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를 걷고 별을 보다 (Defrost and see the stars)
2017.09.26 ▶ 2017.10.01
2017.09.26 ▶ 2017.10.01
권구희
성에를 걷고 별을 보다1(Defrost and see the star1) Oil on canvas, 130x163cm, 2016
권구희
47개의 스크린 섬2(47th screen iland2) Oil on canvas, 130x163cm, 2016
권구희
47개의 스크린 섬1(47th screen iland1) Oil on canvas, 130x163cm, 2016
권구희
성에를 걷고 별을 보다2(Defrost and see the star2) Oil on canvas, 130x163cm, 2016
권구희
공간과 기억 Oil on canvas, 163x130cm, 2016
얼룩으로 성에를 걷고 소멸한 별의 뒤안을 더듬기
권구희는 줄곧 화면에 빈 캔버스를 그렸다. 화면 속 캔버스는 역설을 품었다. 일테면, 세계를 담는 그릇으로서 캔버스는 외려 화면을 가득 채워 풍경을 가로막는 오브제가 되었다. 그마저 그려진 캔버스는 화면에 반사된 시선들이 물감으로 퇴적된 형상이다. 두꺼운 물감층은 캔버스를 온전히 담아내려 했던 작가에게 무수히 반사되어 돌아온 자신의 시선이기도 했던 바, 빈 화면을 그리고자 화면을 채우는 작업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캔버스 그대로를 담고자 손의 흔적도 남기지 않지만, 캔버스는 매끈한 물감퇴적층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간의 작업이 작가와 캔버스 사이 분열적인 시선교환에 집중했다면, 근작에는 자신과 캔버스의 이자관계 너머 세계의 풍경을 대면하고, 역사의 사건을 화면에 담는 시도를 감행한다. 캔버스의 텅 빈 화면 뒤로 교감의 시도들이 수다한 공허의 흔적을 남겼다면, 캔버스에 드리운 세계와의 대면이 어떻게 화폭을 채우고 있는가의 문제는 작업을 거슬러 읽는 눈의 방향타가 된다.
<성에를 걷고 별을 보다> 전시에서 작가는 위안부를 모티프 삼는다. 하지만 작가는 작업을 특정 사건에 함몰시키지 않으며, 위안부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프레임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 관성화된 형상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피해자로 대상화하지 않는 시도는 특정 대상에 고착되는 지점에서 비켜선다.
전시된 그림들은 개별적인 화면에 구현된 시공간이 연속적인 풍경으로 펼쳐진 모습이다. 관람자의 눈은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듯 각기 다른 위치와 관점으로 시선을 옮긴다. 저마다 다른 공간과 스케일로 그려진 작품들은 활공하는 시선을 따라 타인의 출몰을 감각하고,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작가는 캔버스를 재현하며 발생하는 시차와 재현불가능성을 하나의 작업 장치로 삼았다. 재현을 메타 층위에 실현하는데 있어 작가는 재현불가능성을 직면하고 이를 그려낸다. 재현불가능성을 재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의 역설을 의식적으로 전유하고 대상으로부터, 더불어 대상을 포획하려는 자신의 시선으로부터도 거리를 둬야 한다. 예의 거리두기는 세계가 온전한 얼굴로 드러나지 않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온전치 않은 얼굴로 나의 감각을 두드리는 세계를 조우한다. 사건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작가는 사건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는 진실 자체를 화면에 남긴다. 실루엣으로나마 남은 흔적은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의 가능성을 품고 어두운 배경 위로 깜박인다.
아픔을 체화하는 몸은 건축적 공간으로 은유되고, 풍경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구체적인 소재들을 재현하기보다 캔버스에 응시를 투사하고 반사된 모습을 그리는 과정에 외상적 과거의 풍경을 그려냈다. 빛과 평면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은 어두운 심연 속에서 빛을 끌어올린다. 망각으로부터의 표현은 화면 위에 연출된 장치들에 의해 우회적으로 그려지지만 사건의 오랜 징후들을 품는다. 거리를 두고 사건을 그려내는 작업은 사후적 호명에 가깝지만, 작가의 호명은 사건에 들러붙은 민족과 젠더, 국가와 같은 매듭을 풀어내고 고통을 기억하는 시도로서 재현의 윤리를 실천한다.
위안부를 다루는 작업은 이제 위안부를 통해 가라앉고 산화되고 찢긴 숨들을 불러낸다.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외려 의미와 흡착된 기표를 떼어내고 그 사이의 정조(情操)를 화면에 드러내고자 하는 신중의 결과였을 것이다. 재현된 사건은 온전히 구제될 수 없음을 시인한 채 출몰한다. 작가는 그 속에서 미약한 고통의 신호를 잡아내고, 이를 지금의 감각들에 연결시킨다. 진혼곡에 가까운 작업은 다른 이름과 시점을 갖고 있는 수다한 재난들에 공명한다. 아픔의 신호에 눈을 돌리고, 시공을 가로질러 공명시키는 시도는 넓은 층위의 여성주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의 프로파간다, 고통의 스펙터클을 과장하지 않고 담아냄으로써 역사의 외상을 사라지지 않은 도깨비불로, 기억해야하는 상흔으로 변모시킨다.
하지만 잔여처럼 화면 위로 드러나는 불빛 역시 작가의 손을 거친다. 가능성의 형상까지도 의미를 통과하는 것이다. 손을 거친 가능성의 모습이 낭만화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밤하늘 호숫가에 파문을 그린다. 물신으로 소비되는 역사의 고통 한편에는 도상을 거둬낸 작가의 비재현적 이미지가 대극에 위치한다. 낭만화된 조우 불가능성은 일련의 연출을 거친다. 작가의 붓질은 시각체제에 저항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재현불가능성을 소비하는 시각질서의 한계에 등을 돌릴지언정 돌파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재현 불가능성을 재현하는 것 또한 자의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설령 작가의 자의식이 시차를 갖는 공허함으로 드러난다면, 예의 공허한 감수성은 어떤 역사를 숨기고 배제하는가를 묻게 된다. ‘성판매 여성’에 대한 오랜 낙인, ‘피식민 민족’의 ‘처녀성을 박탈당한 희생자’라는 과잉수사에 눌려 침묵해온 수치어린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발화를 추동하기까지의 역사, 자신과 같은 이들을 만나 집단의 목소리를 만들어온 역사에 작업은 어떻게 호응하고 있는가. 작가는 화면 위에 모여든 빈 스크린의 군집으로, 수면 위를 부유하는 불빛들로 구체적이고 강렬한 얼굴과 음성들을 미약한 모습으로 거둬내고 빈칸으로 남겨둔다. 체제로부터 수치와 피해자의 낙인을 달고 침묵을 강요당한 비체화된 존재들의 함성을 ‘빈칸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한편에 화면 뒤로 밀어 넣은 소녀의 응시에서 대상화를 경계하는 작가의 숙고로 반사된다. 재현의 절제를 비일관적으로 수행하는 시도들은 다시금 재현의 윤리에 질문을 던진다. 재현의 윤리가 재현의 정치를 피할 수 없다면, 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캔버스의 빈 화면 위에 어떤 형상을, 어떻게 새길 것인가
재현 불가능성을 재현하는 것 역시 작가의 의식된 구성과 연출 아래 가시화된다고 할 때, 재현 불가능성으로부터 부정적 자의식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질문은 필시 불가능한 답을 상정한다. 예의 불가능성에 작가는 재현 불가능성을 재현하는 아이러니를 대하며 의미의 무게를 덜어내고 얼굴을 비워냈다. 하지만 포획 불가능한 사건을 다루는 재현의 아이러니는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성에를 걷고 별을 본다’는 작가의 문장은 다소 간 변형을 요한다. - 화면 위에 얼룩을 새김으로서 성에를 거두고, 소멸한 별의 뒤안을 더듬는다. 재현의 역설은 관습으로부터 침묵과 퇴행을 선언하기도 하지만, 관습적인 서사들로부터 새로운 감각을 깨우고 탈주시킬 가능성 역시 내포한다. 세계를 재현하는 회화가 (불가능한)낭만과 그것이 함의하는 작가의 자의식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면, 작가는 어떻게 의식적으로 이들을 전유하고 교란시킬 것인지가 이후의 화두로 떠오른다. 세계를 대면하며 어떻게 작업할 것인가 하는 오랜 질문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를 화면에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출몰한다.
■ 남웅
1986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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