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자리 The Edge
2018.01.04 ▶ 2018.02.13
2018.01.04 ▶ 2018.02.13
이재명
극장 캔버스에 유채, 162×227.3cm, 2017
이재명
저녁의 주유소 캔버스에 유채, 89.5×145.5cm, 2017
이재명
어려운 나무 캔버스에 유채, 193.9×130.5cm, 2017
이재명
내려다 본 지붕 캔버스에 유채, 112×145.5cm, 2017
연결의 단편
- 이선영(미술평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인 분류 작업에는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애매한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 나머지들은 추후의 분류를 위해 잠시 보류된다. 그것들은 쓸모없는 것 또는 무의미한 것으로 분류되지도 않기 때문에, 폐기될 수도 없는 것들은 걸리적거린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분류가 그것에 대한 지배와 소유라는 목적을 가질 때 애매한 것들은 불편하다. 그 때 그것들은 무시당할 것이다. 거기에 있지만 애써 보여지지 않는 것이 된다. ‘저게 뭐지?’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모호한 대상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재명의 작품에서 이 보이지 않는 장막이 문제시된다. 그의 작품에는 잘 안보이던 것들, 뭐라고 명명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 화면 가득 전경화 된다. 그러나 그가 포착한 도시적 일상의 한켠이 처음부터 (분류할 수 없는)나머지였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들은 기능과 쓸모, 내용과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연과 달리,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가혹한 선택이 지배하는 자연의 경우, 쓸모없는 것은 없다. 단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자연의 현상이나 법칙이 있을 뿐이다. 이재명의 작품에서 자연은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다. 도시의 일부로 조금씩 등장한다. 그는 자연이 아닌 문명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재명에게는 도시로 대변될 수 있는 문명 역시 자연처럼 나타난다. 자연 없는 자연주의라고나 할까. 자연처럼 나타나는 문명은 나 이전에 거기에 있었던 것이고, 자신의 소유물도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상징적 우주는 그를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외시킨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했던 것 같은 집같은 공간—‘집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것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다.’—처럼 따스하고도 원초적인, 그래서 나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그러한 내재적 공간은 이제 없다. 적어도 현대의 도시에서는.
현실의 일부이지만 낯설게 다가오고, 더 나아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대상들은 일부분 작가의 작업방식에서 기인한다.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작업의 소재를 찾는 그에게 작은 메모지나 카메라 등은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포착하는 수단이다. 위아래를 잘라버린 과감한 프레임이 돋보이는 작품 <초저녁의 주유소>에서 주유소 불빛이 뿌리 없이 허공에 둥 떠 불타고 있는 문명을 떠올린다. 극장의 처마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 작품 <극장>은 SF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우주선처럼 깊은 공간을 가르고 날아가는 듯하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스케치하거나 사진으로 찍을 때, 포착되는 것은 대개 부분이다. 그는 본 것을 바로 그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무엇의 일부인지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맥락은 단절되는 것이다. 세계는 단편의 부스러기들로 다가오지만, 자기들끼리 단단히 얽혀 미지의 세계를 이룬다.
억압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다가오는 이러한 단절감은 우연적이기보다는, 일상에 편재한다. 그래서 이재명의 작업은 자연주의이면서도 리얼리즘이다. 근현대의 문예사조사에서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은 대립’(게오르크 루카치)했지만, 모더니즘이 모호한 현실이라는 현실성을 부각시키면서 양자의 대립각은 약화되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표면으로서의 도시, 그리고 그림. 이재명이 그린 풍경에는 입구와 출구가 분명치 않다. 관객의 시각적 산책을 위해 작가가 마련해 놓은 입구/출구가 없어서 시선은 미로에 들어선 것처럼 방황하게 된다. 입구와 출구가 없는 건물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건축 분야에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입구의 불확실성을 이전의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요소로 지적한다. 입구/출구의 존재감은 구조와 기능의 투명성과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이재명은 건물을 그리면서도 입구와 출구를 잘 그리지 않는다.
과감한 프레임 안에 살아남은 것들은 낯설게 다가온다. 가령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지붕 같은 것이다. 작품 <내려다 본 지붕(파랑)>, <내려다 본 지붕(상아색)>에서 나무에 둘러싸인 푸른 지붕은 무슨 건물일지 궁금하다. 그것들은 입출구가 생략됨으로써 폐쇄적으로 보인다. 격리된 요새처럼 완강하게 관객의 가상적 왕래를 거부하고 튕겨낸다. 작품 <에메랄드빛 창문들>에서 건물 아래를 싹둑 잘라내는 장벽은 자신의 시선을 감춘 눈구멍 같은 창문들과 마주하게 한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알 수 없는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긋남은 계속 된다. 풍경이 앞으로 좀 더 당겨오면 확실해질까. 작품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곳>은 불투명한 창 너머에 가득 쌓여있는 것들이 뭔지 확인되지 않는다. 극사실주의는 아니지만, 화면 가득히 평면적으로 잡힌 장면에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도시에서 흔히 발견되는 연립주택의 뒷면을 닮았지만, 그곳은 예상외로 식물원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식물원이 가능하게 하는 조직의 일부이다. 그러나 정작 식물들이 있는 장소, 즉 본격적인 식물원 역시 소원한 풍경이기는 마찬가지다. 작품 <어려운 나무>에서 식물과 조명시설이 한데 엉겨 이상한 덩어리로 떠있다. 유리와 철로 된 기능주의 건물인 식물원은 문명의 질서 안에 귀속된 생물들이 분류되고 명명되는 공간이다. 이 식물원은 자연을 투명하게 알고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계몽적 기획이 시민의 여가생활을 담당하는 구경거리와 결합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잘 꾸며진 인공 세계지만, 이재명의 그림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모습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 식물원은 ‘그 앞을 자주 지나다녔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은’, ‘들어갈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문턱이 있는 듯한’ 곳이다. 서울의 한 위성도시에 있는 이 여가공간은 활발하게 작동되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미술관만큼이나 대중들이 안 가는 장소일 것이다. 화려한 인터페이스들이 손쉽게 정보와 여가를 대신해주는 시대에 더욱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자연의 인공적 축소판인 식물원이나 동물원은 지금의 정보혁명을 낳은 초창기의 방식 중의 하나였다. 거듭되는 시뮬레이션의 과정은기원을 궁색하게 만든다. 이재명의 작품에서 그곳은 단지 썰렁한 교육 및 놀이시설이기 보다는 현대와 관련된 전형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가령 그곳은 자연의 질서를 투명하게 재현하려는 기능주의에 충실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능주의 자체가 모호한 것이 되었다. 보다 정확히는, 누군가한테 기능적인 것이 다른 누군가한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즉 기능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 우선은 시간이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고, 중심으로부터 거리를 둔 공간 또한 이러한 과정에 일조한다. 세계의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북미나 유럽의 식물원이라면 사정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제대로 굴러가는 듯한 화려한 스펙터클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본 주변부의 식물원은 흥행이 안 되어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 시민의 계몽이라는 관료적 기획과 맞물려 있는 곳, 이미 알맹이는 빠져버렸지만 처치 곤란할 만큼 비대해진 구조로 남은 부조리함이 있는 곳이다. 작가는 건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곳 뿐 아니라 움직이는 대상, 가령 거대한 트럭 같은 것에서도 현대적 구조의 단편을 본다. 이미지만 봐서는 트럭의 일부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트럭 운전사나 수리기사가 아니라면 별로 쳐다볼 일이 없는 차 아랫부분의 단편이다. 작품 에서 작가는 트럭의 일부에서 동화에 나오는 양철 로봇의 이미지를 본다. 작품 <무거운 간격>에서 도로 위의 전진 화살표는 화면 상단에 가득한 기계 구조가 운송 수단임을 암시한다. 그것들이 과연 서로 간에 잘 맞물려가면서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하게 해줄 것인가. 그것들은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는가. 녹슨 금속 표면이 전경 가득히 잡힌 작품 <나가는 길>에서 고기집의 연기는 제대로 빠져 나가줄 것인가.
장치들은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으며 모종의 기능을 암시할 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근대의 기계지만 밋밋한 표면을 가지는 현대의 기계처럼 기능을 숨기고 있다. 상업시설이든 공적 시설이든 구조의 차이는 없다. 하나의 기계적 구조가 있다. 기계들은 단절되면서 연결되고, 그렇게 인간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연결망의 단편을 그린다. 비록 단편이기는 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의 일부는 밀봉된 진공으로 다가온다. 이재명의 최근 작품에는 인간이 없지만, 그것은 그의 작품 속 기계적 대상들이 이미 인간이다. 누보로망의 작가들이 스스로를 ‘그리는 자이면서 그려지는 자’로 생각했듯이, 낯선 대상은 낯선 주체를 암시한다. 주체는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가 되었다. 그것은 소외감을 주지만, 작업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로만 되돌아오는 유아론과 환원론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을 통과하면서 표현과 재현을 벗어난 현대미술은 이처럼 중심을 바깥에 둔다.
반면 기존의 재현주의는 중심에 근거한다. 가령 관료적인 사람은 관료적 구조를 재현하고, 대중은 대량 소비적인 구조를 재현한다. 이재명의 풍경에서 사람이 있을 경우, 구조는 구조들의 복합으로 나타나며, 부조리함은 보다 직접적으로 발언된다. 작품
이재명의 경우 주체는 공간에 편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전히 자신이 직면한 공간에 대해 질문한다. 작가는 ‘늘 보던 장면이 순간적으로 이상할 때’ 그곳을 그린다. 현대예술, 아니 예술 자체에 고유한 소격효과는 화가의 출신과도 연결될 듯싶다. 그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청년기에 서울에 올라와서 자신에게는 ‘너무 큰 공간’에 직면했고, 처음에는 자유롭고 좋았지만, 점차 의혹에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도 없어서, 시골 역시 불안감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자기 자리가 없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작가에게는 이제 마음속으로만 되돌아갈 수 있는 고향, 그리고 향수를 달래주는 작은 텃밭이 남아있을 뿐이다. 텃밭에서의 도시 농부의 체험은 식물원 같은 대중적-관료적 공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텃밭은 식물을 매개로 한다는 점은 식물원과 같지만, 미진하나마 실재와 접촉할 수 있는 경험이다.
생명을 돌보는 행위는 그저 구경꾼의 시점과는 다른 것이다. 텃밭에서의 활동은 그림 그리기와 같은 육화된 행동에 속한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물신이 아닌 살아있는 것을 다룬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것은 죽은 표면의 틈과 균열을 늘리며 새로운 세계를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것은 관료/소비주의가 코드화할 수 없는 이질성이 생성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식물 뿐 아니라 인적이 없는 도시의 실재감 없는 풍경은 작품 속 함석판 구조물처럼 얇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었을 원래의 자연은 두텁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그러한 자연공간이모든 것의 근원이자 사회적 과정의 시작이며, 모든 독창성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이라고 하는 강력한 신화는 이제 허구가 되어간다. 르페브르는 자연이 기껏해야 다양한 사회들이 공간을 생산하기 위한 원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은 중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권력에 의해 기획된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자연공간은 계량화된 추상공간이 되었고, 여기에 권력이 담긴다. 그는 자본주의가 상품의 세계와 나름대로의 논리, 세계차원의 전략, 화폐의 힘과 정치적인 국가의 권력을 포괄하는 추상공간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이 추상공간은 은행과 비즈니스 중심, 대규모 생산단위들이 거대하게 짜인 망에 토대를 둔다. 추상공간에서 일어나는 동질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르페브르의 주장은 1968년 5월 혁명에 바탕 한다. 자본주의 질서가 더욱 공고화 된, 그리고 공고화 될 시점에서 본다면, 혁명을 논하는 주장은 다소간 뜨겁게 다가온다. 21세기의 화가 이재명의 시선은 다소간 주변인적이다. 근대 시대 세계의 수도 파리에서 주변적인 것을 통해 낡은 진보를 읽었던 도시의 고고학자 발터 벤야민의 관점, 또는 자신의 무의식과 공명하는 사물을 만나기 위해 넝마주의같은 태도를 취한 초현실주의자와도 비슷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당면한 세계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대응하기 보다는 표면을 표류하는 시선이다.
그러한 관점은 비판적이면서도 시적이다. 작가는 대면하게 되는 공간에 대해 좋고/싫고, 옳고/그르고를 떠나 일단 이해하고자 한다. 게오르그 짐멜은 『모더니티 읽기;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대도시에 작용하는 힘들은 전체 역사적 삶의 뿌리와 정점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하나의 세포 같은 덧없는 존재로서 그러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거창한 야심 없이 발견과 수집, 기록을 일상화한다. 매일 가는 길에서 매일 보는 광경들이지만 아직도 ‘내가 봐야할 공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봐야 보이는 것들’, ‘계속 끄집어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공간들’을 끄집어내려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장면들을 다시 봤듯이 관객들도 그것을 다시 보게 한다. 그에게 도시는 읽는 대상이다. 그러나 단지 읽기에 머무른다면 시각적 소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는 투명하게 읽을 수 없는 부분 또한 주시한다. 이 부분은 읽기가 아닌 생산, 즉 쓰기/그리기와 관련된다. 그가 현실 속에서 발견한 균열과 틈은 쓰기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의 쓰기/그리기에는 깊이가 없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지금도 열심히 그리고 있으며, 비판적이긴 하지만 심미적이기도 한 이재명의 도시풍경에서 공간은 단편적이면서도 평면적으로 나타난다. 단편성은 소재의 선택이고 평면성은 조형적인 해법이다. 건물과 그에 부속되어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장치들은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전체를 상상할 수 없으므로, 각각의 구성단위는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유기적 관계란 무엇보다도 전체와 부분간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체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자들이나 누보로망의 작가들이 주장했듯이, 선재하는 관념적 질서를 해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단편들은 있는 그대로이면서도 다르다. 앞뒤로 끈이 떨어진 진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현실을 해체하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가 먼저 그렇게 했다. 가령 노동의 산물인 상품 또한 그렇게 나타난다. 19세기의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낯선 사물이 되어 이제는 소비자인 노동자와 맞선다’고 하면서, ‘노동자의 흔적을 제거하면서 대량생산은 노동자의 삶을 부정한다. 대량생산은 자신을 눈물 없이 제작된 대상의 마법적 생산처럼 보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외에 대한 탁월한 정치경제학적 해석이다. 20세기의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분석한 현대의 스펙터클 또한 그러하다. 공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르페브르는 『도시에 살 권리』에서, ‘도시와 도시적인 것은 사용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의 진행으로 상품화가 일반화되면서 사용가치에 토대를 두었던 도시의 파괴’가 초래되었다. 그에 의하면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는 주거 행위 속에서 사회적 삶의 퇴화’를 정당화한다.
자본의 이익에 따라 상시화 된 (재)개발은 공동체를 분쇄한다. 이재명은 단편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얇게 그린다. 아크릴과 유화의 얇은 느낌에 더하여 계속 쓸어내리는 터치가 그러한 평면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가 만나는 공간이 ‘무대처럼 껍데기만 나와 있는 느낌’의 표현이다. 이러한 무대같은 세상에서 찬란한 태양 빛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꺼질 조명으로 다가온다. 이재명의 작품 속 공간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가 시각적으로 나 육체적으로 투과할 수 없는 얇고 겉도는 공간들이다. 작가는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상황에 순응하며 그 상황을 천천히 풀어 보려한다. 대답이나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뚜렷한 전망이 없는 현대인의 삶처럼 작가는 표류한다. 이름붙일 수 없는 장소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표류자들에게 ‘공터는 중요한 장소’(앙리 르페브르)임을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기능적인 도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지 공터처럼 생각된다.
이런 곳에서 지배적 질서가 부여한 고정된 기능과 역할은 전도될 수 있다. 빈틈과 간극에서의 표류의 공간을 늘려나가는 것은 동질화를 바탕으로 한 위계적 공간의 질서를 교란한다. 투명한 관료주의가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역행하는 움직임은 디스토피아와 연결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 헤테로피아가 있다. 지배적 질서의 틈에서 생성되는 이질적 공간은 누군가한테는 탈주의 공간, 누군가한테는 다시 코드화(탈영토화)해야 하는 공간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가 그토록 부조리한 것이라면, 지배적 구조 또한 겉보기의 합리성과는 다름을 의미한다. 이재명은 위계적 질서의 유리한 지점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는 총체성이 아닌, 다수의 집합을 쌓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저항적이기 보다는 공감을 통한 확장이라는 예술의 방식을 따른다. 저항적 방식에 내재한 대립은 합리주의라는 미명아래 다시 질서화 되곤 하지만, 예술의 공감적 방식은 지배적 몸체의 체질을 이질적인 것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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