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미술상 30주년 기념 황용엽 개인전 - 같은 선상에서展

2018.09.07 ▶ 2018.09.16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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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ㅣ 2018년 09월 07일 금요일 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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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꾸민이야기 80.3x65.1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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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어느날 90.9x72.7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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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나의이야기 90.9x72.7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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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나의이야기 100x80.3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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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어느날 116.8x91cm, oil on canva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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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인간 130.3x97cm, oil on canva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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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어느날 145.5x112.1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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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나의이야기 145.5x112.1cm, oil on canva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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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어느날 130.3x162.2cm,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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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가족 162x130.3cm, oil on canvas,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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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엽

    인간 162.2x130.3cm, oil on canvas, 1982

  • Press Release

    2018 Art Chosun On Stage 의 4 번째 기획전시는 조선일보 이중섭미술상 30 주년을 기념하며 첫 번째 수상자인 황용엽 작가의 과거 작들과 신작 40 여 점을 선보인다. 화업의 길로 들어선지 60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황용엽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작가의 삶을 빼놓고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1931 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민족의 분단과 전쟁의 상처, 남겨진 이방인으로, 가족들과의 생이별…, 디아스포라적 의식과 격한 고통을 받았던 내면을 인간의 형태로 현재까지 표현하고 있다.

    북한의 징집을 피해 위험한 월남을 감행했던 청년 황용엽은 국군에 입대하여 6.25에 참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삶의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진다. 연고가 없던 남한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황용엽은 우여곡절 끝에 편입한 홍익대학교를 1957년 졸업 한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작업 초기 ‘실존미술가 협회’(1958)에 관여하고 ‘앙가주망(Engagement)’의 창립멤버로 활동(1961~1969) 하기도 했지만 이후 어떤 형태의 그룹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본인의 독자적인 작업에 몰두하였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점점 도식화되었으며 단순화 되어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었다. 60년 대에는 어두운 색채로 그가 보고 느꼈던 극한의 고통을 담았으며, 70년대 작품 속의 “인간”은 기하학적인 선으로 도식화 되고 회색과 갈색 등 무채색 단색조 배경으로 변화했다. 2 80년대 이후부터 지난 작업들과는 달리 다양한 색감으로 한국적이며 토속적인 배경으로 새로운 시도의 작품이 지속 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87년작 ‘무녀의 비밀Ι’ 작품에서 시작된 무속, 샤머니즘 요소가 다시 등장하고 어린 시절 강서 고분벽화를 자주 접했던 문양과 패턴들이 표현되었다.
    올해 88세(米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을 꾸준히 연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번 전시에 중점적으로 전시될 최근 그의 신작에서는 70년대의 색감과 유사한 회색과 블루의 단색조로 주로 이루어졌으며, 70년대의 갇혀있던 인간의 형태와 흡사하지만 더욱 도형적이고 한국적이며 토속적인 문양과 패턴이 조화를 이루어 새롭게 표현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곧 ‘삶의 증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그 기억을 캔버스에 기록한다. 이는 곧 우리나라 현대사이며,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이 우리 역사를 보는 것과도 같다. 자기성찰을 꾸준히 하며 스스로가 치유하고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황용엽 작가의 이번 기획초대전은 1989년 조선일보 이중섭미술상 1회 수상 이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3번째 열리는 개인전이다.


    ■ 작가 노트
    “나는 늘 인간이란 소재를 갖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소재는 별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젊은 시절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북한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숙명 하나만으로 폐쇄된 공산사회에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독재 사회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비인간의 굴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면 그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표현마저 빼앗겼다면 사람은 한 낱 상자 속에 놓여진 꼭두각시 이상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러한 숙명이 나의 가냘픈 자유의 절규로 화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의 내면이 화면 위에 형상화하면서 보잘것없는 왜소하고 가냘프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라 생각된다. 끈으로 옭아매어진 상태로서도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니기에 무언가 찾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규의 상황이 나의 그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들이다. 공허한 상자 속에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나의 독백을 반복하면서 나의 모습과 가족을 그린다고 할까. 아니면 나도 알 수 없는 현실의 인간이 아닌 내 형상을 갖고 있다고 할까. 이러한 여러 한계상황은 나의 내면에서 떠날 수 없는 조형의 바탕일 수밖에 없고, 크고 작은 인간의 형태, 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변형된 인간들의 비슷한 애조(哀調) 띤 모습으로 변모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인간상을 그리는 작업이 나에게는 중요한 심리적 인간적 요소이며 동시에 회화적 요소의 바탕에서 그리려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정된 2차원의 화면 위에서 인간의 동작을 가로 놓아보고 세로 놓아 보고 확대 또는 축소해 보며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인간>이란 제목을 붙인 대작들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화면에 선이 등장해 인간을 억압하는 조형작업을 했다. 나는 단순한 선, 단순한 색, 단순한 형상을 추구했다. 지금 와서 이때의 그림들을 봐도 ‘어떻게 이처럼 절박하게 그렸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겪어 온 삶-북한에서의 속박, 구속, 전쟁, 죽을 고비, 부상 등이 너무도 치열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들이 인간을 갇혀 놓은 상황의 작품에서 나는 인간, 속박, 자유 등의 한계상황, 피할 수 없는 극한상황을 추구했다.”

    “그림은 곧 삶의 증언이라고 믿는 나는 나의 지난날의 삶에 비추어 도저히 밝고 기름진 인간의 모습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극한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모았던 나는 또 다른 실험의 길로 들어섰다. 화폭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던 인간상을 화면에 흡수시키고 내 나름대로 장식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색채를 찾아 조형미를 표출하고자 의도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속적인 민화 도자기 기와무늬 떡살무늬 장롱장식 등 한국적인 원형미에서 단순화의 비밀을 캐내고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고분벽화의 문양들과 샤머니즘적인 소재들을 혼합해 그렸다. 오방색에 원색을 곁들여 화사해졌고 이야기가 많아졌다.”

    “인간성의 추구는 내 화필이 꺾이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는 나의 명제이다.”


    ■ 평론글
    Yves Michaud (철학자, 예술평론가, 에콜 데 보자르 학장 역임)

    예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경험
    1931년에 출생한 황용엽은 화가로서의 일관성과 능력을 가늠할 정도의 오랜 경력을 지니고 있다.

    황용엽의 화가로의 일관성은 다름 아닌 작품 주제의 일관성이다.

    근현대 한국 화단을 휩쓴 예술 경향이 불교와 불교적 미니멀리즘이라면, 황용엽은 작품 초기부터 묘사적이거나 설명적인 것과는 거리를 둔 구상회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현실의 알레고리를 그린다. 사람, 보다 정확하게는 인간과 휴머니티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고, 자연과 지구상에서 가장 날 것의 기이한 형태를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프랑스어 인간(homme)의 어원은 인간을 빚어낸 토양과 진흙을 의미하는 유럽어 humus인데, 여기에 지성, 언어, 상징을 이해하는 능력, 교감 능력, 감정과 의식 등 근본적인 독창성이 더해져서 영혼이 부여된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만이 지닌 휴머니티가 바로 예술, 문명, 문화를 통해 표현되는데 간혹 아니 종종 왜곡되고, 훼손되고, 파괴되어 소멸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처럼 병들고 기아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는 자신의 운명을 이토록 불행하게 만든 하나님과 신들을 원망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그의 불행은 인간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인간들이 휴머니티를 져버리고, 휴머니티를 무시한 결과 인간성과 자기 자신을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용엽의 예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황용엽은 1945년 한반도 분단 이후 북한에 편입된 지역에서 1931년에 출생했다. 어린 시절 황용엽은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1905년 일본에 점령당한 후, 1910년 일본에 합병된 한국은 폭력적인 억압과 유화정책으로 점철된 시기를 거치게 된다. 1930년을 기점으로 일본 점령군은 더욱 난폭해졌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아, 강제 징용, 강제 수용, '위안부'로 둔갑시켰으나 실상은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하게된 여성들을 비롯해 사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20세기가 야만의 시대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점령은 특히 야만적이었다. 유럽인들의 경우, 상해에서 영국인 부모와 함께 일본 수용소에 수감되어 유년기를 보낸 제임스 발라르(James Ballard)의 글을 읽으면서 당시 일본의 폭력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했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처한 운명은 더욱 잔인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황용엽은 일본과 한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한다는 원칙 하에 펼쳐진 동화정책으로 인해 두 언어와 두 정체성 간의 혼란을 겪으며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에 시달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용엽은 독특한 가정사를 겪었다. 일본과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부터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중병을 앓게 되면서 아버지는 재혼했고, 황용엽은 양부모의 손에 자랐다. 훗날 친모를 찾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분단되면서 어머니를 다시 잃고 말았다.

    일본 점령기에 대한 트라우마는 보다 폭력적이며 삶을 직접적으로 강타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북쪽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 코민테른의 지지 하에 김일성 공산 세력이 점령하게 되었다. 결국 북쪽 주민들은 일본 지배 이후 스탈린 독재체제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과 남한은 냉전을 겪게 되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 종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남한은 미국과 유엔의 관리를 받았는데, 사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군부 독재의 격동기를 수 십 년간, 수 차례 겪은 후에야 비로소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한국 역사 및 개인적 가족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황용엽이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황용엽은 일찍이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발전시켜 나갔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평양 예술 학교에서 사회주의 현실주의 수업을 견뎌야만 했다. 당시에 배운 관습적이면서 관례적인 내용을 온전히 비하할 수만은 없다. 학생들로 하여금 기본 테크닉을 제대로 습득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용엽은 이 같은 주입식 교육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북한과 남한의 관계는 점차 악화일로를 겪게 되었고, 결국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격동기에 북한군에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황용엽은 남한으로 도피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군은 패전의 위기에 몰려 부산까지 후퇴했다가, 미군의 지원에 힘입어 국토의 일부를 회복했다. 서울은 북한군에 함락된 이후 재탈환되었으나 도시의 70% 가량이 파괴되었다. 총 80만 명의 군인 희생자와 2백만 명의 민간 희생자를 낳은 이 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황용엽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부상을 당했는데, 재활 이후 미군 안내를 담당하기도 했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두 차례나 끔찍하고 불합리하게 감금을 당하기도 했다. 평화(엄밀히 말하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휴전)는 황용엽이 다시금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한 뒤 1957년에 학업을 마쳤다.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부족한 물자, 해외 동향에 대한 자료의 부재,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사망으로 인해 황용엽의 학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홍익대학교에서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 교수를 사사했지만, 그 역시 아직 파리나 뉴욕 등 서구 국가를 방문하기 이전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에서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억누를 수 없는 소명감이 있어야 만이 가능한것이었다. 학업 과정에서 겪게 된 각종 부침도 황용엽의 자기 주도적인 표현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특히 그는 당시에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혹독한 시련으로 인해서 발생 연유가 충분히 이해 가능한 공포에 대한 건망증을 거부한 일부 한국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황용엽의 작품 전반을 살펴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이 현실주의와 추상주의에 대한 거부 그리고 인간을 날것 그대로 역경과 위대함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화가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개성이다. 현실주의에 대한 거부라 함은 단지 사회주의 현실주의 또는 고전적 구상회화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소비에트, 근대 중국 팝아트 형태로 존재하는 현실주의의 아바타 역시 포함된다.
    한편 추상주의에 대한 거부는 보다 완곡하고 섬세하다. 그 이유는 황용엽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표면, 기호, 재료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미국, 유럽, 한국 예술가들의 추상적인 기법과의 유사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황용엽의 추상성은 인간 형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시적 현실주의'라는 표현 이외에는 표현이 불가능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황용엽은 캘리그라피에서 영감을 받은 서구 추상주의의 영향뿐만 아니라 훗날 파울 클레(Paul Klee)를 통해 접하게 되는 유럽의 영향에서도 빗겨나 있다. 황용엽의 예술은 특정 경향의 영향이 아닌 다양한 영향의 만남 내지는 조우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설명을 비롯해 '영향의 조우'에 대해서 논하기에 앞서, 황용엽 작품을 주요 단계별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비극적이고 격동적이었던 1950년대 월남하면서 전쟁과 부상 회복을 겪은 황용엽은 일찍이 1960년대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안하게 된다. 그는 선과 색채가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배경을 바탕으로 간신히 식별 가능한 개별 형상이나 인간의 형태를 실루엣과 얼굴로 축소시킨 인간 집단 내지는 군중으로 구성한 눈부신 '여인' 시리즈를 완성한다. 식별 가능한 형태는 격렬한 표현주의적 회화 배경에서 간신히 분리 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에 인물을 보는것인지 추상적 표면을 보는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이 인물들은 과연 누구일까? 화가는 여성들이라고 설명하지만 실은 재료의 부착물에 얽매어 있는 인물, 재료에 갇힌 인물, 더 나아가 강제 수용소라는 끔찍한 명칭을 가진 장소에 수감된 인물들이다. 주된 색상은 붉은색, 황토색, 갈색 등 흙의 빛깔이다. 1950년대 쿠닝(Kooning)의 작품에 등장하는 울부짖는 여성들이나 폴록(Pollock)의 추상 인상파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시 황용엽은 뉴욕에 가 본 적도 쿠닝(Kooning)이나 폴록(Pollock)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실 황용엽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옥죄이고 압축된 인간들로 각각의 개인은 '무리 중 하나' 8에 불과할 뿐이다. 유럽 관객이라면 뒤뷔페(Dubuffet)의 작품을 떠올리겠지만 이 역시 영향이 아닌 조우의 결과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품에 변화가 나타난다.

    우선 푸른색과 녹색이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색채가 밝아진다. 특히 이전에는 형상이 바탕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었는데, 각각의 그림이 근본적으로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그림들 가운데에는 감옥 같은 일종의 부피감, 원근법으로 부피감을 자아내는 틀이 존재하는데, 그 내부에서 여전히 인간들을 찾아볼 수 있고,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여성'이 아닌 '인간'이다.
    황용엽은 이들을 감옥에 갇힌 수감자, 감방에 감금된 인물, 창살에 갇힌 꼭두각시 인형이라고 설명한다. 여전히 전쟁과 감옥 생활에 대한 트라우마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림이라는 예술적 표현이 보다 가시화되었고, 향후 이 같은 경향은 더욱 강조된다. 우선 1970년대 중반, 황용엽은 형상을 거의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선에 숨겨져 있는 듯한 선으로 가득 찬 회색빛 그림을 그린다. 이 때 반복과 미니멀리즘, 그리자이유로 인해서 거의 추상에 가까운 기이한 시점이 등장한다. 현재 황용엽이 미니멀한 회색 빛 방식을 재도입해서 이 시기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작품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후 그림의 덜 어두워지고, 양식화(樣式化)되고, 형상이 보다 구분되고, 구성을 갖추면서 바탕으로부터 분리된다. 이에 대해 황용엽은 고분과 사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무속신앙 벽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형상은 네모난 얼굴에 간단한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여전히 암시적인 측면을 지니지만, 더 이상 경직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며, 관계를 형성하고, 교류하고, 대화하고, 때로는 춤추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때의 춤은 기쁨의 춤이 아닌 삶과 생명력의 표현에 불과하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광주항쟁을 겪으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흔들리게 되면서 황용엽은 드디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등지를 방문하게 된다. 이 때 그의 작품은 더욱 격렬하고 제스처가 강조되면서 표현주의라는 용어를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게 변모한다. 황용엽은 분명 움직임, 저항, 봉기, 전복을 표현하고자했다. 오랜 세월 동안 권위적인 때로는 독재적인 정권을 겪었고, 전통의 무게가 억누르는, 관례와 풍습을 존중하는 한국에서 1980년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 저항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는지를 정교하게 이해하기에는 나는 한국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1980년대 황용엽의 작품들은 상당히 참여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고 짐작된다.
    1980년대 말, 상황이 진정되면서 1990년대 - 2000년대 아름답고 섬세한 화법이 자리잡게 된다. '인간'들의 얼굴은 보다 밝아졌고, 실루엣은 섬세해지고, 구성은 보다 복잡하고, '춤추는 듯'하고, 제스처에 가까워 졌다. 작품의 제목 역시 밝아졌다. 과거에는 인간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연인들(One day lovers)', '삶 이야기(Life story)', '옛 이야기(Old story)', '가족(Family)' 등의 제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점차 매체와 스타일로서의 그림이 그림을 통해 표현되는 주제보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화가가 추구하는 대상이 점차 그림, 심지어 형식이 되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즐거움 역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화가가 그림, 자신의 예술과 좋아하는 것에 자유롭게 몸을 맡기듯이 말이다. 배경은 아라베스크 무늬, 모자이크 무늬, 다양한 색상의 동물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인물은 풍경, 전원, 나무, 산, 도시, 도로를 누빈다. 그곳에서 앞으로 전진하거나, 서로 만나거나, 교류한다. 풍경은 빛나고, 밝고, 다채롭고, 생기 있지만,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이집트 봉분벽화 같이 도안화되어 있다. 이 시기는 행복이 가득한 멋있는 그림의 시기이다.
    보다 최근에 들어서 황용엽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거하며 1970년대 회색빛 기하 구조에 대해 명상적 회귀에 빠진 듯하다. 구조, 표현의 틀, 인물의 제안은 남아있지만 부차적인 것들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색상의 폭도 축소되어 회색과 잿빛 푸른색이 흰색 선으로 구조화되었다. 마치 이제 작가가 격동적인 과거를 보다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듯이 평정심이 평온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황용엽의 작품에 영향을 준 경향과 유사성에 대해서 언급해보자. 그의 작품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어떠한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지 설명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예술가, 아니 모든 예술가는 자신만의 고유의 방식과 스타일을 강조한다. 바로 이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의 독창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허공에 홀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황용엽은 훌륭한 학문적 교육을 받았고, 내가 본 그의 그림과 크로키는 그가 자신만의 연구 방법을 통해서 화가로서의 재능을 구현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1950년대 황용엽은 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존재론적 참여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잊고 외면하려 한 충격적인 현실에 대한 참여라는 측면에서 소위 참여 작가 집단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황용엽은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랐지만 한국의 무속신앙 유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세기 신교도 전도사들이 한국에 유입되기 전에, 4세기 불교가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한국의 고유 종교는 무속신앙과 정령숭배 사상이었고 그 근원은 시베리아 더 나아가서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속신앙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는데, 아마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도의 미국주의와 신 공산주의 독재에 시달리는 국가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만드는 요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 봉분벽화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남은 벽화의 잔해는 암석에 그린듯한 느낌과 인물의 스타일 면에서 황용엽의 그림세계에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황용엽의 작품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이 분명 무속신앙이 존재했을 유럽 선사시대의 벽화와 유사성을 지님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시성은 가공된 것이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중한 것이라고 감히 표현할 수 있으며, 20세기 예술에서 피카소(Picasso), 말레비치(Malevitch), 고갱(Gauguin), 클레(Klee)의 작품이 감동을 주듯 감동을 준다.
    황용엽 작품의 독창성은 이 같은 원시성에 현대적인 회화 어휘를 이식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재난, 감금의 고통, 전쟁의 불행은 마치 포트리에(Fautrier)와 베이컨(Bacon)의 이미지처럼 짓이겨지고, 절단되고, 개성이 말살된 인간으로 유령 같은 실루엣에 표정 없는 얼굴, 깡마른 모습이나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를 비롯한 다수의 전문가들이 1970년대 황용엽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부 '여성'들과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쿠닝(Kooning)의 작품에 등장하는 발작적인 여성들간의 유사성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 같은 유사성은 두 세계를 모두 아는 이들에게만 의미를 갖는 '상상의 것'이지만, 인간 예술의 상수(常數)에 부합하는 동굴 벽화의 선처럼 현실세계의 표현적 상수(常數)를 건드린다. 뿐만 아니라 우연처럼 만나게 되는 영향도 존재한다. 그림 중앙에 감옥이 등장하는 1980년대 작품들은 내부에 인물들을 가두어 놓는 방식 면에서 베이컨(Bacon)을 연상시킨다. 1980년대 작품의 깡마른 인물들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폴 클레(Paul Klee)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유사성이 초기에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으나 분명 실질적이다. 유럽 예술에 대한 정보가 드물었던 상황이지만, 황용엽이 초창기에 폴 클레(Paul Klee)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폴 클레(Paul Klee)는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제대로 재현하는데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클레(Klee) 가 가장 많이 확산된 현대 작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유럽에서 전후 재건 과정에서도 클레(Klee)는 널리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황용엽의 스승이었던 김환기 역시 클레(Klee)의 열렬한 숭배자 중 하나였다. 황용엽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아마 더 다양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선사시대적인 그림과 어린이의 그림 중간에 놓인 클레(Klee)의 작은 인물들과 꿈꾸는 듯한 휴머니티는 시간적 초월성과 시적 감성이라는 측면에서 황용엽과 같은 예술가의 관심을 끌만한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황용엽의 경우, 진지하게 영향이라는 단언하기 힘들다. 영향이라기 보다는 유사성, 선이나 분위기의
    공유라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황용엽의 작품은 한국 문화라는 뿌리를 넘어선다. 물론 황용엽은 한국 문화와 한국적인 정체성을 대변하지만, 동시에 발가벗겨진 본연의 휴머니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보편성을 확보했다. 칼 막스(Karl Marx)가 예외적으로 종교에 심취한 시기에 쓴 글에서 가장 극단적인 결핍 상태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는 보편적인 인간의 형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산도, 그 무엇도 없는 발가벗은 가난한 인간은 인류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황용엽은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학대 당하고 감금된,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은 황용엽의 작품에서 슬픔, 우울, 애도, 쇠약에서부터 기쁨, 사랑과 나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자산과 더불어 전형적인 인간을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황용엽은 대륙과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성을 포착하는데 성공한 예술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017년 11월

    전시제목이중섭미술상 30주년 기념 황용엽 개인전 - 같은 선상에서展

    전시기간2018.09.07(금) - 2018.09.16(일)

    참여작가 황용엽

    초대일시2018년 09월 07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5: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조선일보미술관 CHOSUNILBO ART MUSEUM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1 )

    주최아트조선

    주관㈜CS M&E

    후원Seoul Art Guide, (주)제이앤영글로벌

    연락처02-724-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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