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득
문득–공간을 그리다 2019 혼합기법 가변크기
김호득
흐름 Flow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82x115cm
김호득
폭포 Waterfall 2019,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15x82cm
김호득
흐름 Flow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17x168cm
김호득
계곡 Valley 2017,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17x251cm
김호득
흐름 Flow 2019,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251x117cm
김호득
흐름 Flow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59x248cm
김호득
흐름 Flow 2017,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59x248cm
김호득
산-아득 Mountain-Faraway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248x318cm
김호득
급류 Rapids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160x415cm
김호득
사이 Between 2018, 광목에 먹, Ink on cotton fabric, 91x117cm
김호득
틈-사이 Gap-Between 2019, 혼합기법 Mixed media, 가변크기 Dimensions variable
『아트인컬처』 2008년 7월호 수록
‘문득', 일필휘지로 돌아오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학교 교수)
김호득의 개인전을 앞두고, 머릿속에 새삼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2005년 미국에서 김호득을 우연히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 김호득은 안식년을 맞아 일 년간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김호득의 얼굴과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방인의 낯선 객지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기운생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가 김호득을 지켜본 것이 20년은 훨씬 넘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활기를 띤 김호득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히피처럼 길게 기른 머리도 잘 어울렸고, 연신 히죽히죽 웃었으며 말수도 아주 많았다. (그가 그렇게도 수다스런 구석이 있는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서로 작업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눈 적은 없지만, 그는 현대미술의 심장부 뉴욕에서 동시대 작가들의 조형어법을 두루 꿰뚫고 최첨단 양식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김호득은 이미 한국에서 수묵 설치작업을 발표한 터였다. 나는 김호득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과연 어떤 작품을 들고 미술계에 나타날지 사뭇 궁금했고, 또한 다가올 그 시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96년 도쿄에서도 김호득을 만난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김호득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 있어 뉴욕에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게 아닌가 싶다. 이젠 오래전 일이 되었다. 일본 국립근대미술관에서 《90년대 한국미술로부터-등신대의 이야기》(9. 25~11. 17)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해방 이후 일본의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최초의 한국 현대미술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전시에는 30, 40대 중심의 작가 14명이 참가했는데, 한국화 장르에는 김호득 한 사람뿐이었다. 이 전시의 개막식에서 김호득을 만났다. (나는 당시 국제교류기금The Japan Foundation 펠로우로 도쿄에서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던 차였다.) 그날의 기억이 아주 또렷하다. 김호득은 병색이 완연했다. 병원 침실에 누워 쉬어야 할 병자처럼 쇠약한 형색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즉, 그렇게 좋아하던 술 때문에 결국 알콜 중독증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단주(斷酒) 이후였지만 아직도 술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김호득의 말과 손은 떨리고 있었다.
도쿄와 뉴욕에서 김호득과의 만남. 그 명암이 극단으로 교차했다. 이제 와서 보면, 바로 그 극단의 시간대는 화가 김호득의 삶과 예술에 획을 긋는 큰 전환점이었다. 사정은 이러하다. 김호득은 1996년의 단주 이후, 1997년 학고재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작품 양식의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정헌이는 그 변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문득, 흔들리다」, 일민미술관 개인전 서문, 2002). “그 이전까지 폭포나 계곡같이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렸던 김호득은 그 이후에는 바람, 빛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혹은 아예 외부로부터 눈을 돌려 마음의 결을 드러내는 ‘문득, 흔들림’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로 변신했다. 폭포나 계곡 그림이 일필휘지의 필치로 즉흥적인 붓의 운필의 생생한 자취를 드러냄으로써 기운생동하는 에너지를 전해 준다면, 그 이후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점찍기를 바탕으로 한 연속적인 첨가, 보충, 반복의 제스처로 화폭을 ‘짜 나가는’ 작업이다. 일종의 ‘치기(때리기, 찌르기, 깎기, 베기)’에서 ‘짜기’로의 변화이다.” 김호득의 점찍기 작업은 200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2005년 미국 체류 이후의 작품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그 대답을 들려주는 자리가 이번 학고재 개인전이다.
점찍기 작업, 내면으로의 침잠
_____이번 전시 작품을 미리 보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김호득이 점찍기 작업을 종결하고 새로운 작품 방향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논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전시 작업을 이야기하자면 작품 변화 이전의 점찍기 작업을 빼놓을 수 없다. 점찍기 작업은 김호득의 삶과 작품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점찍기 작업을 두고 김호득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새 천년을 맞아 art가 기획한 기사 〈BEYOND 2000 NEW VISION〉에서 김호득은 점찍기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언젠가 아프고 난 후, 화실 뒷산에 올라 흐르는 땀을 식히며 언덕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약수터 물 떨어지는 소리며 언덕 너머 두런두런 사람들 인사 주고받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너무 고요한 오후였다. 늦은 봄, 치열하게 올라온 연초록의 무성한 나뭇잎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쪽에서 한 무리의 잎들이 살짝 흔들리다 마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쪽 가까운 잎들도 미세하게 하늘거리는 게 아닌가. 피부로 느낄 수조차 없는, 볼 수만 있는 조그만 바람이었다. 순간 하늘과 주위를 둘러봤다. 아! 그 아득한 공기의 두께여. 그리고 갑자기 느껴지는 오만 잎들의 그 은밀한 흔들림이여. 억만 생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여.”
김호득 점찍기 작업은 내가 나를 읽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냥 마음의 흔들림에 따라 짧은 선들을 화면 가득히 채워나갔다. 끊임없는 내면으로의 침잠 과정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정말 도(道) 닦는 기분이었다. 한 점 한 점이 마음속에 일렁이는 의식의 흐름을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술을 끊고 나니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아주 강렬하게 찾아왔다. 예를 들어 시간이란 것도 ‘순간 에너지’와 ‘늘인 에너지’가 결국은 그 속성이 동일하다는 생각, 요컨대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을 그림에도 적용해 봤다. 일획이란 무엇인가. 에너지가 한순간에 몰아쳐 나온 것 아닌가. 그런데 아주 사소한 작은 점에서 출발하더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일획이란 큰 덩어리가 될 수 있다. 또한 영원이 곧 찰나이며, 우주가 곧 들풀과 다름없다는 생각, 그걸 작품으로 실천해 보고 싶었다. 작품 제목을 〈문득〉이라 지었는데, ‘문득’이란 것이 순간이지만 사실은 쌓인 시간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 이게 그림이건 사람이건 다 통했다. 점찍기 작업은 뭔가 아득한 느낌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한 점 한 점의 미세한 변화, 그것은 찰나이지만 그 찰나로 영원을 그리려 했다. 상념이 스쳐지나가는 그 느낌마저 화면에 투영해 보고 싶었다. 작은 점을 연속적으로 찍으면서 이동할 때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고 결국 현재는 끝없이 변화한다. 점이 하나씩 만들어지면 반대로 공간은 조금씩 지워진다. 화면에는 작용과 반작용, 우연과 필연, 유와 무의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겹친다. 선이기도 하고 점이기도 하고 형상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꽉 찬 것 같기도 하고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림 제목을 〈그냥 흔들리다 문득〉이라고 지어보기도 하고.
_____물론 점찍기 작업에는 여백이라든가 음양, 흔적 때로는 도가사상 등 동양적인 사고 체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의 결과만 놓고 보면 상당히 미니멀적인 추상으로 드러난다. 서양식으로 따지자면, 형식주의 미술이 극단으로 갈 데까지 간 작품과 유사하다. 더구나 “그림을 그리지 않고 ‘한다’”고 했을 때, ‘한다’는 것은 그리는 행위 혹은 그것과 더불어 ‘사고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점찍기 작업은 매우 관념적인 조형 요소의 미묘한 맛과 철학적 사색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김호득 내 작품은 서구의 미니멀 추상과 다르다. 작업 과정, 시간성이 아주 중요하다. 점은 순간적인 마음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공간 안에서 헤엄을 친다고 해야 할까. 점들이 화면에서 수없이 증식해 나가는데, 그 증식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룰이 있다. 찾아갈 길과 피해 가야 할 길, 그 길을 가다 보면 빈자리가 생긴다. 규칙적인 점에도 변화가 많다. 아주 은밀한 변화다. 의도적으로 그린 것과 자연스럽게 그린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차이를 한눈에 봐도 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을 의도하는 순간 화면은 아주 부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이게 더 어렵다. 도를 닦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섞어서 작업을 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점찍는 일 하나만으로도 조형적인 변주가 무궁무진하다. 단순한 방정식에서 아주 복잡한 방정식에 이르기까지 너무너무 재미있다. 나는 점찍기 작업을 기(氣)의 집합, 기의 덩어리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기의 운용’을 새롭게 시도해 본 것이다. 점찍기를 일종의 ‘수신의 도구’로 삼았다고 해도 좋다.
_____먹점의 반복적인 배열로 채운 흑백의 평면은 모노크롬 회화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내용은 크게 다르다. 모노크롬이나 미니멀아트가 본질로 환원하는 동어반복적인 균질의 화면을 지향한다면, 김호득의 작품은 순간의 흔들림, 마음의 결이 만드는 미세한 파장이 일렁인다. 붓질을 일정한 단위로 반복시킴으로써 시간을 공간화한다.
김호득 사람들은 작품의 형식적 결과만 놓고 평가하려 든다. 형식적으로 올 오버 페인팅이라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작업을 정지된 무(無)의 상태로만 평가한다. 기가 정지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거 뭐 하는 짓이냐?”, “혼자 자위행위 하냐?”며 그림이 너무 어렵다고들 불만이었다. 꼭 이런 비판을 의식한 건 아니지만, 점찍기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지겹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는 느낌도 들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그림은 흩트리거나 파괴해야 새로운 것이 나오는 법이다. 일단 어지르다 보면 다시 모아져서 하나의 방향을 찾게 될 것이다.
다시, 기운생동하는 일필휘지로
_____다시 폭포와 계곡의 시대로 돌아왔다. 김호득은 내리누르고 찍듯이 뿌리고 던지듯이 그려나가는 자신의 화법을 부활시켰다. 서양의 그 어떤 추상표현주의 작가나 미니멀 작가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기운생동’하는 ‘일필휘지’의 붓끝에서 벼락 치듯 순식간에 태어났을 ‘피 튀기는’ 먹물 폭포의 기세 같은 것이 다시 살아났다. 화가 자신의 거친 호흡 그대로를 화면에 분출함으로써 치솟아 오르는 생명력의 에너지를 만끽하려는 듯 보이는 작품이다.
김호득 처음에는 큰 점찍기를 했다. 큰 점과 긴 선을 결합해 단순화된 풍경, 추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점과 점, 산과 돌 등 추상적인 형태에서 출발해 점점 더 들이나 평원 같은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_____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은 시리즈 별로 크게 〈글자〉 〈문득〉 〈급류〉 〈폭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에서 〈글자〉 〈문득〉 시리즈가 새로운 작품이다. 〈급류〉와 〈폭포〉 시리즈는 이전에도 다루었던 소재다. 〈글자〉 시리즈는 소재가 파격이다. 글자라는 인공적 요소도 재미있지만, 그 조형 형식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자나 한글을 조형화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이 대표적일 게다. 젊은 작가들 중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반복해 산수를 그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작품의 경우 글자의 시각적 구성과 디자인을 토대로 일정한 패턴을 만들거나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노리는 작품이 많다. 김호득의 경우, 글자가 풍경의 주요 구성 인자로 등장해 아주 숭고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작품을 내놓고 있다.
김호득 글자를 작품에 끌어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산수를 그렸는데, ‘산산산 나무나무나무 물물물’이라는 여러 크기의 글씨를 써서 산과 나무와 물을 채웠다. 일종의 의태어처럼 말이다. 아주 재밌었다. 그땐 여기(餘技)로 조금 하다 그만뒀는데, 이번에 이걸 발전시킨 것이다. 이번엔 한글의 자모를 아주 크게 써 봤는데, 속이 후련하더라.
_____글자를 반대 방향으로 썼다. 반전(反轉)이 된 모양새다. 그래서 그런지 글자 표정이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밑에 대지처럼 보이는 검은 면이 든든히 자리 잡고 있고, 배경은 은근한 기운이 감도는 발묵으로 표현했다. 글자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글자 ‘가’는 어디론가 급하게 막 내달리려는 느낌을 주고, 글자 ‘나’는 땅에 자리를 차지하고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으려는 느낌을 준다.
김호득 한글을 조형화해서 그 자체로 실존감이 드러나도록 하는 작업. 이거 재미있는 아이템이다.
시원의 풍경 속으로
_____〈문득〉 시리즈는 〈글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대지 위에 기념비적인 형상이 우뚝 서 있다. 〈문득-서다〉(2007), 〈문득-누워〉(2007) 같은 작품은 글자의 한 획이 대지 위에 눕거나 서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글자〉 시리즈가 좀 더 단순한 형태로 그려진 듯한 인상을 준다. 둥근 바위나 남근석 혹은 선돌이나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도 등장한다. 이 형상들은 모두가 대지 위에서 하늘로 우뚝 솟아오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주 기념비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런 주제의 작품은 문명 이전의 저 태고의 시간으로, 그 시원(始原)의 풍경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주헌은 이 풍경을 “거대한 바위에서 정령을 느끼던 태고적 조상들의 감수성”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누구라도 한눈에 그런 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호득 사실 땅을 딛고 서 있는 형상은 직립한 사람의 모습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형상이 엉뚱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인물 작품에서도 조금씩 보였다. 나는 체질적으로 너무 현실적으로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 설명적으로 표현하는 걸 싫어한다. 사람 얼굴을 그릴 때도 표정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암시적으로 표현하되 존재감이나 실존을 잘 드러내고 싶다.
_____최근작은 천지인(天地人)을 그린 것이다. 확실히 풍경이다. 마음의 풍경이 아니라 실재의 풍경이다. 〈문득〉 〈글자〉 시리즈는 거대한 평원 혹은 대지에 대한 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 시리즈에는 땅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지평선이 늘 존재하며, 땅과 하늘 사이에는 풍경이 들어 있다. 대지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기념비적 형상이 중심을 이룬다. 화면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는 먹점들은 작은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잡풀, 벌레나 곤충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저 멀리 우주의 별 같기도 한 작은 먹점들…. 무언가 아득한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다.
김호득 공간에 기(氣)가 통하는 느낌을 그리려 했다. 하늘을 흰 여백으로 두지 않고 공기가 통하는 기분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기가 통하는 느낌, 하늘이면서 하늘이 아니고 여백도 아닌, 기의 흐름을 그리고 싶었다. 거석(巨石)이든 사람이든 공간 해석을 달리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공기’를 그리고 있다.
_____새로 시도한 작품은 사의(寫意)와 사실(寫實)의 중간적 형태로서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작품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가 크다. 〈폭포〉와 〈급류〉 시리즈는 이전과 다른 점이 있는가?
김호득 사실 두 시리즈는 손을 푸는 작업이었다. 〈급류〉 시리즈는 폭우에 콸콸 흘러가는 황톳물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리게 된 작품이다. 이전에도 빨리 흐르는 계곡물을 그렸지만 이번 그림들은 그때의 그림과 다르다. 이전에 계곡을 그릴 때는 물이 주제였음에도 물을 직접 그리지 않고 돌과 주변을 재빠른 붓놀림으로 표현해 물이 느껴지도록 했다. 붓이 속도감 있게 내달리고 먹물이 튀면서 자연스레 물의 운동을 연상하도록 했다. 그런데 맑은 물이 아니라 황톳물에 영감을 받은 이번 그림에서는 물의 표정을 직접 그렸다. 중간 톤의 먹물로 물이 내달리고 튀는 모습을 그렸다. 결과적으로는 물에 색깔을 칠하는 것이지만, 물과 돌, 물살의 관계를 생각하며 물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표현하려 했다. 나는 ‘물의 기운’을 그린다. 지필묵, 아직도 할 일이 많다.
_____김호득의 재료 선택이나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병종이 탁월한 해설을 내놓은 바 있다(제1회 개인전, 관훈미술관 서문, 1986). 김병종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호득은 작업의 전 과정에 있어서까지도 타성적 태도와 규격화를 거부한다. 화선지 대신 화견(畵絹)도 아닌 올 굵고 투박한 광목을 즐겨 쓴달지 중봉(中鋒)이 없는 편필로서 골법적 묘사를 아예 포기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의 작업은 또한 철저히 일회적이어서 하도(下圖)와 본화(本畵)가 따로 없고 설명적 지엽말단의 세기(細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찌 되었건 간에 중요한 건, 김호득이 여전히 지필묵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호득 동양화를 전공했으니 지필묵을 고집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서울예고 시절부터 서양화, 동양화를 골고루 공부했다. 청년 시절에는 유화나 아크릴릭도 다뤄 봤지만, 지필묵에 맛을 들여보니 이게 내 체질에 딱 맞더라.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색채 감각보다 형태 감각이 더 뛰어나다. 일필휘지의 순발력을 즐긴다. 덧칠하고 다듬는 것보다는 순간적으로 그리는 게 내 체질에 잘 맞는다. 서양 그림으로 치자면 드로잉 같은 걸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필묵을 지키자는 약간의 오기나 의무감도 발동했을 수 있을 게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필묵을 내던지고 방향을 바꿔나가니까, 내가 인기 작가는 아니지만, ‘나만이라도’ 하는…. 하하! 따지고 보면 내가 지필묵을 다루는 건 정도(正道)가 아니다. 서양식과 동양식을 서로 얼버무렸다고나 할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현대 감각에 맞게 지필묵을 구사하려 했다. 전통 발묵이나 전통 모필 등 몇 가지는 아예 포기했다. 어떤 평론가는 내 작품을 두고 담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담묵은 너무 연약한 묵법이다. 그래서 담묵은 농담의 층을 겹겹이 쌓는 표현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자꾸 설명적으로 흐른다. 나는 필법은 군더더기를 다 빼고 묵법은 농묵만 사용한다. 결국 단순하지만 강렬한 묵법과 필법을 내 조형의 무기로 삼은 것이다. 물론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내 묵법과 필법은 임팩트는 강하지만 깊이는 약하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계산적으로 내 방식으로 몰아왔다. 사실 내가 전통을 지킨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양화 쪽으로 상당히 경도되었다고 본다. 앞으로도 먹을 포기할 지점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필묵만으로도 아직 할 게 많다. 농묵으로도 담묵 효과를 낼 수 있다. 또 붓의 속도, 공간의 점유 등 조형적인 숙제가 무궁무진하다.
“그저, 그림으로 승부하고 싶다.”
_____작품의 지표는?
김호득 나는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인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림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그림이고 그림이 곧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그냥 그림만 그리는 사람은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이를 오감, 육감까지 동원해서 표현하는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사는가? 이유는 없다. 예술가는 종합적으로 흡수하고 종합적으로 작품에 내뱉는다. 나는 구차한 설명보다 내 안에서 집약되어 나온 표현을 중시한다. 그래서 나는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손재주를 타고났다거나 하는 표피적 평가를 싫어한다. 앞으로도 그저 그림으로 승부하고 싶다.
김호득의 작가적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파격과 저항 정신’ 혹은 ‘부정과 도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사실 한국화를 설치미술이나 입체작품으로까지 극단으로 밀어붙인 작가는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김호득의 부정과 저항이 유독 우리 화단에서 미덕으로 남는다면, 그 이유는 그가 전통(혹은 한국)이 지니고 있는 정신의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수묵이란 무엇인가. 이 반복적인 질문을 김호득은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호득은 “서양과 동양을 포괄적으로 알고 작품을 하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나 역시 족탈불급(足脫不及). 오히려 김호득이 눌변으로 툭툭 던진 말들이 깊은 여운을 던진다.
“나는 그림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가슴속에 그릇이 하나 있다면 그 그릇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물이 가득 차면 찰랑찰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쏟아야 된다고, 차기도 전에 자주 비우면 가벼워지고, 다 찼는데도 비우지 않으면 썩는다고.”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쫀득쫀득한 찰떡같은 것….”
작가 노트
1
나는 지금 경기도 여주 어느 산자락의 작업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까지 약 한 달간 이번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들을 고르고 골라 대충 정리해 놓고,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나에게는 거저 부담스럽기만 한,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다.
그동안 개인전만 30여 회 하면서 아닌 적도 많았지만 소위 말하는 전시 서문이란 것을 의례적으로 실었었다. 이번에도 누구에게 서문을 부탁해야 하나 지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알만한 평론가는 한 번씩 청탁을 했었고, 젊은 평론가와는 도무지 친분이 없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분을 추천받기도 껄끄럽다는 점도 숨길 수 없었다. 생각만 하고 결정을 미루고 있었는데, 마냥 미룰 수만은 없어 몇몇 친우와 화랑 관계자와 나의 고충을 의논하던 차에 어느 날 내 담당 큐레이터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표님이 그동안 많은 평론가의 글을 받았으니 그중 마음에 드는 것 하나 골라 재수록하고 작가의 변을 직접 한번 써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셨다고.
새로운 평론가를 물색할 부담감이 없어진 것은 좋으나 나에게 글을 쓰라는 요구는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참 난감하다고 하니, 이제 연세도 드셨으니 진솔하게 한마디 하셔도 크게 부끄러울 일은 없을 거라고, 어쩌면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은근히 부추김 반 압박 반 권유를 한다. 결국 응낙을 하면서 과거 나에 대한 글 중 기억에 남은 글을 생각해 봤다. 그런데 개인전 서문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을 꼭 집어서 풀어냈던 김복기 교수의 글이 갑자기 생각나 바로 전화해 물어봤다. 즉각 대답이 왔는데 그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08년 『아트인컬처』 7월 호에 실린 나와의 인터뷰 형식의 글이었다. 확인해 보니 신기하게도 10년 전 학고재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실은 특집 기고였다. 학고재에서의 개인전은 이번까지 세 번을 하게 되는데, 대충 10년마다 한 번씩 하는 셈이다. 참, 그러고 보니 학고재와의 인연도 참 오래됐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김복기 선생이 내가 그 글을 마음에 들어 한 이유가 인터뷰 기사이어서 내 말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가 보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형식만 인터뷰 기사였지 평소 그가 생각해왔던 나에 대한 인상이나, 그전에 내가 한 말 등을 적당히 버무려 비교적 쉬운 글로 풀어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상에 남은 듯했다. 어쨌거나 다른 화랑에서의 서문을 다시 인용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좋겠다고 생각했고, 학고재에서도 흡족해했다. 1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 봐도 별 무리가 없다. 참! 한 작가의 이미지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가 작가 노트를 쓰게 된 연유를 너무 길게 썼다. 나에게는 익숙한 그림 그리기와는 다른 서툰 글쓰기를 굳이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밝힘과 더불어 내 글에서의 부족한 점을 김복기 선생의 글에서 보충하십사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2
평소에 친우나 후배들이 대학 졸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혼란한 시국에 각자 여러 사정으로 졸업이 늦었다는 말들을 경쟁적으로 할 때면, 나는 한참 있다가 쑥스럽게 한마디 했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대학원 졸업장 받을 때까지 16년 걸렸다고. 그리고 결코 자랑하는 게 아니라고. 아! 그 시절은 정말 악몽이었다고! 그래도 대학원 학생 신분으로 결혼까지 했으며, 졸업식 날 나는 죽어도 참석하기 싫었는데 어머님과 장모님이 석사모 쓴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해, 집사람과 큰 애까지 대동하고 그 멀고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던 관악 캠퍼스에 가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온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하는 이유는 대학 졸업 후 10여 년 동안 그야말로 방황의 세월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어느 한쪽에도 소속되거나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고 작업 방향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말 그 당시는 시국뿐 아니라 미술계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고 나 또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먹고 살기 바빴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겉보기는 그야말로 술주정뱅이 룸펜 그 자체였다.
그래도 이 시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 술독에 빠져 지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작업에의 열정과 끈기, 그리고 처음에는 대학원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던 내가 결국은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이때쯤 그래도 나는 이미 유망한 신진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앞으로의 나의 운명이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나는 대학교수 노릇을 할 자신이 없었고,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나 특히 내가 앞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후배들이 나보고 어디든 대학에 원서를 내보라고 성화를 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번 지원을 했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무조건 지원했다 몇 번의 낙방 후, 포기할 즈음 대구 영남대학교에서 무조건 오라는 연락이 왔다. 막상 오라니까 무척 고민이 되었다. 그즈음, 작업실도 시내 좋은 곳에서 점점 밀려나 변두리 시골 우사 비슷한 곳에서 열악하게 작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술로 인해 몸도 많이 피폐해 있었지만, 그래도 서울 미술계에서 겨우 자리를 잡아 작가 대접을 받아 가고 있던 시점이라,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면 서울 화단에서 멀어져 작가의 길이 막힐 것 같기도 하고, 과연 내가 교육자로서의 자격이 있을까 회의도 들었다.
집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진지하게 고민을 하였다. 정말로 과연 어떤 길이 옳은가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기를 한참 동안 했다. 결국은 도저히 내려갈 수 없다고 전화를 하고 말았다. 그때의 저간의 사정을 밝혀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인데 그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내가 오는 것을 전제로 모든 계획을 다 세워놨기 때문에 내가 안 가면 학교 안에서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전국 대학에서 정풍 바람이 불어 교수 채용에도 학생들이나 졸업생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오고, 우회적으로도 나에게 회유가 들어왔다. 결국은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내가 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뿌리치는가? 가자! 고향으로. (참고로 대구는 나의 고향이다. 사실 그 때문에 가길 꺼린 점도 있다.)
그 대신 나만의 약속을 굳게 하고 짐을 쌌다. 첫째, 1, 2개월에 한 번은 꼭 서울 나들이를 할 것. 둘째,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치를 것. 셋째, 대구에서의 작업실은 무조건 큰 평수를 얻을 것. 넷째, 작가 생활과 교육 행위를 철저히 50 대 50으로 힘을 배분할 것. 이 네 가지는 꼭 실현하거나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출발했으며, 다행히 교직 생활 내내 그래도 근접하게 지켜왔다고 자부한다.
옛날 고리짝 시절 이야기를 너무 시시콜콜 이렇게 밝히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의 전 생애에 일어난 일들이 이때의 모든 여건이나 나의 피나는 몸부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3
24년 동안의 대구에서의 교수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약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이곳 여주의 조용한 산자락 작업실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3년 차에 들어섰다. 처음 어디 출근이나, 학생들 교육에서 벗어나 오로지 작업만 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내가 필요할 때만 잠깐씩 서울 나가 볼일 보고 좋은 전시 순례를 하고 들어와 또 작업 삼매경에 빠지는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내가 꿈꾸던 작가의 천국이 여기구나 생각했다. 정말 이게 진정한 전업 작가의 생활이구나 하고 절실히 느꼈다! 그러면서 교수 생활한 것은 운명으로 치더라도, 조금 일찍 명예퇴직을 결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아! 5년만 일찍 학교를 떠났어도 작가로서의 삶이 질적으로 달라졌을 것만 같았다.
퇴직 후 서울 근교로 들어와 작업을 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혹은 그렇다고 착각했다. 첫째, 작가 활동이 확실히 더 활발해지고, 그 내용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사실 퇴직하고 나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는 교수 출신은 별로 없단다!) 둘째, 모든 사람들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우습지만 이제 교수가 아니라 온전히 작가로 대우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건 기분 좋은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작업실에 혼자 있으면서 순수한 작가로서의 승부 의욕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를 잊고 그저 작가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 되자고 자꾸자꾸 다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어려운 시절에 오라는 대구에 내려가지 않았으면 나는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 내려간 후 5년 만에 술과 담배를 끊었고 대학병원에서 항상 점검했다.) 그리고 대구 내려가기 전 어느 정도 작가로서의 바탕은 만들어 놓고 내려갔기 때문에 서울에서 무슨 좋은 전시가 있을 때마다 날 불러줘 나의 존재가 건재함을 지속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내려갈 때의 결심대로 몇 년마다 자천타천으로 개인전을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본다. 지난날을 후회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좋은 여건을 잘 활용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자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몇 년 늦은 것을 탓할 게 아니라 몇 년 더 살도록 노력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4
이번 학고재에서의 개인전이 성사된 것은 순전히 나의 희망에 의해서이다. 은퇴 전후 여러 가지 갈등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대구미술관에서의 대규모 전시에 대한 욕심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 구체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으니 대구 토박이 훌륭한 현대미술 작가들이 차례로 줄 서서 실행하는 것을 축하만 해주다가 나는 언감생심 기회를 잡지 못하고 결국 떠나게 되었다. 사실 성사가 되어도 이 나이에 회고전을 하기도 뭣하고 신작전을 하기에는 벅차다고 자위를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표표히 떠나왔다.
서울로 오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중요 전시에의 초대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중 파라다이스 재단에서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ZIP'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전시공간에서의 특별 초대 개인전은 정말로 의미 있고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전폭적 지원과 넉넉한 자금 후원도 인상 깊었다. 다시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평들도 나쁘지 않았다. 작년 봄에는 오래전 약속이 되어 있던 대구에서의 개인전도 치렀다. 웬만한 작가로서는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고 할 수 있고, 당분간 쉬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겠지만, 나로서는 서울 입성의 신고식을 정식으로 치르지 못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고심 끝에, 마지막 개인전 치른 지가 너무 오래돼 조금은 서먹하지만 그래도 오랜 끈끈한 의리가 남아있다고 생각해 온 학고재 사장님을 직접 만나 의사 타진을 했었다. 조금 뜸을 들이긴 했지만, 흔쾌히 응해주시면서 본관, 신관을 다 쓰란다. 어이쿠 장난이 아니겠는데 하며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사실 이곳 작업실로 오면서 전시회와는 관계없이 꾸준히 작업을 해와 작품의 양은 걱정 없는데 그래도 상업화랑에서의 전시라 전시 성격 잡기나 작품 선택 문제는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두 달 동안은 작품 제작과 전시 구상, 작품 선정 작업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지난가을에 영종도 파라다이스 시티 아트스페이스 개관전 대규모 설치작업이 호평받았던 것을 보시고 학고재에서도 규모는 작더라도 설치작을 하나 하라고 해서 그것도 고심 중이다. 지난가을의 설치작은 전폭적인 지원 하의 대규모 전시라 정말 임팩트가 강했었는데 여기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심히 염려된다.
5
이 글에서는 나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 생략 혹은 극히 조금만 하려고 작정하고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평론가분들이 나에 대해 규정한 단어들이 나를 한정 지어 온 것에 대해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변명을 한들 깨끗이 세탁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 생각은 이렇다고 새삼스럽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평론가분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것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나를 재발견 내지는 자각한 때가 정말 많았다. 그러나 가끔 나의 한 단면만 보시는구나 하고 느낄 때도 더러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나이가 되어 곰곰 생각하면서 내가 나를 억지로 규정해 보니, ‘경계인’ 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꼭 맞는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철학적이나 사회학적인 어려운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나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뜻으로서 말이다. 작품적으로만 아니라 나의 인생 경로로 봐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 나의 출생지가 불분명하다. 피난길에 영천 부근 어느 길가 오두막에서 태어났다는데 그 지명이 오리무중이다. 인민군과 국방군의 치열한 전투 현장의 경계 선상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전학 다녀 변변한 동창이 없다. 중학교는 대구의 최고 명문 경북중학교를 다녔으나 가정 형편상 3학년 때 서울의 이름 없는 삼류 학교로 전학해 졸업장만 받아 실질적인 동창이 없다. 내가 일부러 안 만들었다. 고등학교도 1차 낙방 후 2차로 서울예고를 다녔는데 3년 동안 세 가지 전공을 오락가락했다. 결국 서양화 전공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들어갔지만, 서양화와 동양화 사이에서 고민하다 3학년 때 동양화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졸업 후 기존 동양화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행세하며 한참 동안 헤매고 다녔다. 어린 시절이나 출신 학교에 대한 나의 정체성이 정말 뚜렷하지 않다. 그건 나로서는 정말 아쉬움이고 더 나아가 불행이다!
그 후 작가로서의 위치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선상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엄밀하게 말해 어느 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싫다. 그냥 현재를 살고 있는, 현재의 미술을 충실히 하는 작가로 불리고 싶다. 그리고 ‘경계인’이란 자각을 좋은 쪽으로 승화시켜 왔다고 자위하며, 앞으로도 그러한 입장을 굳건히 견지하려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대립되는 두 가지 요소가 어떤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공존하지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태,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음과 양, 시간과 공간, 찰나와 영원 사이의 미묘한 경계의 교차점을 그리고 싶다.
설치작품도 사실 입체라기에는 질량감이 없고 평면이라고 하기에는 그 확장성이 크고, 그만큼의 공간성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텅 빈 느낌이며,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면서도 미묘하게 흐르는 시간을 심상으로 느낄 수 있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지점의 설치작품을 추구한다. 평면의 먹그림에서도 그러한 지점을 확보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
2019년 1월 말경 어느 날 김호득이 그냥 막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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