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FOLLOW
1841년12월06일 프랑스 몽펠리에 출생 - 1870년11월28일
추가정보
1841년 프랑스 몽펠리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고 회화에 매료된 그는 의학 공부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그는 1859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862년에는 파리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파리에서 그는 의학 공부를 하는 한편 샤를 글레르의 스튜디오에 들어가 르누아르, 시슬리, 모네를 만났고, 이들과 함께 퐁텐블로 숲으로 가서 풍경화 작업을 했다.
프레드릭 바지유는 1864년 의사 시험에 낙방하자 회화에 전념하기 위해 의학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는 자신과 같이 들라크루아를 존경했던 세잔과 가깝게 지냈으며, 피사로와 기요맹과도 두터운 친분 관계를 가졌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작업실을 같이 쓰며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를 빌려 주는 등 너그러운 품성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에 인접한 바티뇰에 있던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화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바지유는 처음에 풍경화보다는 인물화에 초점을 두었다. 그의 붓 터치는 힘 있고 역동적이었지만 다른 인상파 화가들보다는 전통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그는 함께 그림을 그리러 다닌 모네와 르누아르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마네였다. 그의 자유롭고 강렬한 붓질은 마네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는 1866년부터 파리의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첫 해에는 출품한 두 점의 작품 중 한 점이 당선되었고, 1869년에는 《가족 친목회》가 입선되었다.
바지유는 모네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1865~1866)에서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임시 야전병원》(1865)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네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1870년에는 마네와 그의 동료들이 바지유의 《화가의 아틀리에》(1870)를 위해 모델이 되어 주었다. 특히 이 작품 속에서 이젤 앞에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키가 큰 바지유의 모습은 마네가 그려준 것이다. 이들 인상주의 화가들은 서로의 모델이 되어 주면서 그림 그리는 즐거움과 창작의 고통을 서로 나누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바지유는 자원입대해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로 사망함으로써 아쉽게도 187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상주의의 만개를 경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