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이피
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19명의성인남녀를싣고가는거미소녀(동물계, 절지동물문, 거미강, 거미목, 염낭거미과) Mixed Media, 63x63x17cm, 2017
이피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내속의나를다꺼내놓고춤추는오늘의나(동물계, 척삭동물문, 영장류목, 사람과, 사람속) Mixed Media, 17x17x23cm, 2018
이피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인간을임신하고에베레스트를넘는수리 (동물계, 척삭동물문, 조강, 매목, 수리과) Mixed Media on Black Mirror, 63x63x12cm, 2017
이피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 50x50x132cm, 건조오징어, 2010
이피
웅녀 The First Woman of Korea Mixed Media, 220x220x198cm, 2009
이피
나의 나방 Acrylic on Korean Paper, 200 x150cm, 2009
롯데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하면서도 때로는 당혹스럽고 기이한 상상의 세계를 담은 작품으로 주목 받는 이피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피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개인전 <눈, 코, 입을 찾아 떠난 사람>展(갤러리 바탕골, 1997)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아트링크에서의 <나의 서유기>展(2010)을 시작으로 <이피의 진기한 캐비닛>展(2012), <내 얼굴의 전세계>展(2014), <당신은 내 파이프와 구멍들을 사랑합니까?>展(2017), <피미니즘 프노시즘>展(2018), <여-불천위제례(女-不遷位祭禮)>展(2018) 등, 전시의 타이틀 만큼이나 문학적인 상상력과 환상이 가득 담긴 작품들을 통해 한 예술가가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를 어떻게 온 신체의 감각과 경험 등을 통해 인식,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해왔습니다.
“작품 행위를 하는 ‘나’는 내 작품 속에 얼마만큼,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는가. 나의 눈은 오직 밖을 향해서만 열려 있고, 나의 작품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가. 작가 자신은 작품으로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가. […] 작품 속에 들어간 작가 자신을 해명하라고 한다면 작가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단지 작가는 눈을 밖으로만 뜨고 세상의 문제를 질타하는 자인가. 거기서 제 존재의 알리바이를 구하는 자 인가 […] 나는 그 해답을 부분과 전체, 부분 속의 전체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나의 작품 하나는 내 몸처럼 한 덩어리의 전체이지만, 각 부분을 들여다보면 작은 부분들 각각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완결성과 풍성함을 지니고 있다. 내 작품은 하나의 작품이지만, 부분으로서는 몇 백 개의 작품들이다. […]”
매일 일기를 쓰듯 남기는 작은 드로잉에서부터 페인팅과 조각,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피의 작품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내가 생각한 상상들은 혈관 속을 흐르는 피처럼 그 이미지들이 흐른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순간 순간의 자기감응, 감각과 감정 등이 현실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상상의 서사가 펼쳐진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거미를 닮았으나 실제 거미라고 할 수 없는, 자연계의 여러 동식물의 부분들이 사람의 신체와 얽혀있는 듯한 이피의 작품은 나와 세계, 인간과 자연 및 우주, 믈질과 정신 등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만다라와 같은 세계를 표현합니다.
“나는 보이는 몸으로서의 하나의 전체로서의 장소이지만 내 몸에는 복잡다단한 시간과 사건, 인물, 관계, 사회구조가 새겨져 있다. 나는 그런 장소의 몸을 구축한다. 나는 하나의 몸이지만 내 몸에는 내가 아닌 수천의 몸이 기생한다. 그들은 나의 감정이 되고, 감각이 되고, 사유가 되었다. […]
내가 느끼고, 듣고, 본다는 것은 나의 몸에 타자들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들은 나에게 와서 하나의 감각이 되었지만 감각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들은 나처럼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였고, 지금도 개별적 주체이다. 그들은 물질성과 주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부딪힘으로 써, 나에게 옴으로써, 나에게 와서 느낌, 감정, 사유가 되었다. […]”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일상적 삶 가운데 맞닥뜨린 정치ㆍ사회ㆍ경제의 여러 현상들, 관계와 구조 등에 대한 감정과 기억들을 기이한 생물종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킨 작업들을 선보입니다. 가령 “바닥까지비참해진희망인”, “내속에사는나를다꺼내놓고춤추는오늘의 나”, “백개의다른시간을살아가느라울고싶은여자”, “지루한시간의감옥에서붓을갖게된오징어”(**제목에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가 없는 것은 작가의 의도임) 등의 제목을 갖고 있는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시리즈의 작품은 개인의 삶에서 늘 부딪히는 것들이 머리 속에서 개념화되기 전의 그 자체, 원형적 경험에 관한 서사입니다. 마치 수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해가고 그것이 후에 자연사적 창조의 흔적으로 기록되듯, 이피세 시리즈는 자신의 일상 속순간 순간의 감정의 변화와 비언어적 기억을 포함한 생의 총체적 경험을 자연사적 창조의 흔적에 비유한 작업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이 생물은 상상동물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경제의 모습으로 나의 삶의 현상에 닥쳐온 어떤 시간의 단면도이며 그것의 의인화(personification), 동물화(anthropomorphize) 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생물 대백과, 자연사 박물관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현생누대 신생계 이피세 대백과>라고 이름 붙인다. 일상적 시간의 진화의 고비 마다에서 살아남아 나의 감정이 되고 사유가 되며 언어가 된 형상을 조각 설치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시리즈로 이름 붙여지지 않았지만, 작가의 초창기 작업활동부터 자신의 몸에 각인된 시간과 사건들, 이 사회의 구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생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예전 작품들도 함께 전시됩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국내에서 가진 초기 개인전에서 소개된 작품들로 약 10여년만에 다시 선보이는 <나의 나방>(2009), <웅녀>(2009),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2010) 등은 이방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사회로부터 가해진 차별적 시선과 상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관련 작가노트 별첨)
이피 작가는 2010년 아트링크에서의 첫 국내개인전의 제목을 <나의 서유기>로 명명하며, “일상의 단면, 그 한 순간을 정지시켜 공예품을 만든 듯한 이즈음의 미술 작품들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나는 긴긴 시간을 실패처럼 둘둘 감아서 들고 가고 싶다. 나는 작품에 깃들인 시간을 자르지 않고 뭉치고 싶다. 나는 온갖 생필품들을 가득 짊어지고 이 동네 저 동네를 기웃거리는 보부상처럼 작품 하나마다 나의 서사를 탑재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피 작가는 여전히 그 표현과 모습만 달리했을 뿐 자신이 이 세상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교감한 생생한 반응을 그 어느 것도 편집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내고 있으며, 이를 거의 일기처럼 하는 드로잉과 글, 긴 시간의 손의 노동을 통해 훈련해옴으로써 한국현대미술의 어떤 흐름과 유행에도 포괄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구도의 회화, 조각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가노트 1.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자연사 박물관 프로젝트』 (2019)
나는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자연사 박물관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나는 미술적 생물들의 박물관을 구상한다. 미술관 벽 전면에 가득 붙거나 전시된, 내가 발명한 생물들의 자연사 박물관을 상상한다.
내 조각 작업은 일종의 ‘변신(metamorphosis)’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심해 생물에 관하여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데, 이 지식은 단순히 지식에 머물지 않고 나의 손을 타고 ’세상에 없는 생물종‘을 탄생시키는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내가 품은 오늘의 정치사회적 분노‘를 가시화, 입체화한다면 그것은 어떤 생물종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곤충 얼굴에 대통령의 머리 모양을 가진, 다리 12개인 심해생물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슐라르에 의하면 상상력의 최초 기능은 짐승의 모습을 띠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나’라는 한 작가의 폐쇄된 마음에서 탈출하여 지금 막 대기권으로 여행을 시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방랑자, 어떤 생물의 모습일 것이다. 이 생물은 상상동물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경제의 모습으로 나의 삶의 현상에 닥쳐온 어떤 시간의 단면도이며 그것의 의인화(personification), 동물화(anthropomorphize) 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생물 대백과, 자연사 박물관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현생누대 신생계 이피세 대백과>라고 이름 붙인다. 일상적 시간의 진화의 고비마다에서 살아남아 나의 감정이 되고 사유가 되며 언어가 된 형상을 조각 설치한다.
조각 설치 작품에서 내가 쓰는 재료, 형상은 모두 내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여성적 노동 행위로 가능한 소산이다. 마치 여성들이 가사 노동으로 음식을 만들 듯, 제품을 만들 듯 나는 내 조각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내 감각, 내 스토리, 내 방문 기록들은 내 손의 노동에 의해 다양한 생물종으로 다시 탄생된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생물들이 내 손을 타고 탄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면 ‘고백한날의침샘에사는물고기’, ‘도널드트럼프의혀는억만개’, ‘지루한시간의감옥에서인두(人頭)를갇게된오징어’와 같은 다양한 종들이 형상을 기다린다. 나는 앞으로도 <현생누대 신생계 이피세>의 다양한 종들을 조각해 나가도록 하겠다. 어쩌면 그것은 나, 이피의 미술생물학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나는 그 다양한 생물종들을 자연사박물관에서처럼 미술관에서 전시되도록 하고 싶다.
작가노트 2. “이피세(LeeFicene)에 관하여”『이피의 진기한 캐비닛』(2012) 중에서 부분발췌
나는 매일 일기를 쓰듯, 그렸다. 하루 일을 끝내고 잠들려고 하면 잠과 현실 사이 입면기 환각 작용이 살포시 상영되듯이 나에겐 어떤 '변용'의 시간이 도래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각이면 구체적 몸짓과 감각, 언어로 경험한 하루라는 '시간'이 물질성을 입거나 형상화되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시간의 변용체인 어떤 형체를 재빨리 스케치해두고 잠들었다. 그것은 대개 하루 동안 나를 엄습했던 감정의 내용들인 좌절이나 불안, 분노, 공포의 기록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내 일기가 점점 쌓여 갈수록, 나는 폴 크뤼첸(Paul Crutzen)이 말한 대로 우리의 지구가 신생대 제4기 충적세(Holocene) 이후 자연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인류세(Anthopocene)를 지난다고 주장한 견해를 나의 '일기적 형상'들로 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형상들은 가시적인 것들과 비가시적인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 에어리언들 같았다. 나는 그 형상들에 이름을 붙여 주면서 나 또한 '이피세(LeeFicene)’라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라는 괴물이 탄생하고 성장한 이후, 나는 지금 내 속에서 '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나의 캄브리아기를 지나가고 있다. 요즈음의 나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재미, 무수한 나와, 나와 나 사이의 형상들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있다. 나는 나를 억압하고, 공포에 짓눌리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이 나를 차별하는 시선들, 질시하는 제도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편견에 찬 문화적 토양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차츰 나는 그 낯선(Unheimlich) 것들이 어떤 패러독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낯설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낯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낯설다고 느낌으로써 그것을 멀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에게 그런 낯선 것이 본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것들의 정체를 홀로 앉은 밤에 대면했다. 그것들은 일기 속에서 어떤 곤충이나 동물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들과 비슷했는데 나는 그것을 나와 섞인 나의 외부, 혹은 나와 낯선 타자의 혼합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무릇 작가는 언어로 명명되지 않는 언어와 언어 사이, 형상과 형상 사이를 비추어 보는 존재, 그 사이에 숨어서 떨고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보는 존재가 아닌가 라고 생각해왔는데, 가끔 그 존재를 대면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작가노트 3.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에 관해『나의 서유기』(2010) 중에서 부분발췌
나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시위 현장에 가보았다. 그때 나에게 강렬하게 새겨진 감각은 촛불들보다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시각에 사람들이 길거리 한가운데서 휴대용 가스기기에 구워 먹는 오징어 타는 냄새였다. 말린 오징어는 서양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 재료다. 특히 구운 오징어 냄새는 시체 타는 냄새가 난다고 혐오한다. 『해저 2만리』에서 오징어는 처단해야 할 괴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의 경계는 감각의 경계라 할 수 있다. 오징어 냄새는 서양의 타자이며 Abjection이지만, 서울은 그 냄새로 서양의 이방인이었던 나를 환대했다. 오징어가 서울 사람들의 질긴 시간 근육처럼 느껴졌고, 곧 발진하는 우주선처럼 활기차게 느껴졌다.
나는 우주선과 근육, 그 둘을 다 가진 존재를 구상했다. 오징어는 심해에서 스스로 발광할 줄 아는 별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오징어는 오징어잡이 배에 매달린 집어등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심해라는 자신의 존재 기반을 잃고, 혐오 식품이자 기호 식품이 되었다.
오징어가 나에게 말했다. “내 몸의 발광세포가 심장 소리에 맞춰 두근두근 빛난다. 공중에서 거대한 빛 덩어리들이 쏟아진다. 나는 곧 구원받을 거야. 답답하고 무서운 차가운 어둠으로부터 해방될 거야. 나는 내 몸 속에 잔재하는 칠흑 같은 어둠을 모조리 뱉어버릴 거야. 순간 날카로운 꼬챙이가 나를 꿰뚫어. 아파. 쓰라림이 나를 빛 속으로 인도해. 승천하는 것에서는 냄새가 나.”
작가노트 4. “웅녀”에 관해 『나의 서유기』(2010) 중에서 부분발췌
나는 한국에서 최초로 신화 속에 등장한 여자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우리나라 건국신화 속의 암컷이었다. 그녀는 고행을 통해 곰에서 여자가 되었지만, 아들을 낳고 나서 신화 속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처럼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몸, 곰의 형상에서 인간인 한 여자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작업했다. 그녀의 몸에서 피의 분수가 솟구치고 빛이 쏟아지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식물, 동물, 바다 생물 등등이 새겨진 피부는 그녀의 밖에 걸려 있게 했다. 피부와 분수 그녀 사이에 그녀의 존재가 있게 했다. 나는 관람자의 오감을 자극하고 싶었다. 빛과 소리와 순환하는 붉은 물, 분수의 모습으로.
작가노트 5. “나의 나방”에 관해『나의 서유기』(2010) 중에서 부분발췌
나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늘 이상 한 괴리 현상 속에 있었다. 나는 바다처럼 광대한 미시건 호수나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처에서 밤마다 가위에 눌렸고, 생리통에 시달렸다. 서울에서 온 한약을 먹으면 그 증세가 약해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파도처럼 아픔이 밀려왔다. 현관문 아래 거대한 가로수에는 까마귀들이 수십 마리씩 떼지어 앉아 시끄럽게 내 미래의 죽음을 울어 주었다. 나는 마치 거울 속에 사는 여자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낮에 스튜디오에서 친구들과 작업에 열중할 때는 잊었지만, 거울 속에선 외국인이라는 명찰을 단 조그만 아시아 여자가 나타났다. 보는 것으로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보는 서양, 그래서 동일시되어 버린 서양과 내 피부와 몸의 형상이 보여주는 이방이 충돌했다. […]
나는 눈을 감고 검은 거울 밖으로 멀리 가곤 했다. 나는 제일 먼저 그 먼 곳의 나를 불러오는 여신의 제단을 만들었다. 외로운 밤에 내가 만든 여신의 가슴에 달린 삼각뿔들이 먼 곳의 나를 향해 부우웅 소리를 내었다. […] 나는 내 일기장을 말아 온 몸을 장식한 ‘나방’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피부 껍질을 벗기기만 하면 보일 것 같은 나의 오만한 Self였으며, 피부 안쪽 세계의 오만한 주인이었다. […]
- 이피, 『나의 서유기』(2010)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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