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환: 온실 속의 노마디즘 My Toes Are Free
2020.06.11 ▶ 2020.07.31
2020.06.11 ▶ 2020.07.31
노세환
My Toes Are Free 001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노세환
My Toes Are Free 002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노세환
My Toes Are Free 003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미술의 임상실험실’ 갤러리에무 기획초대전 《온실 속의 노마디즘 : My Toes Are Free》는 ‘생산적 노마디즘’에 대한 연구와 담론 생성을 목표로 기획되었다. 유목주의로 번역되는 노마디즘은 공회전하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반발로써 나온 문화행태이다. 이 행태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노마디즘에 있어 ‘탈출’과 ‘탈주’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한다. 즉, 어떠한 현실의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방향성이 뚜렷하다면 ‘탈주’이고 없다면 ‘탈출’이란 것이다.
YOLO로 대변되었던 젊은 세대의 가치는 ‘소비적 노마디즘’으로 볼 수 있다. 생존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아닌, 신자유주의가 현대인에게 부여해준 허상의 가치이다. 현실을 타개하려는 모색없이 이루어지는 소비적 노마디즘은 욕망에서 발현하는 취향적 자유이며 온실 속의 유목이다. 이에 반해 ‘생산적 노마디즘’은 유목경제처럼 축적이 아닌, 자족적이며 자연 속의 삶을 실천하면서 자유를 주창하는 행동주의를 말한다. 우리는 ‘취향적 자유’가 아닌 신체의 절박함을 통한 ‘필연적 자유’를 추구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번 전시에는 노세환의 신작 ‘My Toes Are Free’ 시리즈가 발표된다. 이 작업은 ‘My hands are tied.’ 라는 서양의 관용적 표현에서 시작한다. '나의 손은 묶여있다.' 로 직역되는 이 문장은 타인을 도와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내가 아닌 ‘외부’적 조건임을 표현하기도 하고, 타인을 돕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권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 속 등장하는 손이 자유롭지 않은 신체는 절박함 앞에 서있다. 신체적 절박함은 노 마디즘을 추구한다. 여기에서의 노마디즘은 선택적, 취향적 자유에서 오는 '소비적 노마디즘'이 아니다. 신체 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에 절박한 신체는 공포와 마주한다. 이 절박한 신체의 노마디즘은 공포와 결별하려는 즉, 생명력 가득한 ‘삶의 전망’에 신체를 맡기는 운동으로써 그 자체로 ‘생산적 노마디즘’이 된다.
이 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우리의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 허상적 노마디즘을 깨닫고 삶에서 실천하는 행동주의적인 노마디즘에 대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 김희은(갤러리에무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노세환 작가의 과거 인터뷰나 정리한 글 등등을 읽어보니 비슷한 또래의 감성이 생각난다. 마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옛날 음악이 나오면 반가워하는 마음 비슷한 것일까.
지금의 70년대 후반생의 삶은 선배들의 운동권 세대에서 막 벗어난 세대여서 자유로운 해외 여행에서부터 문화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세대이다. 서태지와 신해철도 등장했지만, 학창시절을 보내며 <전람회>의 음악을 듣고, 이승환과 이적의 노래에 젖는다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 ‘세련됨’이라고 여겼던 세대이다.
한편으로는 IMF의 위기를 겪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어느어느 학교만 나와도 보장된다는 탄탄대로의 삶은 어디로 가고, 공채나 취업의 문, 부모님의 사업실패 등등으로 격변기를 몸으로 겪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예술가의 삶을 살겠다는 것은 상당한 불안감을 이미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쨌든 노세환 작가의 작업들은 그런 ‘문화적 세련됨’이 연상되는 부분과 삶에서 지속적으로 ‘예술가 되기’의 부분이 연계되고 있다. 미술계의 현실이 마치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듯 20대, 30대, 40대 초반을 거치면서 ‘예술가’와 ‘예술가의 태도’에 대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진행된다.
회화과를 나왔지만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면서 바뀌어가는 사물에 대한 접근, 미디어에 나오는 다큐 영상을 보면서 변화되는 삶의 태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물과 익숙치 않은 접근에서 나오는 균열감을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떤 현상들을 예술가로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작업에 반영해야 하는지 결정해 가는 길이 된다. ‘미디어가 하고 있는 행위와 비슷하다’ 는 작가의 인터뷰에서처럼 노세환은 관객과의 마주함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이적’과 ‘김동률’이 생각나는 유행가/대중가요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작가의 시리즈 중 시리즈가 유독 관객과 많이 만났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어떤 카테고리의 예술 작업들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안착되고, 관객이 그 내용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의 것’이 아닌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멜트다운 시리즈가 다소 그런 잇아이템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시리즈는 작가를 상업작가와 미술관 작가를 나누어 보게 되는 지점에 서 있게 했던 시리즈이기도 하다. 미술계의 유래 없는 호황기를 누리면서 상업화랑 작가로 더 알려지게 되었던 지점에서 예술가 스스로 겪었던 미술계의 구분짓기와 혼란이 이후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작품이 탄생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두었던 노세환은 이후 전시에서 같은 그릇인데도 배달할 때 쓰이는 용기와 옥션에서 45억에 팔린다는 그릇, 미술관이라는 전시장에서 오는 권위 등에서 오는 균열감에 주목한다. 예술계에서 상품화되거나 박물관 입장으로 인정받는 도자기/그릇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예술가로서 진입하기 어려운 제도의 장벽에 감정을 이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시리즈들은 속담을 소재로 한 작업들이다. 작가의 개인사와 ‘작가 되기’의 지침에서 오는 우울감으로 변환하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속담의 특성상 구전으로 내려오는 삶의 지침과 격언 같은 것이라 익숙하게 몸과 마음에 착 붙으면서도 비틀면 위트가 생기는 면면들이 작업에 반영된다.
사실 노세환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모르고 있다가, 토탈미술관 월요살롱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다. 아직 나는 토탈에 그렇게 익숙하게 지낼 때가 아니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노세환 작가는 ‘이미’ 서로 눈빛만 교환해도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월요살롱을 노세환 작가가 하기로 한 날이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결연하게 전시를 열겠지만, 그냥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초대는 아무도 안하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상한 개인전이라고 생각했고, 전시에 대한 느낌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보니 특유의 깔끔함이 묻어나는 전시였다. 그때 만들었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서 비롯된 작품 이후에 작가는 신체와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는 작업을 계획하게 된다.
그 즈음에 내가 하고 있는 댄스스포츠나 관심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초대를 하거나 사진을 부탁하면서 노세환 작가도 전혀 모르던 고윤정 편집장/ 혹은 고윤정 큐레이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동작과 커넥션, 텐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짧게 발레를 배웠던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댄스스포츠의 경우에는 파트너십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 각종 손동작으로 오고가는 몸의 대화가 춤의 전부였고, 몸의 훈련은 대부분 상대방에게 어떻게 나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춤이다. 적절한 힘, 적절한 균형을 주고 받아야 춤을 제대로 출 수 있고, 그 중심에는 손이 있다. 잠깐 내가 만들었던 워크숍에서 노세환 작가는 만약에 나의 신체 한 부분으로 동작을 만든다면 ‘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회화를 하면서 나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업들이 과연 예술 작품으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랜 기간 생각했고, ‘손’은 예술가의 노동력을 상징하는 부분이자 노세환 작업의 내용들을 연결짓는 매개체가 되었다.
백지장을 맞들면 나을 것인가 낫지 않을 것인가를 다루기 위해 A4 용지를 댄스스포츠 선수가 마주잡고 춤 버전으로 하나를 만들게 되었고, 연이어 발레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발레를 배웠을 때 발레/춤이라는 것은 어쨌든 머리끝, 손끝, 발끝까지 몸으로 컨트롤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발을 마치 손처럼 가위, 바위, 보가 가능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훈련시켜야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나누면서 (2020) 시리즈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는 속담 중에 ‘My hands are tied’ 즉, 영어권 관용어구 중 ‘미안하지만 도와주지는 못하겠다’는 뜻을 비틀어 반대로 만약 손대신 발이 자유롭다면 적극 도움을 주고 소통 관계를 유지할지에 대한 작업이다. 손이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들을 발이 대신 해주면서 우리의 예술적 상상력은 나날이 증폭되었다. 발가락으로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풀며, 가위로 꽃을 다듬고, 작은 찻잔에 차를 따르기도 하였다.
다시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지점으로 돌아가보면, 새로운 작업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일 수 있게 된 지점은 노세환이라는 예술가의 삶에서 손과 발이 갖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발달장애 아이들과 오랜 기간 수업을 같이 했던 작가에게 신체 중 일부가 불편하고, 다른 신체가 상대적으로 발달하는 등 균열감을 갖는 과정을 경험했던 것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오랜 기간 생각했던 결과로 보인다. 발레리나의 발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영역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순간들은 뒤로 하더라도, ‘발’이 지금같은 불통의 시대, 그리고 단합할 수 없고 각자 도생해야 하는 시기에 소통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에 내던져지기를 바래본다.
■ 고윤정(큐레이터, 이미단체 대표, 토탈뮤지엄프레스 편집장)
노마디즘은 유목주의로 번역되는데, 마치 컨베이어벨트 앞의 부품 조립공 같은 현대인의 삶에 대한 반발로 나온 문화행태다. 유목문화는 정주문화와 대립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주는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축적을 위한 삶의 형태인 반면, 유목은 초원에서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축적이 아닌 자족적이며 자연 속의 삶이다.
노마디즘은 들뢰즈에 의해서 주창된 이래,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추구하는 방랑자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들뢰즈는 ‘탈출’과 ‘탈주’를 구별하여 노마디즘이 국가로 상징되는 현실의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방향성이 뚜렷한 탈주라는 것. 새로운 가치창출의 방향성이 없으면 탈출일 뿐이라고 한다.
청년세대에게 이러한 가치관은 매우 유혹적이다. IMF 이후 경제환경이 각자도생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취업난과 저임금으로 사실상 축적이 불가능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이 현실은 N포세대 나아가 헬조선이란 말로 표상된다. 2017년에 한창 유행했던 ‘욜로’(You Only Live Once)가 이 현실의 탈출구인 것으로 보였다. 강조하기에 따라서 오바마 같은 정치인은 이를 치장해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유혹은 마케터들의 가장 좋은 밑밥에 불과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은 아무도 욜로를 말하지 않고 있다.
욜로와 유사한 용어로 사토리 세대, 밀레니얼 세대, 픽미 세대, 얼로너, 스테이케이션, 프리터족, 긱족 등이 쏟아져나왔다. 이런 걸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크게 철학적 원류가 노마디즘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실제적이다.
‘욜로’가 성행한 것이 박근혜 정부 때이고 그의 탄핵과 함께 사라진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동시에 미국도 정권이 바뀌면서 신자유주의가 막을 내리고 신현실주의가 등장하는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세계 어디도 이제 욜로 같은 유혹―‘사회를 바꾸는 대신 나를 위한 여행(혹은 삶)을 떠나자‘ 따위의 마취제―에 혹하지 않는다.
탈출이건 탈주건 욜로 문화에서는 사실상 이 둘이 구별되지 않는다.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해 나를 위한 여행을 가든 자아개발에 나서든 손에 돈을 쥐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 돈은 현실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현실에서 벌어야만 된다. 그는 유목을 통해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그의 노마디즘은 잘못 이름 붙여진 환상이다. 돈이 떨어지면 돈을 벌어야 하는, 떠났던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그는 온실 속에 있는 여행자인 것이다. 여전히 그는 금융자본주의하의 온실에서 양육되고 있을 뿐이다.
이 기획은 욜로가 한창이던 2017년에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이 기획은 매우 생소해서 마치 대단히 긍정적인 삶의 가치(특히 청년세대에게)인 욜로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춰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불과 2년 남짓 지난 사이에 이 주제는 작가들에게 생소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찌 보면 그만큼 허약한 현대인의 정신상태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싶다. 패션과도 같은 유행이 마치 깊이 있는 인생의 태도인 것처럼 오도되는 데는 ‘마케팅’과 ‘보이지 않은 손’(빅브러더)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노마디즘 문제는 철학자들, 문화기획자들까지 합세한 ‘거대한 산업’이자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정초에 기여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드는 마취제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미술의 임상실험실 갤러리에무’에 감돌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우려는 진행중인 촛불혁명과 세계체제의 변화과정(설명은 생략) 속에서 상당히 불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마디즘이 제기한 유효한 측면, 즉 컨베이어벨트 앞의 부품 조립공 같은 현대인의 삶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N포세대의 상실감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대한 시각예술적 성찰은 남아있다. 그들의 목소리, 항변이 현실을 변화시킬 무기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소비적 노마디즘이 아닌 생산적 노마디즘에 대한 담론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생산적 노마디즘이란 유목경제처럼 축적이 아닌, 자족적이며 자연 속의 삶을 실천하면서 자유를 주창하는 행동주의를 말한다.
■ 김영종(기획)
My Toes Are Free.
소통의 부재는 소통하고자 할 수 있는 창구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이기적인 관점에서 미리 정해 놓고, 소통을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자신이 겪어온 상황이 만들어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혹하게 걷어버리는 태도가 소통의 부재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My hands are tied.’라는 영어권의 관용적 표현을 접할 때 얄밉고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상대방을 도와주지 않으려는 의지를 자신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실은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가치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마치 당연한 가치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이익과 권한에 침범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도 상당히 강한 것처럼 보인다. 남을 돕기는 돕지만, 희생의 범주는 한정적인 것.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너무 야박해 보이기도 하는 희생의 가치관은 조금 유연해져야 하지 않은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 권력의 상하관계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계속적으로 바뀐다. 신입 사원에게 속칭 꼰대 짓을 하는 직장 상사가 이런저런 사연 끝에 회사의 중역이 된 과거의 신입사원의 인턴으로 들어가는 한 방송사의 드라마는 많은 비약이 있긴 하지만 상하관계가 뒤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다. 오늘은 내가 남을 도와주는 입장일 수 있지만 내일은 내가 도움이 필요로 하게 될 수 있다는 상황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또다시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잘하자는 식의 논리를 펴나가는 것도 불편함이 있다.
‘My hands are tied.’ 당신의 상황은 안됐지만 나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일종의 포기를 요구하는 이 표현을 두고, 멍해진 머리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양 팔에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가 저 자리에 있다면, 그들은 ‘나의 발이 묶였어요.’라고 대답을 할까? 혹은 그들이 도와주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다면, ‘나의 발이 자유롭다.’고 말해 주기는 할까? 이런 엉뚱한 상상 속에서 발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 시작이고, 어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의지가 있다면 나에게 “나의 두 손은 묶였지만, 두 발에 발가락은 자유로우니 그것들로 당신을 기꺼이 도와주겠다.”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 노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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