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나리는 경계를 거닐듯이 A Walk in Whiteness
2017.11.04 ▶ 2017.12.03
2017.11.04 ▶ 2017.12.03
전시 포스터
김윤수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 바람드로잉을 종이에 인쇄하여 360장의 시간의 결로 쌓기,옆면에 색연필, 10.3×32×23.3㎝, 2016
김윤수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 2017 갤러리 소소 설치전경
김윤수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헤르타 뮐러,「저지대」에서 종이에 연필, 18.8×25.6㎝, 2016
김윤수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 36장의 바람드로잉을 종이에 인쇄하여 아코디언 구조로 제작,옆면에 색연필, 0.5×32×23.3㎝(가변크기), 2016
김윤수
꽃꽂이 종이에 잉크젯프린트(작업노트와 사진),나무에 연필, 110×100×30㎝, 2016
김윤수
마음(蝕): 세 개의 마음의 이클립스 2017 갤러리 소소 설치전경
김윤수
마음 27점의 밤 드로잉을 종이에 인쇄하여 제작, 22.8×18.3×1.8㎝(가변크기), 2016
김윤수
마음 종이에 푸른 실 자수, 울트라마린블루 과슈, 12×7㎝(가변크기), 2016
김윤수
그 밤(for Barbara) 면천에 푸른 실 자수, 52×36㎝, 2015
김윤수
살갗 밑(석양) / 달빛(4/3600시간의 파도) 2017 갤러리 소소 설치전경
김윤수
달빛(4/3600시간의 파도) 4초 동안의 연차적인 파도드로잉 30점을 종이에 인쇄하여 달빛이 차오르는 형태로 제작, 13×19㎝(가변크기), 2015
김윤수
달빛(4/3600시간의 파도) 4초 동안의 연차적인 파도드로잉 30점을 종이에 인쇄하여 달빛이 차오르는 형태로 제작 13×19㎝(가변크기), 2015
김윤수
바람의 표면 종이에 인쇄된 바람드로잉 36점이‘모든것이온다’와‘모든것이간다’의 글귀사이에서 펼쳐짐, 23.5×36㎝(가변크기), 2015
김윤수
살갗 밑(석양) 6,810.3㎠(한국인 남성의 평균체표면적에 해당하는 넓이(여성의 평균체표면적과 아이의 변화하는 면적을 포함한다)) 의 종이에 색연필로 긋기, 종이에 실과 연필, 페인트, 가변크기, 2017
흰 눈이 나리는 경계를 거닐 듯이
책장을 넘기는 눈과 손은 글자와 글자사이 행간의 무한 속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혹은 빠르게 건너뛰기도 하며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규칙을 넘어서는 오롯이 완벽한 산책을 가능케 했다.
“현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기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순간 혹은 영원 일지 모를 터널을 지나 이내 흰 눈이 대기를 메우며 깊이를 지우는 적요한 풍경 앞에 선다. 책장을 넘기는 손은 잠시 멈춰두어도 좋았다.
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시간 속으로 아득하게 아득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간과 물질이 공간에 개입하고 점유하는 방식들과 사유의 틀을 보다 유연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해왔다. 단면에 무수한 구멍을 지닌 골판지(구멍들은 빛과 수직을 이루는 각도에서 뒤편을 투명하게 비춘다)를 잘라 사물의 외각을 감아가고 투명한 비닐을 사람들의 발모양을 따라 연차적으로 오려내고 쌓아가는, 무수한 노동의 반복을 통한 무화의 작업과정에는 단단히 고정된 사유의 틀을 희미하게 하고 무거운 조각의‘물질적 부동성’을 넘어서는 시간이 담겨있다. 배경이 투명한 가변적인 구조의 병풍이나 두루마리 그림,‘저편’의 어원을 지닌‘울트라마린’의 색채를 수집하여 그리는 일련의 그림들은 그림안의 시공간을 현실의 자리로 끌어들여 마주하게 하는 것이었고,‘사이’의 드로잉(모든 것처럼 도착하고 지나가는 바람의 표면을 더듬고, 밤을 생각하고, 어둠속의 희미한 별빛을 붙들어 수놓고, 흩어지는 달의 소리(파도의 공명)를 천천히 되짚어 그리는 시간)은 우리에게 잊혀지거나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순간과 순간의 사이를 아득하게 펼치어 시간의 공백 그 무한 속으로 들어가 머물러 보는 것이었다.
카뮈의「시지프」의 신화에서 사형수의 눈앞을 가리는 손바닥만한 병풍에 대하여 쓰여 진 문장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부조리로서의 그것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보지 못한 그 표면에 대해 쓸쓸히 생각하곤 하였다. 위로를 건네는 무엇이었으면 했다.
모르고 지나치는 것일 뿐 이미 우리 생의 매순간은 언제나 죽음이 함께한다. 잃어버린 시간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죽음들... 그 사라진 공백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잠시, 매혹의 긴 터널을 통과하듯 돌이켜 나 그리고 당신 곁에 펼쳐두고 싶다.
이번 전시에서의 작업들은 카뮈의 문장으로부터 그렇게 눈앞을 가리는 병풍들이 되었다.
나의 그것은 부조리보다 위로의 빛에 가깝고, 시간과 공간의 규칙을 넘어 아득히 펼쳐지는 눈의 감각에 다가감이다. 조각과 그림의 형식들은 보다 무르고 희미하게, 경계를 흐르고 머물고 어루만지는 것의 이름들,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 <꽃꽂이>, <마음>, <살갗 밑(석양)>, <바람의 표면>, <달빛(4/3600시간의 파도)>에 적당한 모양과 크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작고 가벼운 구조는 언제 어디서든 활짝 펼쳐질 수 있기에 매혹적이다. 길을 나서는 이의 가방 한 켠, 쉽게 동행하는 책처럼, 최소한의 형태로‘그 곳’에 다가서고 싶은 나의 마음이 있다.
작업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장소를 찾고 만나는 일은 전시를 준비하며 마주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벽과 공간의 깊이와 넓이 같은 문제에 앞서, 그 공간이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기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여 작업이란 것이 그 곳에 어우러지며 어떠한 변화와 환기의 접점을 그려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소소’의 공간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단절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공기의 움직임, 계절의 색채가 공간에 스며들어 흐르며 창의 일부를 막아 간간이 세워놓은 벽들이 마치 세월 사이에 여백을 걸쳐 둔 듯 고요하게 다가온다. 흐름과 공백의 부드러운 경계에서 사이의 무한으로 향하는 시간의 구멍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계절은 색채가 없는 시간이었으면 했다. 흰 눈이 나리는 시간 속에서, 짙은 안개의 흰 시간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그렇게 경계 없는 풍경 속에서 산책하듯 작업을 거닐면
더없을 것 같았다.
슬며시 작업들을 놓아본다. 처음 들어서는 1층의 공간에 저지대에서 펼쳐지는 들꽃의 평원을,
원을 그리듯 끝없이 지속시켜 무한으로 향하는 시간의 터널을 열어두고선 산책길에 주워온 돌멩이, 나뭇가지 같은 것들로 한편에 꽃꽂이도 해본다. 중경(中境)을 통해 이어지는 좁고 나지막한 언덕 같은 계단을 올라서면 빛이 사라지는 시간(이클립스)의 가장 깊은 풍경을 잠시 동안 그려볼 수 있다. 어느 누군가가 책상위에 놓인 <마음>의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녀의 밤과 그 마음을 수놓던 나의 시간과 또 다른 이의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의 선(평행)을 그리며 겹쳐지는, 이클립스의
아름다운 순간을 상상한다. 중층의 아스라한 원경(遠境)으로부터 다시 2층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의 계단 저 너머엔 다가오는 근경(近境)들이다. 심연의 가장자리-살갗 밑, 세상과의 경계에서 당신을 감싸주는 지지않는 석양과, 모든 경계를 어루만지며 도착하는 바람의 표면과, 길(세상)의 끝에서 속삭여주는 파도의 공명을 환하게 차오르는 달빛으로 펼쳐본다.
이런 생각들이 누군가에게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까 하면서도...
나는 열려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행간을 움직이는 당신의 눈과 손이,‘지금’,‘여기’를 가로지르는 순간이동장치가 되어 환한 그 곳에 서게 되길, 완벽한 산책자가 되어 마법 같은 시공간의 물결 속에서 길을 잃고 더딘 보폭으로 천천히, 잃어버린 풍경 속에 잠시 머물게 되기를 바래본다.
11월, 색채가 사라지는 계절의 문턱에서 흰 눈이 나리는 경계를 아득하니 거닐 듯이.
김윤수
1975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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