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킴: 보이스 오브 하모니 Voice of Harmony
2019.05.23 ▶ 2019.10.13
2019.05.23 ▶ 2019.10.13
씨킴
I am dream.. 2019, neon on canvas, 250x200cm
씨킴
Untitled 2018, acrylic and mixed media on carpet, 220x441cm (detail) (1)
씨킴
Untitled 2018, coffee on paper, 300x150cm
씨킴
Untitled 2019, acrylic and glue on canvas, 200x250cm
씨킴
Untitled 2019, paint on paper, 300x220cm_2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는 2019년 5월 23일(목)부터 10월 13일(일)까지 씨 킴(CI KIM)의 열 번째 개인전 《Voice of Harmony》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조각, 설치, 드로잉, 사진, 비디오, 레디메이드 오브제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품 100여 점을 총 망라하여 선보인다.
씨 킴의 이야기는 아침식사로 먹은 달걀이 들어있던 용기나 하얀 플라스틱 숟가락, 먹다 남은 식은 커피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언젠가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 적 있다.
나는 우연히 나에게 다가온 사물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챙긴다.
작업의 끝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완성되었다가도, 또 다른 오브제들이 첨가되고 삭제된다.
나는 무인도에서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작품은 일상적인 소재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그의 오랜 관심사는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재료들이 자신의 손길을 거쳐 하나의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는 데 있다. 그리고 화면 안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작가의 특성상,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오픈 엔딩을 전제로 한다. 지난 20년 동안 작가는 이질적인 재료들의 조합을 끝없이 실험하고 탐구해 왔다. 그는 쉽게 혼합될 수 없어 보이는 물성들, 예컨대 토마토, 블루베리, 철가루, 나무, 시멘트, 브론즈, 일회용 플라스틱 용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쓰레기, 잡지, 네온 등이 서로 중첩, 충돌, 상쇄되며 일으키는 긴장감과 에너지, 그리고 자연스러움에 주목한다. 씨 킴은 종종 이러한 자신의 예술 행위를 셰프가 여러 가지 식재료를 혼합하여 맛있는 요리를 완성하거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서로 다른 악기의 소리를 조율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데 비유한다. 그의 작업은 색, 선, 형태, 질감 등 시각적 음표들이 자신의 지휘체계에 따라 한데 어우러져 나타나는 조화로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음과 질서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올해로 열 번째를 맞는 씨 킴의 개인전에서는 커피를 물감처럼 사용하여 제작한 회화 연작들을 포함하여, 목공용 본드를 미디엄으로 이용한 글루(Glue) 작업, 도끼로 찍어낸 자국이 가득한 알루미늄 패널 등 추상적인 표면을 갖는 회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또한 작업실 바닥으로 사용하여 세월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는 카펫 위에 수백 개의 일상 용품을 붙여 제작한 6m 길이의 대형 작품과 같이 신작들도 선보인다.
4층에 전시되는 마네킹 연작들도 씨 킴의 작업 세계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단순한 형상 조각이 아닌 자소상(自塑像)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씨 킴의 이전 작품들을 추적해보면 무수한 셀프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작업 초기인 200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진과 퍼포먼스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이후 얼굴의 형상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뿔테 안경’으로 대체되어 안경을 쓴 사물(빈 박스, 스티로폼, 냉장고 등의 사각형 오브제)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왔으며, 최근작에서는 버려진 마네킹에 질척한 시멘트로 피부를 입히고 가발과 가면을 씌운 모습이나 그 형상을 다시 브론즈로 캐스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씨 킴의 셀프 연작이 표현 방식을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또 다양하게 변화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씨 킴은 상당히 여러 개의 자아를 보유하고 있는데, 때때로 그는 각각의 자아를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로이 꺼내어 쓰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컴퓨터 게임 ‘언더테일(Undertale)’에서 플레이어가 보유한 영혼의 색이 바뀌면 그 색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빨간색 영혼으로 전투에 임하면 '의지'의 능력이 발휘되고, 보라색 영혼을 사용하면 ‘인내’의 능력을 발휘해 끈기 있게 버텨낸다는 식이다. 이 게임에서 ‘희망’의 영혼의 색은 일곱 가지 무지개 색으로 자유자재로 변하는데,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수많은 사업을 벌이며 작품을 수집하고 돌아서서 작업을 하는 씨 킴의 영혼의 색은 무지개 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유년시절 보았던 무지개의 영롱한 빛깔을 오래도록 되뇌며 그 변화무쌍함과 조화로움의 영역에 다다르고자 했으니.
유년 시절, 비 온 뒤 남산에 떠오른 무지개의 영롱하고 조화로운 색에 받은 감동을 오랫동안 작품으로 표현해온 노장 씨 킴의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음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아라리오갤러리
하늘을 나는 새, 영토를 버리다
- Voice of Harmony 전에 부쳐 -
CI KIM의 열 번째 개인전은, 오브제와 사진 베이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다양한 재료를 도입한 추상회화 작품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 타이틀의 ‘Harmony’는 단일한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함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여러 가지의 조합 혹은 하나 안의 여러 가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다변성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커피 농축액이 만드는 자율적 형상, 목공용 본드에 안료를 섞은 재료를 반복적으로 바르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조화의 힘이다. 작업을 위한 바닥으로 쓰였던 카펫, 반복적인 작업이 버리듯이 남겨준 시간의 축적과 오브제의 대화도 흥미롭다.
나는 CI KIM의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적 시선을 삼가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앞선 작가들의 추상회화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다시 꺼내어 살펴보고 그의 다양한 도전의 실체가 어디에 근거하는지 그 방향과 의의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화면 위에 펼치는 행위, 동작으로 그림 만들기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현대 순수추상회화의 선구자라 불리는 위대한 작가이다. 그의 창작 원리는 음악의 소리 요소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회화로 표출해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가 팔레트 위에 피아노 건반처럼 놓인 물감들을 붓으로 찍어내어 화폭 위에 공이처럼 현란하게 동작하며 만들어내는 장면, 시간과 길이로 펼쳐지는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작의 기록, 이전에 없었던 순수한 추상회화가 세상에 탄생하는 순간인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러한 순수 추상회화에 동참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선봉자 역할이 되었고,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여 또 다른 관점이 부가된 여러 형식의 추상회화로 확산되어 가는데 많은 기여가 되었던 것이다.
잭슨 폴록은 1948년 이후, 이전까지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을 모티브로 하던 작업을 떠나, 화폭을 바닥에 눕혀놓고 서서 물감을 흘리고 뿌리는 ‘드리핑 페인팅 기법’을 선보이며, ‘액션페인팅’의 영토를 만들었다. 폴록의 추상회화에서 물감을 뿌리는 동작과 이러한 행위가 주는 의미가 만들어 놓은 그의 영토에 가면, 그동안 인류가 쌓아 놓았던 다른 가치는 잠시 밀어 놓고 그가 정한 가치에 따라 작품을 바라보고, 그 위대함을 감지하여야 한다.
앤디 워홀은 1978년 팝아트라 불리는 이전에 제작한 작품들과 상이한 영역의 작품을 시도하였다. 화폭에 아크릴로 그리고 마르기 이전에 자신의 오줌을 발라 안료를 산화시켜 만드는 ‘산화’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이어서 다른 사람의 오줌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된 산화 회화(Oxidation Painting)는 화면을 만드는 원리에 전형적 물감만이 아니라 새로운 재료와 화학작용 등 무작위적 변화의 수용이 중요한 추상회화를 보여주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섬과 같은 영토에 가면, 회화를 위해 전통적 물감만이 아니라,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한편 전통적 회화 재료를 떠나지 않고 ‘그리기’에 몰두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60년대 이후 이어오던 포토리얼리즘 범주의 작업이 주를 이루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이와 동시에 전혀 다른 태도인 추상회화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추상회화는 그가 스스로 말한바 대로 ‘숭고미학’의 기준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추상을 구상적 모형과 분리하지 않는다. 무엇을 형용하는지 미지에 들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추상은 현실에 있고, 무엇인가를 가시화하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리히터의 ‘추상회화 연작’은 화면 위에 여러 색채를 담은 유화물감을 바르고 대형 스퀴즈로 이리밀고 저리밀고하며 만들어내는 평면인 것이다. 이 연작은 시간의 중첩과 물감의 물질적 특성을 통한 회화성의 회복이며, 현란한 환영을 일으키는 물감의 으깨짐을 두 눈으로 명확히 목도하게 만드는 현실 속의 장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장면의 긴장감이라는 미학적 관심과 함께 거침없이 변화하는 그의 회화에 대한 철학은 현대 미술계에 긍정적 사례로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6년 자신의 노트에 적었다는 글을 보면,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라고 선언하며 자신만의 배타적 고유영토를 주장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그림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여 드러내는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단지 그는 그림을 통하여 끊임없이 시도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모습을 새에 비유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스스로 개척한 한 자리의 영토에 앉아 영위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 자유로운 비상을 선택하여 어디에든 그가 날아가는 곳이 그의 것이 되는 ‘제작 중심의 창작세계’를 선택한 새인지도 모른다. 그가 멈추지 않고 날갯짓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그가 허공에 만드는 그의 거대한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가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다양한 표현 양식을 넘나드는 작가라는 점에서 카멜레온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는데, 나는 그가 변화하는 것에 주목하기보다 그가 동시적으로 품고 있는 욕망들에 충실하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예술에서 가장 숭고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 노력은 자기 고유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의 영토를 구획 짖는 경계를 그어서 영토를 확보해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굴레를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예술계에서는 영토가 없는 작가는 떠돌이이며 실향민과 같이 목표를 이루지 못한 미완의 작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관점이 정당한 것일까? 리히터를 보며, 그토록 오랫동안 떠도는 것은 한자리에 정주하는 것보다 눈길이 가는대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 개방되어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선택한 ‘영토 포기’가 ‘구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본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하려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 영토는 새장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토를 지키려거든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날려거든 영토를 버려라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잠시 머무는듯하더니 이내 날개 짓과 함께 허공으로 떠나가 버린다. 그 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로 갈지 새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 새는 자신이 내려앉는 어느 곳을 향해 떠나간다. 그가 내려앉는 곳이 그의 현재 영토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영토를 향해 자유로운 날개 짓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새는 자신만의 영토를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새를 말하며 나는 두 가지 다르면서도 유사한 새가 떠오른다.
하나는 장자의 새인 ‘붕’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어느 갈매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자가 유일하게 직접 적은 글이라 알려진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붕(鵬), 즉 북해의 가장 작은 물고기 곤(鯤)에서 인간의 엄청난 가능성을 실현한 존재로 비유되는 거대한 새인 붕(鵬)으로 변한 존재. 즉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자 의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것이 실현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은 의미가 없다. 모든 예술가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갈망하는 존재의 표상이라고 봐도 될 만큼 위대한 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새가 있다.
1970년에 발표되어 감동을 안겨준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등장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Jonathan Livingston Seagull)이다.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실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갈매기의 일생을 통하여, 초월적 능력을 갈망하고 인간 삶의 본질을 상징되는 새이다.
붕과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공통분모는 크고, 넓고 초월적으로 이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욕망이며 동시에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얻고자하는 자유이자 초월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새는 이러한 표상과 대단히 닮아있으나 동시에 벗어나야하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이상을 향한 노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자유’에 대한 것을 포함하는 것이며, 장자의 붕처럼 절대적이고 위대한 성취를 믿고 매달리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기에 땅에 정착하여 안주하는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며, 영토를 확보하기보다 끝없는 날갯짓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곳이 곧 자기의 자리가 되는 생태본능에서 더욱 왕성한 생의 에너지를 발견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자유와 정주(定住)를 동시에 거머쥘 수가 있을까? 정주할 땅을 확보하여 지키려거든 바닥에 경계를 그어서 지켜야하고, 자유를 얻고자 하늘을 날려거든 영토라는 속성을 버려야 하늘 위에 영역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안주할 수 없는 새의 삶이 때론 안락한 영토 위의 삶이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며, 영토를 지키는 자는 구속 없이 하늘을 오가는 새가 부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의 다양한 종(種)이 조화를 이루어가듯이, 다양한 생태의 조건이 곧 자기의 에너지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학습해 와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계절이 오면 무작정 피어오르는 꽃
내가 CI KIM의 작업이 진행되는 작업실을 방문하며 받은 느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토를 갖지 않고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이었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영토를 넘나드는 새의 날갯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방황하는 불안감은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내가 놀라게 되는 것은, 그렇게 내가 투사하는 필터 위로 펼쳐지는 순수한 열정의 동작들이 마치 들꽃이 피어나 들판을 채워나가고 있는 듯한 환영이 생기는 것이었다. 미학적 성취를 하려는 목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치 그 꽃들은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숙명처럼 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씨가 모질고 가뭄이 밀려와도 망설임 없이 끝내 들에 피어나고야 만다. 화면 위에 펼쳐지는 불안정과 방황의 모습은 바로 들에 무작정 피어 오르는 꽃들을 닮아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처음 고개를 내미는 나뭇잎과 풀잎과 꽃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싹이 자라고 꽃망울이 피어 새 생명을 만드는 흥분과 열망이 가득한 화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바로 내가 받은 경외감의 근원이었다.
CI KIM에게는 색을 만드는 모든 재료, 형태를 만드는 모든 물체가 상상을 자극하고, 이를 통하여 표출하고자 하는 목표가 떠오르면, 창작 자체에 몰입한다는 점이 대단히 소중한 가치로 승화되는 지점인 것이다. 마치 들에 무작정 피어나는 꽃이나,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코뿔소나 동일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 도달하고 보니, 나에게 예술이 걸어가는 표현의 길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새롭게 환기가 된다.
온 몸과 터질 듯한 심장으로 뿜어내는, 무조건적으로 솟아나는 열망이 자리하는 화면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CI KIM에게는 유일한 창작의 조건이라고 읽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동작이 만드는 내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과정에 만나는 수없이 누적되는 열망에 빠져있는 갈증과 충족의 시간들인 것이다. 전시장에 펼쳐진 그의 작업들을 대하면서, 에너지를 느끼고, 계절 따라 변화하는 무조건적인 생태의 모습이 읽어지는 지점이 이러한 추상성의 표출이며, 아직도 그를 점유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관심과 열망을 목격하게 된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유로운 영혼의 날개 짓이 그만의 목소리가 되어 나의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내가 게하르드 리히터와 같은 멋지고 이상적인 작가의 모습을 연상해내게 된 것도 이러한 공통분모에 기인한 것일 것이다. CI KIM에게도 더 이끌어갈 열정이 쉼 없이 활개 칠 것이다. 영토를 구축하지 않고 날갯짓하는 것과 들꽃처럼 피어나고자 끊임없이 충동하는 열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계속 지켜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며, 나를 포함한 감상자에게 어떤 감동을 지속시켜 나가게 될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조건으로 열어 놓고자 한다.
2019년 5월
■ 이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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