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et Gilles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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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와 쥘의 소설적 작품세계
피에르 꼬모이 (Pierre Commoy)는 1949년 프랑스 라로슈 쉬르용에서 출생하여 제네바에서 사진가로 활동했다. 쥘 블량샤르 (Gilles Blanchaer)는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출생하고 에꼴 데 보자르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둘은 모두 잡지사에서 근무를 하다 1976년 파리의 겐조 부티크 파티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이들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하고 숙소 겸 작업실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1977년부터 장 폴 고티에,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입생 로랑, 이기 팝, 마돈나 등과 같은 유명인들의 포트레이트 사진을 피에르가 촬영하고 그 위에 쥘이 페인팅 작업을 해서 완성된 작품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K현대 미술관의 전시는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14년 여 만의 한국 전시이다. 게이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파격적인 남성 누드 중심의 피에르와 쥘의 작품들은 당시의 한국 미술계에 큰 반향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전시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미술계 안팎에서는 두 사람의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신선한 작품들은 이후 한국 사회와 미술계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일반 대중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 변화와 예비 예술가들의 개념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피에르와 쥘이 14년 전보다 세 배가 넘는 양의 작품을 가지고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작품의 양적인 측면 뿐 아니라 질적인 부분과 다양성 면에서도 과거와는 크게 차별화가 될 것이다.
이들의 작품을 크게 8~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시기로 나눈다고 했을 경우 초기의 작품들은 주로 인물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거나, 인물의 심리적 상황을 조명 장치를 이용해 겉으로 드러내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포트레이트 표현 방식의 전형을 보여왔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들어서서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인물 뿐 만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배경이 보다 확장되었으며 또한 대상과 배경을 설명하고 보조하는 다양한 도상들이 함께 등장하게 된다. 과거 한국 전시에서 선보였던 2000년대 초기 작품들은 포트레이트 중심에서 확장된 배경의 형태로 바뀌어 나가던 과도기적 성격의 작품들이 대다수 였다. 그에 비해 우리의 이번 전시에 출품 된 2000년 이후부터 올해 완성된 최근작까지는 피에르와 쥘의 명확한 세계관과 철학을 반영하여 완성된 시리즈로서 다시 한번 우리를 전율과 감동으로 몰아가기 어렵지 않아 보인다.
피에르와 쥘의 작품세계를 특정한 단어나 문장으로 간단하게 규정내리기는 어렵다. 의도적으로 과잉 된 이미지들의 조합이 무수히 많은 기표와 기의가 뒤섞여 혼재되어 있는 탓에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해석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그들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도 않고, 반대로 불친절하게 해석을 차단하고 있지도 않으며 -대부분의 현대미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독해와 판단을 온전히 관람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들 작업의 연대기를 가로 지르는 가장 큰 테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다소 상투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의 맞은편에 삶이 아닌 사랑을 대입시킨 부분은 이들의 작업을 편견없이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물론 작업의 출발 지점이 두 사람의 사랑에서 비롯된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단순한 에로스를 넘어 대상과 삶을 대하는 관찰자의 중립적 태도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 여기서 말하는 중립적 태도란 대상을 비판없이 그리고 편견없이 주어져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죽음'의 반대편엔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피에르와 쥘에게 있어서 사랑 (중립적 태도)이 부재한 삶과 작업은 온전하지 못한 미완이며 동시에 가치 없는 삶으로 간주되는 이유이다. 그런 탓에 그 안에 제시되는 다양한 도상들은 보편적인 '사랑과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기독교의 성인(聖人), 고대 신화 속 인물, 역사적 인물, 신격화 된 인간, 군인, 선원, 일반인으로 위장한 유명인 혹은 반대로 유명한 캐릭터가 된 작가의 주변 인물 등이 특별한 규칙없이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들 또한 에로티시즘, 게이 문화, 종교적 혹은 반종교적 아이콘, 그리고 이단적 성격의 도상들까지 작가의 시선을 매료시킨 거의 모든 분야의 동시대 이미지들이 사용된다.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흠모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나 휴양지 사진을 벽에 걸어 두거나 혹은 오래된 격언이나 좌우명 따위를 적어 책상 머리맡에 붙여 놓았던 것처럼 이들은 대상이나 이미지를 채집하여 캔버스에 진열한다. 단순히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합성 하거나 콜라쥬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하나의 실제 대상들을 제작하거나 재현하여 무대에 배치 시킨 후 촬영을 하기 때문에 정말로 '진열'하는 방식이 맞다.
우선 피에르와 쥘의 작품은 기존의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 다시 말해 사진은 항상 현실을 가감없이 직접 반영한다는 점, 복제가 가능하므로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상실된다는 점, 그리고 입체적 표현이 불가능 하다는 점, 촬영자의 역할을 도구로 축소 시킨다는 점 등 그간의 사진 작업들이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가둔 어떤 틀 안에서만 한정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피에르와 쥘의 작업은 이러한 사진의 기능 및 표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 - 1940) 의 표현처럼 현실을 왜곡하여 미화하고 이상화 하는 것이 기존 예술의 기만이었다면 사진은 반대로 현실을 폭로한다. 또한 그는 기존의 사진 예술이 회화나 조각 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파괴하는 용도로 사용 된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의 사진 담론에 의하면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엄숙성과 유일성이 사진이라는 매체에 의해 해체되고 이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사진은 더 이상 문서화 되지 않고 회화가 된다. 벤야민이 언급한 이 아우라는 결국 원본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경건한 분위기를 의미한다. 예술의 아우라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작가의 노동과 경험, 시간성처럼 어떤 전통성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했을 때 사진 작품은 전통이라는 가치를 가질 수가 없기에 아우라 또한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와 쥘은 복제가 불가능한 사진 작품을 제작하여 기존의 예술적 아우라를 지속시킨다. 나아가 작가의 노동과 시간성마저 철저하게 적용된 그야말로 예술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지닌 순수한 아우라를 발생해 내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사진 작업은 쥘에 의해 표면에 회화적 표현이 추가되고 최종적으로 직접 제작한 액자에 넣어진다. 어떤 작품들의 경우 작품 자체 보다도 액자가 발산하는 에너지가 훨씬 강력한 것이 있을 정도로 이들의 작품에 있어서 액자가 차지하는 시각적 비중은 크다. 작품의 내용이나 배경, 혹은 등장하는 도상들에 따라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충격을 때로는 액자가 완화하거나 혹은 더욱 확장 시키는 역할을 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이들의 작업에 있어서 이 액자는, 기본적으로는 액자의 전통적 역할 (작품을 보호하고 그것의 시각적 완성도를 높이는)을 하는 동시에 사진의 평면성을 극복하는 용도로 사용이 되고있다.
피에르와 쥘의 작업은 마치 연극 무대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판타지 소설처럼 신비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한 평 남짓의 작은 무대 위에 다양한 오브제들을 설치한다. 이러한 오브제들은 최종적으로 모델을 보완하고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브제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주재료들이 플라스틱이나 튜브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부분이다. 플라스틱은 그것의 가치 보다는 주로 명확한 사용 용도를 갖은 전형적인 현대 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 - 1980)의 표현을 빌자면 플라스틱은 자연보다 인간이 월등히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적의 재료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우회적으로 작용하여 해석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피에르와 쥘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바르트의 관점으로 보면, 전자의 경우처럼 작가가 보편적이고 익숙한 이미지들을 제시해 감상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스투디움(stadium) 이라 한다. 반대로 푼크툼(punctum)은 관객의 개인적 경험이나 성향, 취향 등과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이미지를 접했을 때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을 의미한다. 물론,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 개개인의 경험과 취향을 고려하며 작업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푼크툼은 작가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경험이나 입장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공교롭게 비슷한 입장을 지닌 특정 감상자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 자극이 형성된다. 이렇게 접근 했을 때 스투디움이 작품을 감상하고 독해하는 재미를 선사해 줄 순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꼭 감동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다수에게 보편적 해석이 가능한 여지를 전달하는 작품과 특정 관객만이 인지 할 수 있는 자극적인 공감을 전달하는 작품을 놓고 무엇이 더 우월 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이다. 그것은 각자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 일 수도 있다.
"우리 작품은 사실 우리 삶과 역사의 순간들, 단면들에서 나온 것들이다. 기억의 앨범, 가족 앨범, 또 다른 것들이 담긴 앨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와 쥘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작품을 통해 스투디움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수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시의성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 보다는 비록 대부분이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 기인한 것들이지만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일부의 관람객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전시를 보면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무리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작품은 관람객 각자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작가의 마음과 호흡을 같이 하며 이해와 위로를 주고 받는 식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문학 작품에서 '일상적인 것', 다시 말해 한 시대, 한 인물의 일상적인 삶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다. 등장 인물의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날씨 등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하찮은 것들'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혹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 늘 호기심을 가졌다. 이 '하찮고' '세부적인' 것들이야 말로 독자 혹은 관객의 머리 속에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피에르와 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매우 폭발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부담스러울 만큼 관람객을 똑바로 응시하는 나신의 인물들과 눈을 마주치기 민망할 정도이다. 하지만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과 더 가까워지고 모델의 아름다움과 영혼마저도 느끼며 교류하기를 기대한다. 만약 여러분이 처음 보는 모델들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고 무의식 중에 인물에 다양한 의문을 품게 된다면 작가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경, 소품, 의상, 색상 심지어는 메이크업 마저도 관람객이 인물을 이해하고 교류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러한 이유로 피에르와 쥘의 작품에서 '일상적인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사실 작가가 의도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을 놓쳤다고 봐야 한다.
피에르와 쥘은 세상이나 현상을 작가 본인들 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며 재해석한다. 현실과 판타지, 사진과 회화, 여성과 남성을 별개의 것으로 규정짓거나 한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여 보다 폭 넓은 사고와 환상에 대한 예술적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관람객에게 제시하는 아름다운 작품 속에 동성애라는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어 소수자에 대한 세상의 차가운 편견과 차별에 맞서 자신들의 판타지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앞서 언급했던 피에르와 쥘의 죽음 반대편에 존재하는 사랑, 삶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목격하게 되는 지점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상대적 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만연하다. 하물며 이들이 처음 만났던 70년대 말의 편견과 차별, 핍박이 얼마나 심각 했을지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와 쥘의 작품세계는 이상적일 만큼 환상적이고 아름답지만 작가가 살아왔던 실제 세상은 작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며 아름다움만을 감탄 하기에는 작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아직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를 소개하고 작품을 설명하는 글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동시대 작가의 극히 일부분만을 읽고 전체를 해석하다가는 오역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다음 세대의 현장과 이론가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와 쥘이 처음 만나던 시기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한 유례없이 많은 작품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그런 이유로 소외 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에르와 쥘의 작품 세계에 대해 우리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소설적인 예술이란, 줄거리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은 담론의 한 양식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이나 사람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기록, 투자, 관심의 양식이다. 예술이 구조화 되고 거대화 되는 순간 그것은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예술과 삶은 나란 해야 한다. 명확한 논리나 기승전결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자주 되돌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말한 소설적인 예술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피에르와 쥘이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의 가치일 것이다. ■ 윤상훈
* 참고문헌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동문선, 1997
『밝은 방』, 롤랑 바르트, 동문선, 2006
『문제적 텍스트』, 그레이엄 앨런, 앨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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