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익 개인전 - 어제와 같은, 같지 않은
2017.04.14 ▶ 2017.05.10
2017.04.14 ▶ 2017.05.10
서상익
272-귄위적초상 Oil on canvas, 53x45.5cm, 2017
서상익
Anotherday-느와르적풍경 oil on canvas, 130.3x80.3cm, 2017
서상익
Anotherday - 11월의 비 Oil on canvas, 145.5x97cm, 2016-17
서상익
Anotherday-어디로 Oil on canvas, 162.2x97cm, 2016-17
서상익
인물연구 - 소정 Oil on canvas, 21.7x15.8cm, 2016
서상익
인물연구 - 윤주 Oil on canvas, 53x45.5cm, 2016
서상익
인물연구-리와와 코기 Oil on canvas, 53x45.5cm, 2017
서상익
대화 Oil on canvas, 21.7x15.8cm/22x16cm, 2017
서상익
화가의 초상 Oil on canvas, 2016,2017
서상익
화가의 성전3 Oil on canvas, 2016-17
서상익
인물과 공간 - 삼청동 카페 Oil on canvas, 53-45.5, 2016
이름만 들어도 작품을 연상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 많은 작가가 바로 이런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작품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일에 성공한 작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그 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 작가를 상징하는 대표적 스타일은 그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5년 전 서상익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해도 그는 초현실적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작가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평평한 면 분할이 이루는 실내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광경을 담은 회화로 개인전은 물론 현실과 꿈, 상상과 같은 주제를 다룬 기획전에 다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서상익은 다양한 주제를 담은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작업실에서 본 최근의 변주는 더욱 다양했다. 매끈한 도시풍경부터 두꺼운 터치가 돋보이는 숲 풍경, 오랫동안 진행한 초상화까지,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그림들이 모여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할 때의 불안감에 관해 물었다. 여기에 서상익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보다 하나로 규정되는 것이 예술가들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무엇을 그리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표현법이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작업실에 와보니 그동안 못 보던 스타일의 작업이 많다. 서상익을 아는 사람들은 보통 비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실내공간, 미술관 연작이나 초상화를 떠올리기 쉽다. 이런 예상을 벗어나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을 지속하다 보면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질 것 같은 우려는 하지 않나?
내 작품은 하나의 주제나 소재로 귀결되지 않는다. 물론 초기에는 내러티브를 강조한 극적 장면을 선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 공간은 이야기 구성에서 하나의 보조수단이었지 주제는 아니었다. 2013년 선컨템포러리에서 개인전을 할 당시 공간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풍경화를 진행하기도 했었다. 완전히 흡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의 연구 과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정체성을 만들라는 말에 굉장히 신경 많이 썼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특정한 하나만을 그리는 사람은 없다. 정체성은 붓질에 나오지 내가 어떤 대상을 그린다고 나오는 건 아니다.
2008년부터 꾸준히 개인전을 선보이는 것 같다. 이번 4월에도 아트팩토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데 준비하면서 특별히 염두에 둔 것들이 있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개인전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겠다’하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주제의식을 갖고 전시를 준비는 편이 아니다. 그저 내가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 그러니까 연구하는 과정 중에 전시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작업들이 펼쳐져 전시가 산만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개인전이 아니라 그룹전 같다고도 하더라(웃음). 그런데 나는 굳이 컨셉을 가지고 주제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실험에서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작가의 정체성이 ‘무엇을 그리는지’ 혹은 ‘어떤 독특한 구성방식을 갖고 있는지’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한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그가 대상, 사물, 세상,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여긴다. 이 작가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가? 이게 결국 궁극적인 작가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을 그리든 표현방식을 고민을 하게 됐다.
표현방식이란 그림 그리는 테크닉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소재를 말하는 것인가?
전자에 가깝다. 회화라는 매체에서 표현방식은 붓질로 드러나지 않나. 물감을 다루는 방식이나 붓질도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근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리히터가 대상을 흐릿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지에 대한 불신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세상에 분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충돌하는 곳이다. 카오스만이 진실이라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결국 이것이 표현방식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전에는 그 개념을 이야기로서만 구성하고 그리는 방식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스스로도 작품을 볼 때마다 아이러니를 느꼈다. 캔버스에서 느껴지는 터치, 색, 표현방식이 뭔가 불편했던 거다. 그래서 요즘은 대상을 선명하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한다. 붓으로 단단하게 다듬어가지 않는 거다. 일부러 흩트리고 깨뜨린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 어느 순간 알아서 기능하는 느낌이다.
이 도시풍경은 언제 완성한 작품인가? 지금 말한 내용과는 정반대의 그림 같아 보인다. 아주 섬세히 잘 다듬어 그린 풍경화 같은데.
한 달 전에 그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 서양미술사의 선례들이 떠오른다. 르네상스기 플랑드르 지역 화가들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보석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리던 경향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전체 화면에서 보면 서로 조화롭지 않고 딱딱한 느낌이 있다. 반면 이탈리아 화가들은 적당히 그림자로 덮고 가장자리를 뭉갰는데도 전체적으로 균형 있을뿐더러 이미지가 오히려 더 생생하기까지 하다. 미술사학자 뵐플린(Wölfflin)도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나누며 선의 의미가 사라지면 회화적인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 보자면 궁극적으로 지금 회화성 자체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관점과 표현방식에 대한 연구를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회화작가니까 붓질로 나의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붓질이 어떻게 균열 없이 옮겨질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만일 여기에서 미술사적으로 연결고리를 만들면 확장할 이야기가 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화가의 성전>도 이런 고민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첫 개인전한 이래로 제일 마음잡고 그렸던 게 <화가의 성전> 70개였다. 왜 작업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시점이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게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화가의 성전>에서 그린 작가들은 나한테는 스타이자 신앙이 되는 인물들이다. 이 작가들의 초상을 그리고 그 배경으로 대표 작품을 넣었는데, 작품들이 다 천차만별이었다. 뭉크부터 워홀까지. 지극히 당연한 거지만 하나의 답이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각자가 스스로 추구하는 답을 믿고 가야 한다.
아까부터 숲 풍경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스타일이다. 물감도 두껍게 올려서 마티에르도 나타냈다. 도시풍경도 새로웠는데 이 작품은 완전 일상에서 일탈한 것 같은 느낌이다.
1년 정도 진행했고 이제 마무리한 작업이다. 도시풍경과 보기에는 달라 보이겠지만 똑같은 자세로 그렸다. 물론 관객들이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겠지만(웃음). 사물을 눈으로 보는 그대로 옮기기보다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더 열어둔 작품이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이미지라는 것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초기 작업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가, 기억은 확실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나왔다. 그때에는 내가 보는 방식과는 다르게 세계를 단단하고 분명하게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세상이 분명하다고 느끼지 않음에도 대상을 분명하게 그리니까 균열이 왔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아까 얘기했듯이 사진 같은 그림과는 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나는 초기작에서 모호함을 강화시켜주는 장치를, 사진 같은 인물과 충돌하는 비현실적 배경과 상황 묘사에서 온다고 본다. 그 균열에서 나오는 기묘함 때문에 지금 얘기하는 불확실한 현실이 오히려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도 그림 안의 요소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만 긴장감이 강하게 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한창 초현실주의적인 포토콜라주 작업들이 성행했다. 그걸 보면서 이런 형식은 사진이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그림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일단 그림으로서 얘기하고 싶다.
강박에서 벗어난 것 때문인지 그림이 예전보다 편안해 보인다.
맞다. 어떤 사람은 그림이 단단해졌다고 하더라. 사실 해보고 싶던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회화로 옮길 자신이 없어서 옮기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부담감에 아예 엄두를 못 낸 거다. 그런데 이제 그려내는 것에 있어서 부담과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사라졌다.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한다. 궤도에 오른 팝아티스트가 모든 것을 버리고 피터 도이그처럼 그리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나?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그런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은 욕망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본다. 새로운 걸 시도하는 것보다 작가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예림 독립큐레이터 (Bazzar Art 4월호 기고글)
1977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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