채 진실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우리의 ‘하얀 망각’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비판적 메시지와 다를 바 없다.
붉은 피 - 망각으로부터 되살리는 기억
최근에 작가 이보람이 천착하고 있는 ‘붉은 그림’은 어떠한가? 형식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하얀 망각’을 지우고 그 위에 ‘기억의 흔적’을 중첩시켜 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방관자나 공모자가 아닌 입장에서 처연한 사건의 진실 앞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런 차원에서 이것은 이전 회화가 천착했던 탈색을 통한 사실에 대한 ‘중성화’ 혹은 ‘거리 두기’의 전략보다 여러 사실들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에 대한 ‘개념화’ 전략에 가깝다.
최근의 개인전 《피-빨강-피》에서 선보였던 붉은 그림 〈1100〉을 보자. 이것은 리넨 천에 총 1100ml의 ‘물감을 섞은 의사 혈액’을 가득 담고 있는 작업이다. 이 작품은, 평면 작품인 <시체들>에 그려진 희생자들의 키를 근거로, ‘소아발육표준치’ 도표를 참고하여 나이와 몸무게를 추정한 다음, 6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체중의 8~9%로 추산되는 혈액의 양을 ‘피그먼트 홍화씨유와 테레핀 그리고 기타 보조제’를 섞어 만들어 천에 적신 결과물이다. 그것은 이미 빨간 물감의 수액을 증발시켜 붉은 안료와 미디엄의 정수만 남긴 흔적들이다.
자연스럽게 ‘붉은 피’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구체적인 ‘사실들’을 ‘사실’로 단수(單數)화시키고 개념화한다. 즉 희생에 관한 여러 구체적인 사실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을 붉은 피로 개념화하여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은 <희생자>, <시체들> 연작에서 선보였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객관화’와 사건에 대한 ‘거리 두기’를 다른 방향으로 극대화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즉 작가의 말대로 두 연작 사이에서 선보였던 사실들에 대한 객관화와 거리 두기의 장치들(희생자 위에 오버랩되는 성상의 아이콘이나 금색 후광과 같은 장식성 그리고 죽음과 금기를 상징하는 검은 사선 등과 같은 중층적 이미지들)이 야기하는 균열을 보다 더 본질적 차원에서 정리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균열의 “틈을 벌려 그 안의 어떤 것을 가장 표면으로 끌어내려는 시도”이자, “보고 수집하고 그리는 과정들에서 생기는 거리를 줄이고 싶었던” 또 다른 시도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작가 이보람의 이전 작업에서 사실에 대한 객관화나 거리두기의 회화적 장치가 ‘연민과 공포, 관음증과 호기심’과 같은 엇갈린 태도를 교차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사실에 대한 명료한 비평적 메시지를 드러내는데 있어 부족한 것 같다는 작가의 자성(自省)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최근 이보람의 붉은 그림은, 사실을 오염시키는 중층화의 장치보다 사실들이 공유하는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자체가, 사실에 대한 ‘객관화’와 ‘거리 두기’에 있어 보다 더 유효하다는 결론에 이른 듯이 보인다. 형식적으로 추상, 내용적으로 사실에 대한 본질 탐구가 그것이다.
이보람의 최근작인 붉은 그림은 이제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되살려 사실을 직접 대면하고자 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대면하는 예술가적 발언을 토해 내듯이 직접적으로 언술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세계와 사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허구화하는 일 역시 필수적이다. 작가는 붉은 그림의 옆면에 희생의 사건이 발생했던 일시와 장소를 기록함으로써 사실(fact)에 근거한 작업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그 아래 그림의 완성 일시를 기록하여 사실(fact)에 대한 허구(fiction)의 조합이라는 회화의 팩션(faction)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실을 ‘오늘, 여기’에 담담한 ‘비판적 해석(critical interpretation)’으로 소환하는 그녀의 회화작업은 애초에 소환된 사실이 오염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처음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남아있길 기대한다. 마치 ‘붉은 기억’처럼 분명 첫 모습 그대로이되, 변질되지 않은 채 보다 선명하고 보다 더 강렬한 모습으로, 그리고 타자의 기억과 해석이 아닌 나의 기억과 해석 속에 정초되어 있는 그 ‘처음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보람의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는 이러한 최근의 작품 세계관을 드러냄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
“붉은 그림들의 붉은 색은 ‘피—>빨강—>피’를 순차적으로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가장 마지막 단계의 ‘피’다. 그림의 빨강은 단순한 빨간 물감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흘린 피임을 암시한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의 ‘피’의 거리가 좁혀지길 원한다.” ●
1980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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