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보희
The Terrace 2019, Color on canvas, 324x520cm
금호미술관은 동양화 매체를 기반으로 구상 풍경 회화의 지평을 넓혀 온 김보희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김보희는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대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추상적 배경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구성하여 자신만의 조형적, 개념적 탐색을 이어왔다. 2020년 5월 15일부터 7월 12일까지 선보이는 김보희 초대전 《Towards》는 2019년~2020년에 제작된 다수의 신작과 대형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김보희 작가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22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1981년 제30회 국전 특선과 1982년, 1983년 제1회, 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을, 1992년에는 제2회 월전미술상을 수상했다.
국내 화단을 둘러싼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 속에서 동양화가로서 작업을 시작한 김보희 작가는 동양화가 추구하는 자연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감하였지만, 필요에 따라 서양화의 재료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수묵과 채색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재료의 사용과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채롭게 구사되는 화면의 구성은 어느 한쪽 문법에 귀속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풍경을 완성했다. 1980년대 인물과 정물, 그리고 풍경 등 비교적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었던 김보희는 1990년경부터는 자연을 소재로 좀 더 견고하게 작업을 구축해 갔다. 작가에게 자연은 문명 이전 생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대상이자, 인간에게 사색과 관조를 유도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김보희는 우리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풍경으로 어쩌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자연의 면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화면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 풍경 위로 자신의 내면 혹은 세상을 향한 태도를 겹겹이 쌓아 올린다. 화면에 엷게 여러 번 올려진 물감은 동양화 특유의 질감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색을 재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2000년 중반부터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제주도의 풍광은 작가 김보희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법칙을 가까이 목도하면서 일상에 머물렀던 자연은 어느새 그의 삶이 되었다. 전시 《Towards》는 작가가 오랜 시간 주제로 그려온 제주의 풍경을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로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인다. 과감한 색면과 세필의 중첩으로 현대 채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다 풍경 시리즈, 원형의 자연으로서 동식물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Towards〉 시리즈, 2017년 전후로 자연이 지닌 시간의 순환성과 불변의 진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생의 주기를 식물의 씨앗과 숫자로 비유한 작품 등 각각의 화면에 담아낸 대상은 다르지만 묵묵히 견지해온 작가의 시각과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김보희의 작품 속 나무는 그 나무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부터 줄기, 그리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온전히 감내해 온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는 하나의 매개체인 것이다.
이처럼 생명의 기원으로서 원형의 자연과 그러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한다. 이번 전시는 2019년~2020년 새로 제작한 33점이 포함된 미공개작 36점과 드로잉 2점, 그리고 대표작 17점이 함께 구성된다. 금호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김보희 초대전 《Towards》는 50년 가까이 작업을 지속해온 김보희 작가의 예술 세계를 집약적으로 선보이며, 동양화라는 한정된 매체에서 초월하는 풍경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시 구성 – 1층
1층 전시장에는 김보희 작가가 자신의 정원에서 가까이 마주한 대상들을 담은 6점의 회화가 전시된다. 8개의 캔버스를 연결하여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한 작품 〈The Terrace〉(2019)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테라스 앞의 풍경을 담고 있다. 원경의 자연은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평원법으로 다가오지만, 발 밑에 자리 잡은 듯한 테라스는 약간씩 어긋난 바닥의 경계면으로 시점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인 시점 처리 방식에 기인한 것으로, 테라스에서 계속 거닐면서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는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같은 풍경 안에 있는 듯한 경험을 갖게 한다. 〈The Terrace〉 양 옆으로 위치한 동식물의 초상은 밀도 높은 묘사로 형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러 번 덧대어진 붓질은 대상이 지닌 고유의 질감을 재현하고 있으며,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생략 혹은 아웃포커스된 배경 처리는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작가의 시선을 담고 있다.
전시 구성 – 3층
3층 바깥 전시장은 색면 추상을 연상시키는 바다 풍경 시리즈 작품 10점으로 구성된다. 바다는 김보희 작품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등장한 주요 소재 중 하나로, 육지 혹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경계를 화면 중앙에 전면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대비를 이루는 색채와 섬세한 묘사는 미묘한 물결의 흐름과 대기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3층 바깥과 연결되어 안쪽 전시장에서 전시된 〈In Between〉(2019)은 가로세로 4m 가까이 되는 대형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신작이다. 2x4m 캔버스 두 개를 이어 붙여 완성한 이 작품은 캔버스 간의 물리적인 경계를 무색하게 하며 하늘과 바다가 공존하는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에 따라 다른 색채로 반사되는 바다의 표면은, 화학적 작용으로 만들어내는 물감 안료의 단순 색면을 넘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을 구현한다.
3층 안쪽 전시장에 자리잡은 또 다른 작품 〈The Days〉(2011~2014)는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자연 속으로 들어간 작가의 시선을 응축한 대작이다. 왼쪽 화면에 등장하는 이른 아침의 바다에서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밤하늘로 이어지는 풍경은 시간의 흐름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기를 담아낸다. 현실 세계에서 각기 다른 주기로 피어나는 식물들은 〈The Days〉 안에선 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공존한다.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은 생명들은 자연의 포근한 울타리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태초의 상태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을 초대하며,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전시 구성 – 2층
자연을 향한 근거리의 시선은 〈The Days〉뿐만 아니라 다른 근작에서도 등장한다. 2층 바깥 전시장은 밀림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풍경과 식물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각각의 풍경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고 있는데, 빛의 밝기와 대기의 습도를 한껏 품은 자연의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모습을 내비친 야자수 나무의 꽃을 그려낸 작품 〈Untitled〉(2019), 나무 너머로 보이는 두 계절의 정오가 담긴 〈Over the Trees – An Autumn High Noon〉(2019)과 〈Over the Trees – A Summer High Noon〉(2019)에서 각기 다르게 구사되는 묘사와 표현은, 시간마다 다른 모습을 갖는 자연에 대한 김보희 작가의 면밀한 관찰이 돋보인다.
풍경 속 시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2017년 이후 좀 더 직접적인 묘사로 나타난다. 작가가 매일 산책을 다니는 제주 중문의 거리를 그린 〈Jungmoon〉 시리즈는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도시의 단면을 담고 있다. 도로 위로 은은하게 스며든 해질녘과 밤의 달빛, 그리고 자동차의 전조등이 발산하는 조명빛은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빛의 변화에 따라 새로워지는 같은 공간, 다른 풍경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만 체감하지 못하는 시간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김보희의 풍경은 보이는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 아닌 작가가 눈으로 보고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빛의 형상이다.
전시 구성 – 지하 1층
김보희 작가는 자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생명체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2016년부터 소재로 가져온 씨앗은 자연의 순환 체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으로서 그의 화면을 가득 채운다. 지하 1층 바깥 전시장에 전시된 〈The Seeds〉 시리즈는 단색의 배경 앞에 거대한 크기로 제시되는 씨앗의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형태와 무늬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씨앗을 실제로 관찰하여 그리거나 상상해서 창조하기도 하는데, 꽃을 피우기 위해 혹은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하는 씨앗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관조적 태도는 상상력이 더해져 대상에 오롯이 투영된다. 그리하여 구현된 씨앗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발아하고 꽃을 피우는 객체가 아닌 자연의 섭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생명이다.
김보희 작가에게 시간은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지만 동시에 꽃과 열매가 소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씨앗처럼, 자연은 순환의 질서 속에서 생을 유지한다. 지하 1층 전시장에 선보인 〈Self Portrait〉(2019)은 삶의 주기와 순환에 대한 김보희의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씨앗부터 꽃, 그리고 시들어진 꽃잎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았다. 시간의 흐름에 빗겨 나지 못하고 점차 변해가는 자신과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 닮았다고 느낀 작가는, 빛 바랜 듯한 배경 위로 꽃의 주기를 정밀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김보희는 우리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Towards〉는 문자를 활용하여 선보인 근작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흐름이 달력과 나이의 숫자로 파악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끼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형상화했다. 화면에 펼쳐진 숫자는 작가에게 의미가 있는 날짜이거나 기억해야 할 시간이다. 김보희의 시간은 지나쳐 버리거나 끝을 향해 가는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영속의 시간은 현실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이상향으로 우리를 향하게 하는 상(想)의 시간으로서 작동한다.
1952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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