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구
책·풍경 branches of wood on a panel, 112x80cm, 2008
심수구
책·풍경 branches of wood on a panel, 186x186cm, 2008
심수구
거울같은 branches of wood on a panel, 45x91cm, 2006
심수구
산처럼 branches of wood on a panel, 650x280cm, 2006
작가노트
나의 예술동네 싸릿골
산등성이에서 싸리나무를 베어 묶으며 나는 한 아름의 물질을 느낀다. 차에 싣고, 내리고, 잘게 자르는 과정에서도 물씬한 자연의 냄새 너머로 더욱 강열하게 물질을 느낀다. 물질은 내 예술의 토대다. 그 물질은 화면에 붙여 나가는 시간 가운데서 우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건(happening) 들과 조우하면서 일종의 사태(situation)들로 전환된다. 사태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묶였던 예술이란 관념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면서 발견한 일종의 징후다. 여지껏 아무탈없이 내 예술행위의 지향적 대상이였던 단일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확실했던 존재의 덩어리가 미아가 된 느낌, 美我? 美兒? 尾我? 未我? 未芽? 味亞? 迷兒?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 자포자기, 그러나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자아를 지키려는 생명의 약동성이 있었다.
미아는 달팽이가 되어 사태파악을 위하여 온갖 촉수를 동원한다. 그간 면도날 맛이나 기다리던 수많은 솜털들은 모두 발기하여 예민하게 사태를 주시한다. 솜털들은 물질의 표면에 나타나는 사건에서 수많은 정보들을 채집하면서 이를 사태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의미로 전환된다. 하지만 의미들은 곧 지워지고 또 다시 지워지기를 반복(repetition)한다. 미아들의 세계엔 반복과 차이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예술에서의 반복 행위란 곧 원본성의 결여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젠 원본성의 부재증명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거기서 탄생한 것이 내 예술동네의 이름 싸릿골이다. 그런 까닭에 싸릿골에서 그려지는 그림들은 이제 재현물(reproductive art)이 아니다. 싸릿골은 의미의 형상성이 보장되지 않는 비재현(non-reproduction)지대이기 때문이다. 거긴 당연히 있어야 할 나도, 싸리도, 의미도, 무의미도, 또 그것들의 동일성을 담보하던 확정된 시간이나 공간은 없다. 그같은 절대적인 동일자(identity) 대신 항상 사건들만 유발시키는 유령같은 타자들(others)만 가득하다. 그러나 그 타자들의 함성은 듣지 못한다. 공중파 안테나 밖의 주파수로 발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깊은 밤처럼 조용해 보이는 싸릿골의 이면은 사실은 온전하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지구가 열심히 돌지만 그것을 우리들이 못 느끼듯이 말이다.
1.나의 나무작업은 시골집 처마 밑에 쌓아둔 장작더미에서 시작되었다. 겨울이 오기전에 집집마다 양식처럼 준비해둔 장작더미는 땔감을 떠나 일종의 저축과도 같으리라. 부지런함과 그 여유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국적 정서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보며 자란 어릴 때의 추억은 너무도 크다. 또한 쌓는다는 적(積)이나 짠다는 직(織)의 의미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미적인 요소는 충분하리라 여긴다. 플라톤은 실체를 이데아(관념)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은 형상이 있다고 하고, 과학자들은 법칙이 있다고 하고, 구조주의자들은 구조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합리주의의 존재론적 의미가 될 것이며 모더니즘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니까 내가 나무를 쌓고 짜며 형상화시켜 나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플라톤적 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관념의 덫에서 탈출하여 좀더 자유로워지고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내 작품의 실체를 물질 그 자체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2.플라톤은 관념적 눈으로 실체를 보았으나 스토아학파들은 물질 그 자체가 실체라고 했다. 나의 작업에서 쌓고 형상화시켜나간다고 하는 플라톤적 관념론으로 볼 때 쌓음은 불교적 득도(得道)이거나 회화의 구성적 요소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적 물체론으로 볼 때는 나무들의 하나하나가 개체가 되면서 수많은 차이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나무라는 물체 하나하나는 놓여지는 경우나 삽입되는 이물질에 따라서 개별적이고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자유를 느끼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궁극적인 것은 물질이며 따라서 리(理)보다 기(氣)가 더 긍극적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3.또한 혼자는 존립할 수 없는 집단적 의미나 어떤 구조를 성립시키는 토대적 뜻으로도 나의 작업은 이루어진다. 수많은 나무의 단면들은 물질이면서 잔잔한 물결같은 사건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란 화면을 부조처럼 돌출시킨다든지(명제:언덕에서), 나무를 태워서 붙인다든지(불꽃처럼), 흙을 이겨 바른다든지(지층에서), 꽃을 몇송이 붙인다든지(꽃밭에서), 돌을 붙이면서(징검다리) 등 이러한 자연에서 오는 일련의 이미지를 사건화 하고자 했던 것이다. 토대가 상부를 성립시킨다는 의미로써의 내 작업의 수많은 나무들은 바로 토대적 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차이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어느 철학자는 운동장 앞에 세워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라고 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많이 본다. 컵을 떨어뜨린 것도 사건이며 거리를 걷다 밟힌 낙엽도 사건의 유발이라 하겠다.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들의 모임은 각각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우연히만들어 낸 사건이며 이접적 종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수많은 붉은 악마들의 모습에서 내 작업과 공통성을 느낄 수 있었다. 반복과 차이, 똑같은 나무를 수없이 반복해서 붙이는 것은 내가 숨을 계속 쉬는 것이나 계속 걸어다니는 행위처럼, 어찌보면 하잘 것 없는 일상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악마들은 개별적인 개인이 반복행위로서 모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함성과 엄청난 표면효과를 만든 결과가 되었다. 예컨대 붉은 악마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은 전통적인 재현체계, 즉 원본성에 대한 유사성이라기 보다는 서로서로 사이에 같음과 다름만이 지속하는 상사성의 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리응원은 고정된 중심이나 동일자는 부재하지만 타자들의 이접적 관계에다 축구라는 일의성을 부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만큼 거리응원은 공간적인 모뉴멘트(기념비)이기 보다는 시간적인 사건, 즉 다큐멘트이다. 우발성을 띤 거리응원은 그런 점에서 탈코드적이라 할 수 있고 그런만큼 다이나믹하다.
5.나의 작업에서 수많은 나무들은 역시 이접적 관계로 짜여지면서 파생하는 우발적 사건들을 하나의 사태로 다큐멘트화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얼핏 엄청난 나뭇가지의 집합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나 단순한 조형적 수단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재현이 사라진 비현전지대에서 바라보기로 하면 나뭇가지 하나하나의 특유한 몸짓들이 문맥화하면서 무한한 의미작용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은 내 삶의 다큐멘트가 들려주는 함성이 아니겠는가.
나는 오늘도 여느날과 다름없는 반복 가운데 차이를 만들면서 장난끼 어린 사건 하나씩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씩 벌리는 장난끼 어린 사건을 의미심장한 사태로 파악하기 위하여 온갖 촉수를 동원하여 내 예술동네 싸릿골을 밤새 되집고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1949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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