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이 어우러진 빛(光)잔치"에 부쳐
그림, 그 끝나지 않는 이야기 늘
그래왔듯이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렵다. 부모입장에서 자식이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고이 키운 딸이 데려 온 남자가 화가라면 그리 달갑지 않아 하던 세대에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정성껏 사다주신 일명 잡기장은 여지없이 만화로 가득 채워졌던 지라, 매일 저녁 그 잡기장을 검사 맡아야 했다.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던 그림 그리기는 급기야 공책 가장자리의 여백을 가득 메우기에 이르렀고, 이마저도 제재를 당한 나는 결국 완전 범죄 및 증거 소멸의 수단으로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기를 일삼았다. 그 모습은 남들 보기에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극진한 후원으로 결국 미술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3년 파리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우리나라에는 미국에서 건너 온 극사실주의가 유행했는데 유럽쪽에서는 그런 조류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나 역시 책으로만 보던 유럽의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을 실제로 대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빛과 색체 두요소가 네모난 공간에서 요동치며 동시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에 겉모습을 묘사하기에만 급급했던 나로서는 무한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 모네와 반 고호, 폴 세잔느, 칸딘스키의 화면구성 방법을 모색하고 더욱 더 생기를 불어 넣기 위해 잭슨 폴록과 윌리엄 드 쿠닝 등의 필치를 연구하고 정감을 넣기 위해 클림트와 모딜리아니 등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구하고 색깔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색깔별로 1,2년의 세월을 보냈고 (빨간색 풍의 그림 혹은 파란색 풍의 그림 등), 모든 색깔을 어우러지게 하는 데 다시 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과감한 색깔 배합과 혼을 접목시켜 동서양의 종합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폭 넓고도 복잡한 이 과정이 무척이나 고독하고 힘들었으나 조금씩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내와 희생을 거쳐야 했다.
다른 분야와 달리 미술 분야는 결코 남과 타협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최대한 자기 개성과 주장을 관철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 속에서 일반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란 몇몇 특정인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기를 영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학주의가 아니고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림 그린다는 것은 성공이나 쟁취 같은 소유욕 이전에 마음의 치유가 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 그릴 때의 쾌감, 그 이후의 뿌듯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할 데가 없다. 오래 전, 완성도 끝도 없는 이 고독한 작업이 언제나 해결될 수 있을까에 대해 학교선생님께 여쭤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지긋이 웃으며 내게 말씀 하셨다. "죽으면 끝난다." (월간 에세이, 이해전 글 中) ■ 이해전
그만의 세계
본능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이해전의 화폭은 단적으로 '힘의 균형'의 두 단어로 표현된다. 그림과 마주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바로 자연스런 '기쁨' 그 자체라고 평하고 싶다. '환희'라고까지 표현될 수 있는 화폭속의 '즐거움'은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음직한 '인생이 풍성한 기쁨'을 새삼스레 느끼게 할 만큼, 변화무쌍한 마띠에르와 색채로 인간 감성을 날카롭게 표현해 주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으로 그냥 빨려들어간다는 표현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의 독특한 기법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피상적인 그림도 아니요, 그렇다고 쉽게 그 느낌을 논할 수 있는 종류라고도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물론이요, 화가 그 본인 자신도 쉽게 풀어낼 수 없는, 어떤 심오한 비밀이 담겨있는 일정의 "즐거운 감성을 전염시키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심미적인 감성의 그림,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될 수 있는 '화폭'이 아니라는 말로도 대신 된다. 어떠한 그림을 평할 때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심미적인 그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성의 밑바닥'에서부터 파헤쳐 올라온 일종의 '근간적인 믿음을 주는 화폭'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윌리암 드 쿠닝' 그리고 '조안 미첼'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서정미와 감성에 한 수 진하게 올라 붙은 방약무도까지한 혼의 '힘'은 오직 이해전 그만이 유일무이하게 나타낼 수 있는 '진정한 언어'임이 확실하다. 시대에 따른 유행이나 조석간만으로 변해가는 미술계의 급격한 조류를 멀리한 채 오랜 기간 끈질기게 자신의 길만을 걷고자 한 그는 자신만의 '내적인 재창출'과 '정확한 사상'을 표현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작품 속에 진하게 녹아든' '진실'을 찾아 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오래전부터 묵묵히 노력해 왔던 바로 그 '진실성'을.....
물론 진실성만을 나타낸다고 해서 절대적, 보편적인 그림으로서의 의미가 무시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런 평 자체를 넘어, 우린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들 하나, 하나가 자연스럽게, 즉시 그 자리에서 친구로 맞아들이듯 우리들을 포근하고 감미롭게 안아주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97년 7월) ■ 쟝 피에르 올리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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