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웅컬렉션 <宋英玉 탄생 100년>展-나는 어디에
2017.07.06 ▶ 2017.09.17
2017.07.06 ▶ 2017.09.17
전시 포스터
송영옥
어사, Couple Fishing 1958,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폐선, A Scrapped Ship 196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갈림(귀국선), Separation-ship return home 1969,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슬픈자화상, A Sad Self-Portrait 1973,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십자가, A Cross, 1978,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고독의왕자, Prince, Looking Lonely 1984,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투견, Struggle Fighting dog 1987,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work 1972,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5.17-`80광주, 5.17-'80 Gwangju 198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개, Dog 1987,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부상하는 돔, The Rising Dome 1975,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삼면경, Three Sides Mirror 1976,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여자마술사, Female Magician 1960,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정상의 돔, Dome-Shaped Summit 1970,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의 절규, 나는 어디에
김희랑 광주시립미술관 분관장
송영옥 탄생 100년전을 개최하며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재일작가 송영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정착하여 일관된 주제의식과 독창적 작품세계,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는 재일 1세대 대표 작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갖추고서도 불운한 시대를 짊어진 운명 탓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채 1999년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송영옥(1917~1999)은 1917년 제주태생으로 소학교 4학년 때 측량기사인 부친을 찾아 오사카로 건너가 1944년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간사이(關西)종합미술전, 일본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선 후 1957년부터는 동경에서 자유미술협회전과 평화미술전을 통해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해방 후 두 차례 귀향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고, 조선 국적에서 한국(남한) 국적으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총련계 사람으로 분류되어 고향에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첨예한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 상황 속에서 남과 북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재일 한인으로서 차별과 소외, 가난이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 부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격변기 속에서 겪은 자기 정체성의 박탈과 가혹한 현실의 무게는 고스란히 작품에 스며들어 상처 받은 자들의 처절한 외침이나 절망적 상황에서의 몸부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 등을 주제로 다루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고통의 무게를 실은 작품들은 단순한 문제의식의 표출을 넘어서 보는 이에게 그 고통과 처절함이 절절히 전달된다는 점이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에는 송영옥의 작품이 현재 48점 소장되어 있다. 하정웅은 송영옥 작품을 광주시립미술관에 1993년 1차기증 19점, 1999년 2차기증 28점, 2003년 3차기증 1점 등 총48점 기증하였다.
이외에도 재일 기증가 하정웅은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에 5점, 수림문화재단에 1점을 기증하였고, 광주시립미술관 제7차 기증예정 작품에 송영옥 작품 1점이 포함되어 있다. 송영옥은 한번 제작해서 출품한 작품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기를 서너 차례나 반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와의 인터뷰에서 하정웅씨가 20여점, 송영옥 본인이 30여점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현존하는 송영옥의 작품 대다수는 하정웅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정웅컬렉션 송영옥 작품은 1958년부터 1992년까지의 작품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이 작품들에는 재일 디아스포라로서 질곡진 근대사의 큰 풍랑을 겪으며 시대를 증언해 온 송영옥의 시대 비판의식과 주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처럼 작가 송영옥은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빛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재일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초창기 재일 미술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남북 분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험난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비운의 예술가 송영옥의 삶과 예술세계는 재일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이에 재일 디아스포라의 이주역사와 1세대 재일 작가들의 활동상을 살펴봄으로써 송영옥 예술세계의 배경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재일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1910년 식민지 이후 몰락한 농민층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어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 최대의 상공업 지역이었던 오사카에 약12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할 정도로 재일 조선인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후 1939년부터 시행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력 충원 정책으로 인해 조선인 이주 노동자는 급증하여 1945년 종전 당시 재일 조선인의 수는 200만명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내 조선인들은 낮은 임금과 위험하고 힘든 노동 속에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다수의 재일 조선인들이 귀국하였으나 60만 명 정도는 생계나 정치적 문제,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상황, 귀환자의 재산 지참 제한이나 화물수량 제한 문제 등으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게 되어 재일 한인 1세대를 이루게 된다. 또한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사건,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밀입국함으로써 재일 한인의 수는 늘어난다.
1947년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을 선포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외국인 등록법’을 제정하여 재일 한인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하며 민족차별 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맺고, 한국(남한)만을 합법정부로 인정하여 한국 국적을 선택한 한인에게만 협정 영주권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조선 국적으로 남은 한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는 가속화된다.
이후 1991년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 사항〉에 의해 재일 한인 3세의 영주권 허가, 지문날인 제도 철폐, 국·공립학교 교원 임용기회 획득,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임용기회 확대 등에 합의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재일 한인들을 외국인 취급하는 일본 사회의 노골적 차별,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진 재일 한인 사회 내 분열,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냉대 등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이처럼 재일 디아스포라의 사회상은 다른 재외 한인의 사회상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식민국과 피식민국의 관계, 남한과 북한의 관계 등에서 기인한 다양한 요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재일 한인들의 옛 식민지 종주국에서의 디아스포라 생활은 국가와 사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재일 한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엄청난 억압과 무의식적 폭력으로 다가왔으며, 그들은 바로 거시적인 역사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초창기 재일 미술은 민족미술단체 결성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찾고 미술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을 실현해 갔다. 재일 미술 초창기 미술단체는 1947년 창립한 ‘재일조선미술가협회’, 1953년 창립한 조총련 단체 ‘재일조선미술회’, 민단 계열의 ‘재일한국백엽동인회 미술회’와 ‘재일코리안미술가협회, 1955년 결성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1959년 출범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약칭 문예동) 미술부’ 등이 있다. 해방 후 하나의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리고, 과거의 조선을 고수하던 사람들까지 더해져 일본 내 재일 한인 사회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와 민족적 정서가 뒤범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미술계 또한 민단과 조총련계로 분리되고, 민단 계열은 당시 유행하던 모더니즘 성격의 작품경향을 보인 반면, 조총련계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조국의 절박한 상황,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일본미술회’(1946년 발족)가 주도했던 1950년대 리얼리즘 계열의 전시 ‘일본 앙데팡당전’에 ‘재일조선미술협회’(후에 문예동 회원으로 연계) 회원 김창덕, 송영옥, 조양규 등이 참여하였고, 그 외에 백령, 표세종, 이철주, 허운, 오일 등 많은 조총련계 재일 미술가들이 참여하게 된다.
초창기 재일 미술단체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단체는 ‘조선미술협회’(1953년 결성)와 그 뒤를 이은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약칭 문예동, 1959년 출범) 산하 미술부이다. 특히 문예동 미술부에서는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문예동 회원과 민단 계열 작가 30명이 참가한 남북 연립전(1961년)을 개최한다. 또한 1962년에는 조총련계 화가들의 활동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화집 “재일조선미술가화집”을 발간(고급양장본, 원색 15점, 흑백도판 50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송선 문제가 일본 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1965년 한국(남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는 한일회담이 조인된 이후 일본 정부의 친 남한 정책에 따라 조총련계가 위기를 맞이하면서 문예동의 활동도 크게 위축된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미술계는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과 더불어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에 대한 회의로 다양한 전위적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한편에서는 전쟁 후의 정치상황, 반미기지 투쟁, 가까운 외국의 상황(한국전쟁 등) 등 주변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한 ‘르포르타주 회화’라 불리는 리얼리즘 경향도 등장한다. 초창기 재일 작가들이 보여준 리얼리즘의 경향, 즉 고국에 대한 그리움, 조국의 전쟁과 분단, 재일교포 사회의 가난과 차별과 상실감 등을 표현한 미술은 일본 리얼리즘미술사에서도 간과 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재일 미술에 대한 연구는 오랜 시간동안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 문제 등에 가로막혀 블랙홀과 같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재일교포 하정웅의 작품수집과 기증으로 전화황(全和凰), 송영옥(宋英玉), 조양규(曺良奎), 오일(吳日), 고삼권(高三權), 채준(蔡竣), 곽덕준(郭徳俊), 곽인식(郭仁植), 이우환(李禹煥), 문승근(文承根), 손아유(孫雅由) 등 1세대 재일작가의 작품이 상당수 광주시립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점점 1세대 재일작가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상황이라 그들에 대한 연구와 자료의 수집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송영옥의 예술세계 : 상처 받은 자의 절규
송영옥(1917~1999)은 1929년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던 아버지와 큰형을 찾아 도일 한 후, 낮에는 유리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상업중학교를 다닌다. 20세 때 오사카 나카노시마 서양화 연구소에서 배운 초상화로 수입이 나아지자 1941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한다. 오사카미술학교 재학시절인 1943년에는 오사카시전 가작상 수상,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오사카시립미술관 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며 關西종합미술전 다나상과 시장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적 기량을 인정받는다.
해방 후 몇 차례 조국으로 귀국을 시도하였지만 많은 양의 작품이 짐이 되어 승선위반으로 실패한다. 이후 간사이(關西)종합미술전(1946~1947)과 요미우리 앙데팡당전(1955), 일본 앙데팡당전(1956년 이후 여러 차례 출품)에 출품하였고, 1954년에는 재일조선미술협회 오사카지부장을 맡는다. 해방 후 1950년대 말까지 송영옥은 고향 제주도의 어부와 어선을 소재로 삼아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주로 그린다. 당시의 스타일은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한 멕시코 화풍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인물의 형태와 암울한 시대상황과 자신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어두운 색채와 두텁고 둔탁한 재질감과 배경처리가 특징이다. 이는 리얼리즘 경향의 초창기 재일 1세대 작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자 형식적인 면에서는 일본의 리얼리즘 경향 ‘르포르타주 회화’와 유사한 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라기에는 등장인물이 무표정으로 경직되어 있고, 어부들의 어둡고 고된 삶이 화면전반에 부각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유년기의 고단했던 삶의 기억이 고향에 대한 추억에 투영된 듯하다.
1957년 오사카에서 도쿄로 거주지를 옮긴 후, 송영옥은 자유미술협회와 일본미술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며 자유미술협회전과 평화미술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특히 1960년대 이후 1970년대 초까지는 북송선을 타고 떠나는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픔, 재일 한인들의 빈곤한 생활상, 개인의 선택이 아닌 시대적 운명에 의해 규정 지워져 버린 재일 디아스포라의 비애 등을 주로 그렸다. 작품 ‘문짝’(1966), ‘갈림_귀국선’(1969), ‘작품 69’(1969), ‘베트남’(1969), ‘검은비’(1971), ‘Work’(1972), ‘벽’(1973) 등을 보면, 화면의 대부분은 오래되고 낡은 콘크리트나 둔탁한 철판으로 가로막힌 벽이 차지하고 있다. 질곡진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낡고 거친 벽, 인간의 힘으로 밀쳐낼 수도 뚫어버릴 수도 없는 벽.... 그 벽에 난 어둡고 좁은 틈이나 깜깜한 구멍과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인간의 모습은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커먼 가면과도 같은 몰골이거나 때로는 해골의 모습으로 때로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이 대신하기도 한다. 종종 등장하는 사다리는 끊어져 있어 탈출구가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송영옥은 1962년 북송선을 타고 떠난 조양규를 통해 북한 사회의 실상을 체험하고, 남과 북 어느 곳도 선택할 수 없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수도 없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 시기 작품들은 역사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 특수한 국면 속에서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고, 어떠한 가능성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재일 디아스포라의 암담함과 처참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들에서는 벽이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한 인간존재의 소외에 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다루었다면,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그린 절규하는 인간의 모습은 보다 직설적으로 보여준 재일 디아스포라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국적을 유지한 채, 분단과 냉전이데올로기의 무거운 파장이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에 국가적·사회적 방치 상태에 놓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로 얼룩진 재일 디아스포라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분단된 두 개의 조국과 일본이라는 세 개의 거울 속에 갇힌 사람,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를 상징하는 커다란 손에 움켜쥐어져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사람, 감옥에 갇혀 절규하는 자, 한복을 입고 장구를 치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자, 얼굴을 파묻고 비통해 하는 자, 무거운 역사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쓰러져 있는 자, 영면의 순간에서 조차 비참했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처의 얼굴 등 송영옥의 인물상은 온몸으로 상처와 설움을 드러내고 있다. 송영옥의 작품은 대부분 인물이나 특정대상을 클로즈업시키고 배경은 단순하게 처리되며 어둡고 침울한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데, 이러한 표현방식은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극한 상황을 더욱 절박하게 전달시키는 작용을 한다. 특히 자화상 시리즈 중 ‘노래하는 사람’(1972), ‘슬픈 자화상’(1973), ‘십자가’(1978) 등의 인물은 기존의 단순화되고 표정이 없는 얼굴이 아닌 그들의 비애가 구체적으로 얼굴에 새겨지고, 내면적 비통함과 울분의 떨림이 배경에까지 전달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후반기 동물 시리즈에서 극대화되며 송영옥 그림에 생명력과 움직임, 전율과도 같은 역동성을 부여한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나 인간소외의 문제를 넘어서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베트남 전쟁, 히로시마 원폭피해 문제, 5.18광주민중항쟁 등 자신과 조국, 세계정세를 반영한 현실참여적 성격이 강한 작품을 주로 그린다. 특히 하정웅컬렉션 송영옥의 작품 중 히로시마 원폭 당시 유일하게 남은 건물 ‘원자폭탄 돔’을 그린 그림이 9점이나 된다. 송영옥은 평화의 상징이자 핵폭탄 참상의 목격자로 알려진 ‘원자폭탄 돔’을 통해 반전 반핵의 신념을 표출했다. 나아가 사회적으로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의 1/10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원폭피해자 보상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아냈다.
일반적으로 노년에 그려진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은데, 송영옥의 경우 1980년대에 주로 그린 ‘개’ 시리즈와 90년대에 그린 ‘동물’ 시리즈가 역작이라 할만하다. 동물 시리즈는 역사, 국가, 사회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린당한 개인의 인권과 생의 고통, 인간사의 다툼이나 욕심, 고독, 갈등 등을 개나 동물들에게 감정이입 시킨 작품이다. 한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로 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개, 분단조국을 상징이라도 하듯 서로의 다리를 물어뜯어 하나의 원을 만들고 있는 두 마리의 개,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야위어 땅에 앉아 퀭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개... 그들의 모습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고, 반항적이며 사납고 야만적인 동시에 불안하고 애처로워 보인다. 시인 강순은 송영옥의 개시리즈를 보며 “표현성이라고 말하며 허식을 가장하거나, 상처 입은 짐승과 같이 사납게 날뛰는 그림의 광란 속에 따뜻한 눈물의 감촉으로, 인간의 존재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송영옥의 회화에는 그러한 목소리가 끼워져 있다”고 말하였다. 송영옥이 동물들의 몸짓과 표정을 통해 보여준 떨림, 으르렁대거나 거친 호흡이 느껴질 듯한 긴장감과 밀도감은 역동성과 생명감을 끄집어내는 요소가 되고, 그들에게 이입된 인간의 미세한 내면상태, 즉 감정의 기류까지 전달하게 하는 힘이 된다.
글을 마치며
“1983년 9월 14일, 55년 만에 모국방문단 일행으로서 불과 2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으로 고국의 땅을 밟는다. 이 정도로 고국이 가까운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멀었던 것일까...”
1983년 모국방문단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소회를 적은 송영옥의 글이다. 무엇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 개인에게 역사는 이리도 가혹했던 것일까!
송영옥의 작품은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재일 디아스포라로서 받았던 고통과 상처에 절규하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자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일본 내에서의 차별과 국내 미술계의 무관심, 이데올로기적 잣대에 의한 평가절하 내지 외면 등으로 송영옥과 같은 재일 1세대 작가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이다. 하정웅컬렉션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송영옥의 예술의 흔적은 어쩌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칫 잊혀질뻔한 송영옥의 작품을 광주시립미술관이 소장할 수 있게 된 것이 매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올해 송영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시립미술관은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전시를 마련하였다. 전시기간 중 송영옥의 삶과 예술세계 뿐만 아니라 재일 1세대 작가군과 당시의 일본 리얼리즘 경향의 흐름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올해 12월에는 송영옥의 고향 제주도 도립미술관에서 순회전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통해 국내 미술계에 송영옥 조명의 계기가 마련되길 희망하며, 상처받은 자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917년 제주출생
불안 해방 일지 Anxieties, when Shared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C
2024.08.07 ~ 2024.11.23
STRA-OUT 4회: 권혜수, 김지수, 키시앤바질
씨스퀘어
2024.11.04 ~ 2024.11.23
장희춘: Happiness
장은선갤러리
2024.11.13 ~ 2024.11.23
Portrait of a Collection: Selected Works from the Pinault Collection
송은
2024.09.04 ~ 2024.11.23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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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 2024.11.24
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
서울대학교미술관
2024.09.12 ~ 2024.11.24
Mindscapes
가나아트센터
2024.10.16 ~ 2024.11.24
부산 청년예술가 3인전 《응시: 세 방향의 시선》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2024.10.26 ~ 202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