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응집 리얼릴즘
2017.11.22 ▶ 2017.11.30
2017.11.22 ▶ 2017.11.30
전시 포스터
구자승
꽃이 있는 정물 Oil on canvas, 91.0×72.7cm, 2017
구자승
양머리 있는 정물 Oil on canvas, 100×100cm, 2017
구자승
여름 어느날 Oil on canvas, 162.0×130.3cm, 2017
구자승
와인박스 위의 정물 Oil on canvas, 72×72cm, 2017
구자승
항아리와 자두 Oil on canvas, 53.0×45.5cm, 2016
구자승
회고 Oil on canvas, 100×100cm, 2017
리얼리즘의 거장 구자승 작가의 60여 년 동안의 작품세계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11/22 – 11/30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한국 리얼리즘 최고의 작가로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자승 작가의 작품에는 대상 및 소재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한다는 점에서 1세기 이전의 사실주의의 미학적 조형성이 숨어있다. 하지만 이전의 사실주의 회화와 그의 작품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는 현대라는 시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활용해 작품을 보며 심리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절제된 구성 및 구도, 소재의 집중화, 동양화의 여백개념에 근거한 그만의 독특한 비움의 표현은 이 시대가 만들어낸 사실주의 작가인 그의 시그니처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일상 속의 오브제들이 그의 한평생 동안 어떻게 독창적인 작품으로 재탄생 되어 왔는지 경험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 앤갤러리
具滋勝의 정물화
지난 20여년 동안 나는 한국의 각 조형예술분야에서 활동중인 작가들의 발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오늘의 한국 작가들과 접촉해왔다. 파리와 서울에만 국한되지 않은 프랑스와 한국 각지에서 나는 수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고, 특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의 체류기간 중 강렬했던 순간들 중의 하나는 구자승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1941년 가을, 예술가의 아들이자 손자로 태어난 구자승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화실작업을 지켜보면서 그의 평생직업을 정하게 되었다. 그의 작업실에서 나는 몇 시간에 걸쳐 매우 고전적 개념으로 그려진 옛 화폭들을 비롯한 그의 주요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볼 즐거움을 누렸으며, 또한 지금 이렇게 영광스럽고 기쁘게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매우 주목 할만한 일군의 정물화들이었다. 17세기 이래로 회화의 주요테마인 정물은 샤르댕의 '구리물통'으로부터 세잔의 사과, 후앙그리와 브라크의 입체파 구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작들의 예술사와 함께 해왔다. 나는 매우 고전적인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그려진 구자승의 정물화들을 주르바랑(Zurbarang)으로부터 눈속임기법이 현재 프랑스화가들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선상에 높고 싶다. 그러나 이 작가만의 독창성은 그의 독특한 개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깊이의 효과를 내는 능숙함에서는 일종의 음악성이 나타나고, 정물배치로 인한 빛의 효과와 관람자를 매혹시키는 수평선의 처리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미묘한 대위법이 있는 것이다. 배경을 향해 나란히 배치된 화면 중앙의 오브제들, 즉 교묘하게 분산되었거나 혹은 창조적 직관으로 조화를 이룬 이 정물들은 모두 일상의 삶으로부터 온 것이다. 유리잔, 도기, 청동 차주전자, 주철 냄비 등은 시각적 울림이라는 조형적 유사성으로 결합되었다. 그것들의 한국적 특성은 밥그릇, 찻잔, 단지 등의 등장이나 형상에 의해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이미 화가의 생각이 투영된, 그들 각각의 만남과 조합에서도 이루어진다. 밀집된 오브제들의 형상이 아니라도 그의 정물은 그것들의 섬세함, 빛의 반사효과, 약간의 낡은 듯한 매력으로 관객에게 일종의 주술을 걸며, 우수와 향수같은 흩어진 상념과 소박한 매력, 미묘한 잔해의 인상을 준다.
화가의 작품은 이러한 일상의 사물들에게 다소 낯선 품위와 신비스러운 깊이를 내재하고 있는 침묵의 후광을 부여하며, 기억의 마법을 통해 그레고리안 성가나 불교의 단선음악같은 내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구자승의 정물은 추억의 공간과 잠들지 않은 꿈의 영역에서 항상 재탄생할 차비가 되어 생명감으로 넘쳐흐른다. 그 정물들은 분명 시적 존재의 현현이다. ■ 호제 부이에
예술가의 수필 32 - 숨을 쉬는 그림, 그 미세한 호흡을 찾아서
발아래 남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홈 아틀리에서 오늘도 나는 작업실에 박혀있다. 적막이 나를 다스릴때면 나는 모처럼 사색에 잠겨 홀로 나만이 갖는 이 유일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한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이곳에 웅지를 틀었다.
나는 요즘 거의 정물화에 매달려 있다. 정물화는 영어로 'Still Life'이다. 'Still'은 '움직이지 않는다.' 또는 '침묵'의 의미로 풀이된다. 즉,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둔다는 의미를 둘 수 있는데, 그 빠르게 흐르는 속에 내맡겨진 삶의 한 순간을 정지시키려 한다. 대신 그대로 재현하거나 옮겨놓는 작업이 아니라, 실은 그 나름대로의 시간의 흐름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물화 소재 중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물들을 선호한다. 물론 조선백자 및 토기 같은 옛 그릇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지만, 대다수의 글라스, 술병, 꽃병과 같은 평범한 모티브들이 내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소재는 그림에서 느끼는 친숙성과도 관계가 있지만 일상적으로 눈에 익은 탓에 그림 속의 소재로 등장했을 때는 낯설지 않다는 심리적인 친근감을 주는 것도 한 몫을 한다.
때론 무언가 색다른 느낌을 유도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모티브를 화폭 안에 이끌어 내기도 한다. 커다란 궤짝 위에 계란, 파이프, 어울리지 않는 긴 막대기를 화폭에 담는다. 이러한 대상들은 섬세함과 빛의 반사효과 등으로 각각의 만남과 조화를 이룬다. 정물에서 자주 등장되는 유리잔, 도기, 청동 차 주전자, 주철 냄비,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자기존재를 부각 시킬 때면 마치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하듯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극적 순간들을 포착 한다. 많은 사물들을 의도적으로 화폭 중심에 몰아놓고 그 군집이 빚어내는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아름다움과 상대적으로 사물 주위의 비어 있는 많은 공간, 동양의 사유의 공간 개념을 마치 우리나라 이조 백자나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여백처럼 현대적 감각을 동양적 시각으로 즐기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극사실주의 화풍 가운데에서 인물화나 풍경화가 아닌 정물화를 주로 많이 가까이 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나타 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이야기 거리를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비롯 소재들을 찾아 거리여기저기를 배회하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형태감, 질감과 색채를 고려하여 한데 모아 놓을때 극적인 분위기를 스스로 즐기곤 한다. 전통적인 정물화가 주로 시각적인 화려함을 추구해 온 반면, 나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철저하게 계획된 나만의 의도가 숨어 있다. 각각의 물체들이 상대를 비추고, 또 가리기도 하며 만들어내는 조형미. 그것이 바로 나의 영감을 자극하는 한 덩어리 오브제이다. 프랑스 미술 비평가 호제뷰이어가 나의 그림을 보고 "구자승의 작품을 보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단편적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드로잉, 3분의 미학'. 특히 나는 밑그림 정도로 여겨지는 제 3의 장르라 할 수 있는 드로잉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3분 안에 그리는 작업이지만, 드로잉은 무수히 많은 조형언어를 내재하고 있는 조형언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필선이 느껴지는 3분 드로잉. 나도 이 드로잉을 할 때는 심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선 하나하나 그을 때, 농담 하나하나를 처리해 들어갈 때마다 때로는 황홀하기도 하고, 때로는 드로잉과 함께 취해 있는 나를 발견할때는 이미 나는 다른세계에 와 있음을 자각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쥬 바따유(Georges Bataille,1897-1962)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모든 것은 그 정서적인 미적 감수성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드로잉을 통해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고 헸다. '라이프 드로잉'이라고도 하는 이 드로잉은 선(線)의 아름다움을 중요시 하기도 한다. 앵그르라는 화가는 "line is drawing!"이라고 했다. 이 드로잉의 선이 주는 의미는 대단하다. 선의 스피드에 의해 강약에 의해서 생기는 그 동세(動勢), 움직임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드로잉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된 것은 1979년 캐나다 유학시절부터이다. 사랑에 빠지면 열병을 앓듯이, 여기에 몰입하여 상상을 못할 정도로 미쳤었다. 선을 긋고 문지르다 손톱이 달아 구녕이 나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나는 드로잉 속에서 스스로 올가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작품에서 감정의 과잉을 억제하면서 철저한 이지적인 태도로 모티브와 대결하는 치열한 정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숨을 쉬는 그림, 그 대상들이 주는 더 미세한 호흡을 찾으려 늘 탐구한다. 마치 그려놓은 대상이 무생물체의 큰 덩어리가 아닌, 무수한 꿈의 파편들이 부서져 그 잔해의 흔적들을 극복하고 온전한 오브제가 되기까지 상처투성이의 그 정물들을 나는 그림 속에서 치유한다.
作家는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거기 그 사물(being)이 그 적절한 자리에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아름다운 대상이 되는 것, 그 대상들 하나 하나가 나의 분신이 되고, 내 잃어버린 꿈의 파편이 된다. 메마른 나무상자, 흰 보자기, 오랜 유물같은 바랜 주전자, 비워진 술병, 그리고 담겨지지 못한 자그마한 것들, 자갈, 체리토마토, 레몬, 계란, 바랜 사진...
어느날 쓸모없이 버려진 그 나무상자에 술을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술병은 비워져 있다. 물기어린 자갈들을 하얀 보자기에 싸 말려주고 싶다. 담겨져야 온전해지는 것들, 담아야 그릇이 되고, 이름이 되고, 존재가 되는 것들, 그런 떠도는 일상의 사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주고, 더 아름답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그들 각자는 이미 생명을 상실했지만, 하나의 그림이라는 공간에 놓여짐으로 의미있는 시적 오브제의 재탄생을 본다, 예술은 우리의 삶처럼 깊이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듯, 나이와 함께 비로소 자신의 삶을 보게 되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는가 보다. 그리고 내 그림의 표정을 통해, 순간 지나가는 바람마저도 숨을 죽여야 하는 그런 초긴장의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 어느새 내 시각이 미세한 색채와 형태에 신경이 곤두설 때쯤이면, 내 삶도 오브제들 속에 되살아난다.
숨을 쉬는 그림, 그 대상들이 주는 더 미세한 호흡을 찾고 싶다. 마치 그려놓은 대상이 무생물체의 큰 덩어리가 아닌, 무수한 꿈의 파편들이 부서져 그 잔해의 흔적을 극복하고, 온전한 오브제가 되기까지 말이다. 상처 투성이의 아픈 심장을 가진 그 정물들을 나는 그림 속에서 치유한다. 가장 깨끗하고, 온전한 것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힘을 잉태하고, 다시 하나의 커다란 힘에 응집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 위에 놓여나길 원한다. 사물의 분명하고 명확한 묘사. 단지 외광의 투영만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내 그림 앞에서 어느 감상자는 이렇게 말한다. 실수로 흘린 한 오라기의 실밥조차도 보이지 않는, 마치 원시의 때묻지 않은 순수 결정체 어쩌면 에덴의 향기로운 사과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것이 결코 거칠거나 투박하기 보다는 정체된 세련미와 나름의 멋이 담겨 있어 맑아진다고 한다. 그렇다. 극도의 정적 속에 투명하게 빛을 머금는 사물, 존재의 오브제들은 자유로운 유기체가 되어 그 감상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물이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나 스스로도 개입하길 원치 않는 단지 거기 그 자리에 그들을 높여주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굳이 내가 그들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리얼리티의 벼랑 끝에서 그것들은 이미 현실의 being이 아닌 것이다. 제2의 being이 작품 속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제 붓을 내려놓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이렇게 하나의 오브제에 빠져들면 우리는 미지의 공간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것들의 낯선 배합,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브제들의 독특한 자아, 나도 그 대상들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타오르는 촛불로 그렇게 꿈틀대며 숨쉬고 싶다. 정물 하나 하나에 호흡이 있어 각자의 소리를 말하려는 그 emeringence의 상태. '긴박하다'. '외롭다'. 그리고 '강렬하다'. 정적과도 같은 공간은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우주이다. 그 공간은 진공의 상태이며 무한하다. 그러나 그 안에 표현되는 오브제들에는 시간이 개입한다. 그래서 마치 사물이 태양빛에 따스히 온기를 덧입고 바래가듯 시간성에 구속받는 것은 오브제들 뿐 이다. 영원한 공간 속에 그 유한의 오브제들, 그것들은 살아 숨쉬는 동안만은 최고의 빛을 발하고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 '시적 존재의 현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작품이 자신들의 자리매김과 저마다의 색깔로 빛을 발할 때쯤이면 나는 가끔 호흡을 멈춘다. 그들이 호흡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힘 안에 응집된 그들만의 질서, 거기 그 자리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조화의 아름다움, 사물들 각자가 자존심을 회복하고, 어느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그 미지의 공간에 그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아의 탄생, 허물을 벗는 새로운 잉태, 벌거벗은 나신의 미지의 순수한 유혹, 그 낯선 시선 속에서 우리를 자각케 하고 느끼게 하고 체험케 한다. 혹 지나치기 쉬운 사실 안에서 가장 바른 사실의 긍정, 결코 억압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망각의 공간, 결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참 긍정의 꿈의 영역, 이것이 내가 표현하는 '사실'의 세계이다. ■ 구자승
1941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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