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 Knocking Air전
2020.05.12 ▶ 2020.07.05
2020.05.12 ▶ 2020.07.05
전시 포스터
정서영
Blood, Flesh, Bone 2019, wood, 68 x 52 x 236 cm
정서영
Table A 2020, wood, glass, ceramic, 120 x 58 cm
정서영
No.0 2020, cast aluminum, stainless steel wire, branch, 291 x 82 x 49 cm
정서영
Space, Nose 2020, ceramic, painted plywood pedestal, 29.9 x 21cm, 64 x 68 x 106 cm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2020년 5월 12일(화)부터 7월 5일(일)까지 정서영의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 Knocking Air›를 선보인다.
정서영은 199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가 ‘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의 새로운 범주로서 자리 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작가이다.
90년대 한국은 이전의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와 소비 지향적인 가치관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현대미술 현장에서는 이전의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회화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적 감수성을 갖춘 ‘신세대 미술’이 눈길을 끌던 시기였다. 정서영은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비현실적인 간극을 조각의 요소로 끌어들이며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조각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루어 나가면서 산업화된 사회곳곳에서 흔히 발견되던 스티로폼, 리놀륨, 플라스틱, 스펀지, 합판과 같은 비-조각적인 재료들을 조각적인 상태에 이르도록 했다. 작가가 특히 예민하게 인식했던 지점은 고도의 압축성장을 통해 파생된 일상의 풍경 곳곳에 자리 잡은 ‘기능주의적 사물’이었다. 이처럼 정서영은 현실의 경제구조가 빠르게 재편되면서 생겨난 잉여생산물이자 그 과정의 증거물인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면서 이를 조각적 상태로 끌어들였다.
전시의 타이틀 ‹공기를 두드려서 Knocking Air›는 공기라는 비가시적인 요소를 ‘두드린다’는 불가능한 행동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이후 발생하게 될 예측 불허의 상황을 기대하게 하는 언어적 수행성을 파생시킨다. 작가는 구글 번역기로 ‘공기를 두드려’라는 문장을 돌렸을 때, 무심코 튀어나온 —그의 표현에 의하면 구글리쉬— ‘Knocking Air’를 전시의 영문 타이틀로 사용한다. 이러한 과정은 평소 옳고 그름의 기준의 바깥에서 사물과 언어가 관계 맺도록 해 온 작가의 유연한 사고의 흐름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세라믹, 알루미늄, 제스모나이트, 유리, 천 등 보다 다양해진 재료를 통해서 유연하게 조각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정서영은 조각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와 더불어, 변별적 사유와 인식을 통해 평범한 사물이 조각이 되는 순간을 포착해왔다. ‹공기를 두드려서›는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조각을 언어로 인식해온 기존의 예술 실천에서 벗어나 조각 자체의 자율적인 미학적 언어를 활성화한다. 27점의 신작과 구작의 작품들은 다양한 매체로 조각 내부의 형식과 세부적 요소들의 관계 그리고 조각이 되어가는 시간과 이를 둘러싼 공간을 사유하며 독특한 조각적 세계를 실현해 나간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호두가 든 쇼케이스 ‹호두*›, ‹호두**›, ‹호두***›(2020) 가 갤러리 1층 안쪽 공간에 걸려있다. 작가가 ‘플라스틱’이라는 재료에 집중하며 캐스팅한 호두 조각들이 세 개의 벽걸이형 쇼케이스 안에 흩어져 있다. 쇼케이스의 표면은 호두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로 덮여 있는데, 유리 커버 양쪽이 조금씩 비어있어서 온전한 쇼케이스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는 호두라는 전형적인 대상을 바라보는 관습적인 시선을 깨기 위해 그것의 재료, 형태, 색깔, 위치 등의 조건을 낯선 방식으로 변형하고, 호두가 놓이게 될 쇼케이스의 디테일 역시 가공했다. 정서영은 그간 나무, 합판, 각목과 같은 재료로 수위실, 전망대, 책상, 책장, 쇼케이스와 같은 가구 형태의 작업을 해왔다. 그는 인간의 신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구의 기능성을 참조하면서 사물의 한 측면을 남겨두지만, 재료의 물성부터 그것의 크기, 상태 등을 새롭게 구축하거나 소거하는 방식으로 평범한 사물을 조각적 상태로 바꾸곤 했다. 카키색 ‘플라스틱’ 호두와 적벽돌색의 ‘나무’ 쇼케이스라는 이질적인 재료와 색이 충돌하는 ‹호두›는 한국 사회 곳곳에 편재한 기능성이 강조된 사물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사물이 조각이 되어가는 중요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서영은 2008년 ‹괴물의 지도, 15분› 이후 줄곧 텍스트 드로잉 작업을 해왔는데, 이들은 대개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A4 종이 형태의 도자판 위에 펜슬 형태의 유약으로 쓴 텍스트 드로잉 10점을 선보인다. 이들은 “네 벽으로 둘러쳐진 이 정원에는 가시가 돋친 보라색 꽃을 피우는 키 큰 키 큰 식물들이” “유들유들한 덧셈” “점점 다가와 둘로 갈라지는 것”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 와 같이 현실적으로 말이 성립되지 않거나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 드로잉이다. 세라믹의 미세한 물성이 느껴지는 텍스트 드로잉이 본래의 기능보다 과장된 좌대 위에 올려지면서 이둘은 하나의 매스(mass)로 인지된다. 작가가 쓴 텍스트는 도자기판 위에서 번진 채 구워졌는데, 이러한 번짐 현상은 이차원의 도자평면에 감춰진 공간과 깊이를 드러낸다. 미묘하게 다른 세 가지 톤의 흰색 좌대들로 인해 조각을 경험하는 순간이 더 첨예해진다.
조각이 만들어지는 시간은 작가의 작업에서 줄곧 등장해온 예술적 주제이다. ‹0번› 과 ‹1번› 은 나뭇가지가 탁 부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오래된 문제› 역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스티로폼을 빠르게 조각한 것을 알루미늄 캐스팅한 작품이다. ‹무제›(1994)는 앞서 작가가 줄곧 이야기해 온 ‘사물이 조각이 되는 순간’이 좀 더 직관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이다. 나무로 만든 3단 수납장 맨 위 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옷걸이, 그 위로 무심하게 걸린 헤링본 천의 상태는 보는 이에게 긴장감과 더불어, 사물에 얽힌 일상의 평범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세 개의 기둥 ‹피, 살, 뼈›(2019), ‹노란색, 그것›(2020), ‹검붉은색, 그것›(2020) 역시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는 순간을 첨예하게 드러내면서도 소속이 없는 형태가 조각으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작가는 정해진 형태는 없지만,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물질 요소인 ‘피, 살, 뼈’를 나무 안내판 위에 새겨 넣었다.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두 기둥 ‹노란색, 그것›, ‹검붉은색, 그것›은 본래 ‹피, 살, 뼈›를 만드는 실험 과정에서 파생된 종이 기둥을 철재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노란색, 그것›의 기둥 밑 침대 위에는 작은 거울이 올려져 있고, ‹검붉은색, 그것›은 왁스를 먹여서 구긴 서류 봉투가 기둥 윗면에 성글게 매달려 있다. 그 봉투 안에는 작은 열쇠가 숨겨져 있어서 봉투 표면에는 열쇠 자국이 미세하게 보인다. ‘Blood Flesh Bone’이라는 유기적인 글씨가 새겨진 둥근 나무 표지판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뇌리에 강렬히 박히게 된다. 노란색 기둥 앞을 스쳐 지나 갈 때는 마치 작은 거울에 뒷덜미를 잡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며, 검붉은색 기둥에 매달린 봉투 표면 위의 미세한 열쇠 흔적은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질 때만이 포착 가능한 조각적 순간이다. 세 개의 기둥은 작가가 예민하게 포착하는 조각적인 시간을 물리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매니페스토(manifesto)의 기능을 한다.
‹테이블 A›(2020)는 테이블 형태의 조각이지만 그것의 전형적인 구조와 거리가 멀다. 작가는 테이블의 다리를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나무 의자와 나무 조각들을 재료로 선택한다. 바닥에는 테이블 다리 사이로 잘린 나뭇가지 조각들이 놓여있고, 유리 선반 위에는 주먹을 쥐거나 손가락이 꺾인 형태의 도자와 고속도로 모양의 조각이 놓여있다. 조각들의 관계는 마치 작가가 던지는 수수께끼 같아서 ‘도대체 왜 테이블 위에 주먹이 있고, 고속도로가 있는지’ 의문을 증폭시킨다. 이 혼란스러움은 테이블의 균형을 맞춘다는 기능적 조건에서 파생된 결과이자 겉으로는 불확실한 관계를 보이며 나타난 조각들 사이의 잠재적인 연결을 생각하게 한다. 정서영의 조각에 나타나는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감각은 예술의 기호학적 해석과 더불어 권위주의적 사회에 대한 작가의 거부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정서영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사물들의 조합은 작품의 메시지를 ‘읽는 것’에 길들어진 동시대 미술관람자에게 당혹스러움과 긴장감을 안겨준다. 작가는 사회란 결국 헐거운 언어로 세워진 공통의 신화임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의 조각적 사물이 현실 세계의 이해 가능한 논리적 언어에 함몰되지 않도록 부단히 애써왔다. 정서영의 조각은 “사물에 대한 추측과 오해, 그리고 발견을 일삼으며 그것이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알리려고 노력” 1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물을 둘러싼 의미의 영역을 적극적인 독해의 영역으로 남겨 둔다.
유토로 캐스팅한 호두 조각이 등장하는 두 채널 영상 ‹세계›(2019)가 갤러리 2층의 독립된 공간에 놓여있다. 이 작품은 새하얀 배경에 얌전히 놓인 호두를 10분 25초의 시간 동안 관찰하는 영상이다. 화면 사이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두 알의 호두 표면에 진 주름과 깨어진 모양이 미세하게 다른 껍질뿐이며, 이는 단 몇 초 정도면 파악할 수 있는 장면이다.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는 첫 단계에서 제작한 이 영상은 그가 조각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천착해왔던 “어떤 것을 집중해서 오래 보는 시간”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호두의 외형은 허물어지고, 이를 둘러싼 공기, 시간, 빛, 그림자, 사운드와 같은 미세한 환경의 변화가 우리를 둘러싸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파편적인 경험이 아니라, 망막에 맺힌 호두의 미세한 변화가 몸을 타고 전이되는 총체적인 감각의 경험이다.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사운드2가 만들어 내는 무형의 공간 —우리의 의식이 만드는—안으로 호두가 쑥 들어오게 되면서, 이 사건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다. ‹세계›는 정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운동의 시간 가운데, 조각과 온전히 조우하는 내밀한 세계를 마련한다. ‹세계› 속 호두는 그 자체로 완성된 조각이 아니라, 호두를 둘러싼 빛, 그림자, 공기, 사운드와 같은 환경 요소와 예측 불가능한 시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지는 조각이다.
‹세계›와 한 공간에 존재하는 알루미늄 조각 ‹같은 것›(2020)은 작가가 1997년, 미완성의 조각을 찍어 놓은 사진을 현재의 시간으로 끌고 와서 다시 캐스팅한 조각이다. 작은 테이블 위에 강아지 형상과 소조 작업 뼈대가 나란히 놓인 알루미늄 조각은 서로서로를 닮아가는 상태에 멈춰 있다. 작가는 종종 한 쌍의 쌍둥이 조각을 만들곤 하는데, 이는 본래 하나였던 대상이 둘로 나뉘게 되면서 그 대상이 존재하던 시간과 공간 역시 나뉘어 지면서 미지의 영역이 생겨날 것이라는 상상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리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영역으로서 공간은 정서영의 조각을 인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같은 것›은 이런 미묘한 순간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조각이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이전에 해왔던 작업의 단서가 전시장 곳곳에 수수께끼처럼 등장한다. ‹뼈와 호두 Bone and Walnut›(2016)에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았던 ‘호두’가 마침내 그 물리적인 실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가방 속 열쇠를 찾다가 무작위로 관계없는 물건들을 잡게 되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사진 작품 ‹증거 evidence›(2014)에 부재했던 열쇠 역시 이번 전시에 등장한다. 또한 영상 ‹미스터 김과 미스터 리의 모험 The Adventure of Mr. Kim and Mr. Lee› 속 한 등장인물이 반복적으로 돌리던 모나미 볼펜이 ‹볼펜›(2020)으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예전의 작업을 다시 현재로 소환하여 재조합하거나 새롭게 재현한 작품들이 있다. HG Masters는 정서영의 작품을 일컬어 “최초의 증강현실(proto-augmented reality)”3 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가상의 기억과 사물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정서영의 조각적 세계를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마술처럼 다루는 정서영의 능력으로 허구는 이곳에 존재할 명분을 얻게 된다. 사물에 대한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에서 출발한 그의 조각은 작가와 사물들이 쌓아가는 내밀한 시간에서 갈라져 나온 새로운 차원 혹은 허구적이고 시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낯선 사물들의 조합 가운데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미지의 영역을 통해 우리는 ‘사물이 조각이 되는 비범한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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